Landscape –Daegu
지도와 그림엽서를 사랑한 아이에게
우주는 그의 거대한 식욕과도 같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본 세계는 얼마나 거대한가!
기억 속에서 더듬은 세계는 얼마나 작은 것인가!
어느 날 아침, 우리는 떠난다.
머리에는 불꽃을 가득 담고
마음속은 원한과 쓰디쓴 욕망을 가득 안고,
우리는 떠난다. 파도의 리듬을 따라
유한한 바다 위에 무한한 우리의 꿈을 싣고
-Charles Baudelaire, Le voyage 中에서-
우리는 늘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며 산다. 박병일은 이번 전시에서 우리를 ‘저곳’으로 안내한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인간을 여행하는 인간: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고 정의했듯이 인간은 누구나가 이동의 본능뿐만 아니라 여행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박병일 또한 자신의 상상 속 이상향을 찾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누구나가 꿈꾸는 다른(ailleurs) 혹은 저 너머(au delà) 세계로의 여행은 현실 속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여행자가 되어 옛 화가들이 산수를 그렸듯 도시를 그려낸다. 그에게는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산이고 바다이다. 그리고 이런 낭만적인 기질은 이번 전시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Landscape –Paris, 2022, 72.7cm× 60.6cm, 화선지에 수묵
Landscape –Praha, 2022, 72.7cm× 60.6cm, 화선지에 수묵
작가는 도시의 존재하는 모든 것, 빼곡히 도열한 건축물조차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의미가 있고 상호적이며 환위 될 수 있다고 믿는듯하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마주하면 도시지만, 도시가 아닌 마치 산수 절경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레고 블록을 쌓듯 한점, 한점 찍어 올린 그의 시간의 층위에 우리의 유실된 기억과 중첩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계 없이 반복되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삶을 관통하며,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지속된 시간 위에서 관계맺기를 시도한다. 이것은 박병일의 작업을 변별하게 만드는 요소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세밀함과 섬세함을 장착하고 마치 건축설계사가 세부도면을 그려내는 것처럼 매우 꼼꼼하게 화면의 질서를 바로잡으며 현대의 도시를 그려낸다.
Landscape–Santorini, 2022, 72.7cm× 60.6cm, 화선지에 수묵
Landscape –Firenze, 2022, 72.7cm× 60.6cm, 화선지에 수묵
Landscape – Manhattan, 2022, 72.7cm× 60.6cm, 화선지에 수묵
박병일은 이번 전시에서 대구, 파리, 프라하, 산토리니, 피렌체, 맨해튼, 부산을 선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현실 세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상세계로서 작동한다.
“아무 곳이라도 좋소. 아무 곳이라도.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이라는 보들레르의 시구처럼 여행의 욕구는 작가를 ‘이곳’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저곳’으로 떠밀어 내었고, 그렇게 그가 만들어 낸 수묵의 도시에서 우리는 유토피아를 만나게 된다.
Landscape 시리즈는 우리에게 세상을 다시 감각 하도록 하며, 그 경험들은 또다시 연결되고 통합되어 우리의 정신을 한껏 고양 시킨다. 그의 도시풍경에서 몽상의 일렁임과 같은 의식의 요동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비록 그의 여행의 출발점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의 욕구나 발견의 열망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는 분명 여행을 통해 차가운 빛과 광물의 도시들을 한 편의 시로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을 보는 내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며, ‘나는 어떠한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와 같은 오랜 시간 미루고 미뤄왔던 질문들을 꺼내어 스스로에게 답할 시간을 갖게 한다.
전시의 제목인 <VOYAGE>는 불완전한 존재로부터 완전한 존재로의 이행의 과정과 닫혀있는 공간으로부터 열려있는 공간으로의 지향을 이야기한다. 정적인 그의 움직임의 흔적들로 채워진 그의 작업은 오히려 유기적이고 리드미컬한 조형으로서 표출되고, 그런 형식의 구속성은 오히려 그가 사는 세계와 꿈꾸는 이상화된 세계가 수없이 만나고 교차됨으로 상징되며 더욱 완벽해졌다.
Landscape–Busan, 2022, 107cm× 65cm
(detail cut)
특히 매화의 배치는 수묵화에 생생함을 더하는데, 작가가 서정적인 내면세계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과 연관된 다양한 이야기적 요소를 숨겨 바라보는 이의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하며 자신만의 상징과 세계로 감상자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가 다녔을 길마다 피어난 매화가 이를 더욱 명징하게 해준다.
또한, 수묵화의 여백으로 비워둔 매화이지만 그의 매화에서는 충분한 향기가 느껴진다. 향기란 공간의 이동이 가능한 존재로 그것이 통과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이 단절이 없는 감각이 지니는 연속성과 지속성은 일종의 무한함을 낳고, 자연스럽게 내적 세계에 그 무한함을 제공함으로써 평화롭고 조화로운 유토피아를 창조하게 한다.
박병일에게 있어서 매화는 이처럼 다다를 수 없는 피안을 마주하게 하는 비상한 위력을 지니며, 그 향기는 맡아짐과 동시에 사라지지만 이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우리의 정신세계에 남아 있게 된다.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시간은 어찌 보면 전지전능한 신이다. 시간의 강박은 인간의 긴장감이나 불안감은 고조시키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일각일각 집어삼키며, 우리를 쉴 새 없이 침식한다.
작가는 현대인이 갖는 이 시간에 대한 강박,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 등 상념의 자락을 잠재우는 방법으로 ‘여행’을 택했고, 그 여정을 통해 찾아낸 해답을, 그의 방식대로 우리에게 내어준다.
(전시 전경)
지도와 레고를 사랑했던 소년은 도시를 그리는 작가로 성장했고, 마치 보들레르의 시속 아이처럼 여행자가 되어 늘 묵직하게 우리를 짓누르던 질문들의 해답을 이번 개인전 <VOYAGE>에서 풀어내었다.
낯선 도시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여행, 나아가 삶의 의미로까지 주제를 확장 시킨 박병일, 그에게 두 개의 정체성이 있다면 하나는 작가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자일 것이다. 그가 자신이 마주한 시간과 공간을 탐색하는 과정이 여행과 참 많이 닮아있다.
박병일 개인전 <VOYAGE> 2022.12.10.-12.22. 르큐브갤러리 작가소개 박병일은 동국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상풍경에 내재된 심미적 공간 표현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화선지 위에 수묵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있으며, 도시건축물을 표현하는 블록 형태의 미점준과 담묵을 사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발전시켜왔다. 서울, 부산, 베이징에서 13회의 개인전을 하였으며, 현재는 우리들의 삶의 공간에서 보여지는 여러 경험과 사건의 풍경들을 <Landscape>시리즈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