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할 때 그것은 때때로 두려워서이고 때로는 유인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자신의 신체를 훑어보는 타인의 시선은 그에게서 그의 신체를 훔치는 것처럼 보이거나, 반대로 자신의 신체의 노출은 무방비 상태의 타인을 곧 자기에게 넘겨줄 것처럼 보인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최근 홍상수 작품에서 주로 늙은 사람들은 타인을 호출하고, 젊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소환당한다. 본 글에서 다룰 <인트로덕션>을 위해선 이러한 최근 홍상수 작품의 경향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홍상수 감독의 흑백 작품 중에서도, 겨울의 투명하고도 희며 창백한 냉기와 백색이 강조되는 <강변호텔>, 영화의 중심은 기주봉 배우가 연기하는 영환이다. 강변의 호텔에 묵고 있는 영환은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직감하고 두 아들을 호텔로 부른다. 그리고 다른 객실의 상희라는 여인도 시련의 상처에 선배, 연주를 자신의 객실로 부른다. 양자 모두 인물을 소환했다는 점에선 동일하지만, 그 이후의 향방은 다르다. 영환은 두 아들에게, 특정한 삶을 바라는 의미에서 각별한 이름을 붙여줬다. 죽음을 직감한 영환의 시선은 ‘막’이 껴있다. 두 아들이 이름을 붙여준 자기 뜻대로 잘 자랐기를 바라는 것, 이제는 좌초되어 더 이상 그들을 변화하고 이끌 힘이 없는 영환은 아들들을 그저 이름의 상태로 믿고 싶고, 이름에 따른 이미지를 소환한다. 또 영환은 예술가다. 그 어떤 누구보다 자신만의 '표상'을,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이카’라는 원리를 몸소 만들어내는 자다. ‘이카’라는 원리가 이분법적인 소속과 무소속으로 사람들이 구분된다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영환에게 소속된 아들들과 그와 유리된 여성들은 나누어진다. 이에 영환의 소환에 응해서 찾아온 아들들은 아버지의 원리에 붙잡힌다. 아버지의 자리로 인도되는 두 아들은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으로, 진실과 무관한 하나의 환영으로 전락한다. 자신의 표상과 죽음에 대한 지론을 완성해 놓은 노인은 스스로의 죽음으로, 소속과 무소속이 나뉘어 있던 형제와 여성들을 하나로 모이게 만든다. 노인은 이렇게 그 최후까지도,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소환하여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이카를 만들어낸 노인이 죽었기에 청년들은 더 이상 노인을 중심으로 소속과 비소속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강변호텔>에서 젊은 여성들은 소환이나 처분에 불응하고 있었다. 소속이나 규정을 거부하고 강변으로 향하는 여인들, 노인의 죽음으로 그의 규정에서 벗어나는 청년들, 이는 김민희가 분하는 젊은 여성 '감희'가 주인공인 <도망친 여자>에서 이어진다. 노인이 소환하는 자라면, 청년은 방문하고 찾아가는 자며, 즉흥을 경험하는 자다. 전작에서 영환은 이름을 붙여주고 선물을 건네주며 자신의 시를 읊어준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무엇을 확인하고 전파한다. <도망친 여자>에서는 남성이 그렇다. 수영을 만나러 온 시인은 자신의 의중으로 그녀를 좌우하려는 자, 영순의 집에 길고양이를 항의하러 찾아온 남자는 그의 입으로 아내의 주장을 좌우한다. 감희와 만난 정 선생 또한 자신의 편견과 기억으로 그녀를 지배하려 든다. 그들은 줄곧 자신들이 만들어낸 타인의 상을 소환하고 확인한다. 영화는 이러한 시선으로부터의 도망이다. 그러한 시선에서 도망가 상대방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영순이나 감희의 세계에 수영의 삶을 편입하는,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시선으로 도망쳐온다. 소환 대신, 대상 스스로가 방문하게끔 만든다. 감희는 영순이나 수영의 소환에 의해 그들에게 방문한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선택해서 찾아간 것이다. 청년은 소환으로부터 도망친다. 오히려 영순과 수영처럼 대상이 스스로 방문할 수 있게끔 집을 열어두고, 자신의 세계를 고정하지도 않는다. 여지를 남겨둔다. 도망치는 그들은 남편으로부터 비롯되는 아내이자 과거의 자신, 나와 타인에 대한 자신의 상념으로부터도 도망친다. 더 이상 이에 집착하지 않으며, 비로소 변화와 반성이 가능하다. 감희에게 사과하고, 그녀와의 대화로 남편에 관한 생각을 달리하는 우진의 태도가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청년들은 마지막까지도 머무르지 않는다. 죽음, 호텔 주인의 처분을 그저 수긍하던 영환과 다르다. 영화의 결말까지도 달아나는, 그래서 세계, 타인, 심지어 나 자신 또한 도망의 대상으로, 이를 통해 매 순간의 새로움과 마주하는 것이 홍 감독의 청년이다.

여전히 남과 여의 차이는 도드라진다. 하지만 거기에 소환하는 자로서 노인, 붙잡히거나 도망치는 자로서 청년이 구분되고, 또 남성이 더 붙잡히고 소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면, 여성은 비교적 달아나려 한다. 이에 2010년대까지 열렬히 탐구하던 욕망은 사라져 세대와 성별의 차이에 따른, 붙잡고 달아나는 관계와 태도의 탐구가 주안점을 이룬다. 이러한 그의 경향이 신작 <인트로덕션>에서도 이어진다. <도망친 여자>를 비롯한 그의 무수한 작품처럼 '3'개의 서사 및 차원으로 이뤄진 구성과 부모님이 아들을 소환하는 <강변호텔>과 유사한 구조를 이어온다. 구조뿐만이 아니라 흑백이라는 영화의 색채도 최근 <풀잎들>, <강변호텔>과 유사하다. 하지만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홍상수가 필름 시기에서 디지털 시기로 넘어갈 때 35mm 필름으로 찍은 흑백 작품인 <오! 수정>을 연상케 하는, 흐릿하고도 몽환적인 흑백이다. 이런 느낌이 나는 이유는 안 그래도 흑백이라서 포착되는 피사체의 정보가 명확하지 않은데, 여기에 포커싱도 흐릿하여 형체는 더더욱 선명하지 않고, 심지어 사운드마저 울린다. 이에 디지털로 촬영되었지만 흡사 필름을 연상케 하는, 불명확한 질감이 대두된다. 이러한 영화의 매체성은 의도된 조악함이라고 추측된다. 본 작품은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현재에 의해, 과거의 기대와 계획이 줄곧 불발하는 과거-현재의 시간성을 담아내는 극이므로, 언제나 기억으로 전락하는 순간들을 그것에 상응하는 매체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기억이 이처럼 소리도, 형체도 불명확한 영상들에 다름 아니던가. 이러한 매체성과 더불어 영화는 풀숏으로 1.88:1의 화면비에 인물을 꽉 차게 구성하여, 공간이 전달되지 않곤 한다. 특히 2막의 경우 독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국에서 촬영된 1·3막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풍긴다. 어쩌면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공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공간 대신 나 자신이나, 부담되는 주변인들에게 신경을 쏟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는 과거-현재를 탐구하는 극임과 더불어, 즉흥과 우발성에 대한 탐구가 시도된다. 그렇기에 이에 상응하는 연출 또한 사용되고 있는데, 2막에서 어느 한 독일 민간인이 멀리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듯 고개를 돌린다. 영화의 촬영 자체가 이러한 즉흥적인 효과, 현실의 침투를 소거하지 않는다. 각본에서 벗어난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영향도 담아낸다. 이러한 연출이 의도되지 않은 촬영을 담아낸 것이라면, 즉흥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연출은 편집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과거에 기대한 현재가 불발되는 것을, 아버지나 영호, 기주봉 배우가 발화하기로 계획했을 대화들을 모조리 잘라내는 편집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분명 어떤 대화를 한 모양이다. 1막에서 잘려 나간 부자 및 배우와의 식사는 3막에서 짧게 언급이 된다. 하지만 계획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듯, 익히 그들이 기대했을 미래를 이어내지 않고 오히려 잘라내며, 우발적으로 불발되는 현재나 미래의 계획을 편집으로 보여준다. 1막에서 아버지는 아들 영호를 부른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별다른 기대가 없어 보인다.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 얘기하고 식사하길 기다리는 시간을 지루하게 여기고 있고, 아버지의 태도는 근엄하던 평소와 별다르지 않다. 하지만 영호와 간호사, 아버지와 배우와의 만남은 즉흥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즉흥에는 활기가 돈다. 전자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할 대화, 아들이 상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그런 상이었으리라. 그 인물은 살아있다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나의 목적에 굳어있는 하나의 사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타인은 예측할 수 있는 바와 기대에서 벗어난, 즉흥적이고 무한한 바가 함께 공존한다. 그리고 이러한 즉흥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정해지고 규정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아버지는 그리스도에게 기도한다, 어떤 계시를 주신다면, 다른 방향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이는 그가 자신에게 예상할 수 있는, 충분히 가능한 삶이 아닐까. 변화라기보다는, 익히 자신 안에 내재하여 있는, 다만 조건이 불발된 그런 삶이 아닐까. 하지만 즉흥에 따른 변화는 언제나 예측을 벗어난다. 2막에서 독일에 간 주원에게 찾아온 영호, 이를 계기로 독일 유학을 논의하는 두 연인처럼,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그런 가능성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즉흥에 우리는 몸을 맡기고 가장 적합한 모습을 취해야 한다. 1막의 끝자락에서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눈과 바람은 차다, 그렇다면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며 부대껴야 한다. 영호는 간호사와 포옹하게 될 것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2막에서 영호는 전화로 연락하자는 주원의 제안을 파기하고, 독일로 직접 찾아왔다. 기대하고 그려본 미래와 맞닥뜨린 현재는 전혀 달랐으며, 이러한 우발적 현실에 걸 맞는 즉흥적이고 능동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3막에서 이러한 즉흥에 따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1막에서 배우를 만나고, 그가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에 배우지망생이 된 영호다. 하지만 3막에서는 그 배우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시더라도 취하면 안 된다는, 지나친 즉흥과 우발을 금지하는 룰을 설정하고, 3막 내에서도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영호는 변화하지 않는다. 즉흥에 따른 능동적 변화도 필요하지만, 돌발 속에서도 모든 삶이 흔들리지 않는 주체적인 나로 거듭나야 한다. 배우는 영호와 친구에게 술을 들이켜게 만든다. 술을 들이켜게 만들며 계획에 따라 경직된 대상이 아닌, 즉흥을 마주하며 살아있는 대상을 마주 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그 즉흥이 대상을 정복해선 안 된다. 2막 이후에도 유학 가지 않는 영호, 3막에서 자기 뜻을 굽히기보단 지키기 위해서 자리를 뜨는 영호가 바로 그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불변하는 요소들에 의해 내가 아는 사람들은 과거의 모습과 닮아있다. 하지만 분명 다르다. 간호사는 좀 더 야위었고, 그녀가 마주한 영호는 이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또 2막에서 주원의 어머니가 마주한 화가도, 한국에서 독일로 간 여파인지 좀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녀 자신도 이를 인지한다. 독일에서는 더 이상 존댓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그녀는 한국에서와 달리 말을 편하게 하리라. 이렇게 변화하기 때문에, 변화 이전의 대상을 기대하고 상상한 대화는 영화에서 모두 잘려 나가는 것이리라. 영호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영호는 어머니 품에서 자랐다. 이에 간호사만큼이나 아버지도 그를 자주 접하지는 못했으리라. 아들의 변화를 모르고 대화를 계획했을 그의 모든 발화는 현재에 무의미하랴. 이에 잘려 나갈 뿐이리라.
3막에서도 마찬가지다. 1막 이후 배우지망생이 되었지만, 3막 당시에는 배우 되기를 포기한 영호다. 그렇기에 배우가 조언하는 충고는 모두 잘려 나가고, 현재의 그의 신념이라 할 수 있는 포옹과 연기의 진정성에 대한 지론만이 남겨진다. 3막에서 친구와 하기로 한 대화도 마찬가지이랴. 분명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영호는 과연 그에게 계획한 말을 하긴 했는지, 했다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그 짧은 시간에도 친구나 영호는 달라졌기 때문에, 이에 따라 대화는 무의미해지고 불필요할지 모른다. 그 즉흥을, 대화의 불발을, 기대와 달라진 대상을 인지해야 하는 것은 바로 부모 세대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본 작품에서도 타인을 소환하는 것은 부모 세대다. 영호의 아버지는 자신의 한의원에 영호를, 주원의 어머니는 자신이 미리 다 통제해놓은 화가의 집에 주원을, 영호 엄마는 자신이 준비한 배우와의 점심 식사에 영호를 초대한다. 2막에서 화가의 집이 포착된 이후에, 길가의 나무에 지어진 무수한 새집들을 홍 감독은 포착한다.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이전, 그들의 탄생을 고대하고 만들어 놓은, 이미 완성되고 계획된 미래에 부모는 아이들을 초대한다. 하지만 여전히 홍 감독의 청년들은 벗어난다. 일단은 부모의 소환에 불응할 순 없다. 영호도 주원도, 모두 부모님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하지만 생각이 다르다. 2막의 도입부에서, 주원의 어머니의 지인이긴 하지만, 오히려 더 젊고 미래의 여지를 남겨두는 화가는 공간을 가로질러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시선에서 이탈하는 화가의 발걸음, 그것이 곧 청년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2막에서 어머니가 초대한 그 집의 문을 열기가 두려운 주원이다. 어머니는 능숙하게 문을 연다. 주원은 많은 것이 두렵지만, 반대로 많은 시간을 경험해봤고 화가와도 친분이 있는 어머니는 공포랄 게 없다. 하지만 딸은 이러한 어머니의 의식을 모른다. 마냥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기에 버겁고 두렵다. 그래서 연인인 영호가 왔다는 소식에 어머니를 따라가던 길을 이탈한다.
3막에서도 배우가 마시는 술의 속도를 영호나 친구가 따라가기에는 너무도 버겁다. 그렇기에 영호나 친구는 간혹 길을 이탈한다. 그리고 익히 알아서 이런 고행들이 익숙한 부모 세대와 달리, 그들에게는 여전히 처음 경험하는 즉흥이자 우발이기에, 서로 같이 이겨내고 이러한 감정을 공유하는 상대를 바라곤 한다. 혼자는 두렵고 아무것도 모른다. 나 자신을 알긴 하지만 어렴풋이 안다. 타인이 있어야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1막에서 환자는 찬 음식을 먹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기야 하지만, 확신이 없었기에 그냥 먹고 탈이 났다. 이를 의사가 확실시하며, 자신이 진정 하면 안 되는 것이 드러난다. 2막에서 주원과 화가가 대화한다. 화가의 질문에 주원은 왜 자신이 독일에 오고자 했는지, 이 꿈을 언제부터 품었던 것인지, 자신조차도 의심하지 않았고 등한시했던 사실을 일깨우게 되리라. 나도 나를 모른다. 주원은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도 ‘같습니다’로 말을 끝내며 확신을 갖지 못한다. 나는 다만 익숙할 뿐, 마냥 다 알면서 산다고는 할 수 없다. 또 '혼자'는 외롭고 두렵다. 나이를 먹어도 그렇다. 의사가 잠시 자리를 비워 진료실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배우처럼, 타인의 부재에 오히려 내가 모호해지고 두려움이 커지는 것일지 모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혼자 그러한 풍파를 버텨내기에는 너무도 나약하다. 타인의 존재에 나는 더 빛나기에 1막에서 잠깐 갈라진 두 연인은 금세 지루해하며 빛을 잃고, 2막에서는 독일까지도 쫓아온다. 그리고 1막과 3막처럼 나를 진정 이해해주는 간호사, 친구가 있음에 나는 차디찬 기운을 버틸 수 있다. 내가 가야 할 길에 도움을 바라는, 1막 도입부에서 영호 아버지의 기도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혼자 있는 인류는 외롭고, 즉흥에 무기력하다. 그래서 우리는 ‘곁에 있어 주소서’, ‘개시를 부탁 하나이다’를 되뇐다. 하지만 타인이 내가 되어선 안 된다, 그리고 타인은 내가 바라보는 것을 선명케 하기 위함이지, 타인의 시야를 빌리기 위함은 아니다.

브뤼겔,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 1568
배우가 두려워하는 것도 무대 위가 아니다. 오히려 영호에게 연기 지론을 펼치는 배우의 태도는 그 누구보다 거침이 없다. 다만 한의원에선, 진료실에선 의사가 필요했을 뿐이다. 내가 나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에서는 이처럼 당당하지만, 그럴 수 없는 공간에선 영호처럼 ‘남들 다 하는’ 행동을 따라 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으랴. 영화 속에서 가장 연장자인 기주봉 배우가, 그 어떤 다른 배역도 아닌 '배우'를 연기하는 것도 이와 관련되지 않을까. 그는 남들이 바라는 배역에 매몰되지 않고, 배우로서 자신을 우직하게 표현한다. 그는 남들 다 하는 것을 따라 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청년들은 내가 진정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다. 그의 말 한마디에 배우가 되고, 연인의 말 한마디에 독일에 가고 유학을 생각해보며, 연기가 흔들린다. 그들은 혼자 서 있기가 어렵다. 영호는 1막에선 간호사와 껴안아야 하고, 2막에서 유학을 가기 위해선 아버지에게 도움을 바라야 한다. 이러한 영향 관계 속에서 청년들은 아직 요구되는 배역을 연기할 뿐, 자신을 표현하는 배우일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시야와 의식 전부를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서로는 각자의 세계에 갇혀 있다. 영호는 배우에게 '연인을 두고 다른 배우와 포옹하는 것이 연인에게 죄악'이라고 말했으나, 배우는 '포옹 그 자체가 죄악'이라고 받아들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가 바라보는 세계가 다른 것이다. 각자는 두 개의 표상에 서로 갇혀있다, 포옹은 절충될지 모른다.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다. 3막에서 영호는 주원과 결별한 모양이다. 주원은 오직 영호의 꿈에서만 나타난다. 그의 눈에서 바라본 주원만이 존재하지, 주원의 눈에서 바라본 영호와 세계는 없다. 주원의 눈병과 결별은 모두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녀를 소경으로 여기고 인도하고자 하는 영호의 바람이다. 그리고 호텔 창가에 서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영호와 친구의 시선도 다르다. '어머니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로 양분된다. 하지만 영화의 질감만큼이나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아니다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라는 나의 기대를 투영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곧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표상이자 혼탁한 세계가 아닐 텐가.
그렇게 어둡고 흐릿해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빌리고자 하였다. 보이는 것은 오직 나 밖에 없다. 영화를 꽉 채운 풀숏처럼 말이다. 그마저도 때때로 흐릿하다. 하지만 우리는 서서히 타인의 세계가 아니라, 내가 바라본 세계를 바라봐야 하리라. 1막의 영호는 간호사의 포옹이 간절했고, 2막의 영호는 아버지의 자금이 간절했다. 그리고 그 모든 만남에 자신이 가야할 길이 흔들리며 무수히 변화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생각하는 연기에 대한 지론이나 생의 태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내게 다가오는 춥고 거센 겨울 바다의 파도에 당당히, 오히려 능동적으로 몸을 맡기고 싶다. 더 이상 친구에게 포옹을 바라지 않는다. 친구의 포옹과 보필이 아니었어도 그는 추위를 이겨냈으리라. 3막에 이르러 자신을 지배하는 즉흥을 피해 자리를 뜰 수 있고, 소경을 인도할만한 시야를 가진 영호는 비로소 '나'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야에서 비로소 영화에서 혼탁하던 공간의 정보가 투명하게 보인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렇게 길을 가는 우리는 그때그때 다르다. 새로운 공간은 우리에게 즉흥으로 변화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1,2,3막의 영호나 주원은 상시 소개되어야만 하고, 언제나 그들은 새로운 도입부에 진입하는 것이다. <풀잎들>이 이야기가 연속되지 않고 파편적이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아름의 흐트러짐 없는 시선이 균일한 작품이었다면, <인트로덕션>은 인물들은 동일하게 등장하지만, 그들이 3막에 거쳐 탈피하며 뒤바뀌어가는 모습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상시 소개되는 타인을 마주해야지, 내 기억과 기대에 갇힌 타인을 소환해선 안 된다. 언제나 나의 인식을 빗나가는, 그 타인을 환대해야 하리라. 어쩌면 홍 감독의 신작도 그런 기로에 놓여있다. 소환하는 부모세대와 이에 끌려오는 청년세대라는 일련의 뼈대만 같을 뿐, 이전 작품의 형식으로부터 달아나는 작품, 동시대의 선명하고 매끈한 영화들에 대한 기대감으로부터, 심지어 그의 작품에 기대하는 형식으로부터도 더욱 조야하게 우발적으로 달아난 작품, 그래서 오히려 그의 시선이 선연히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인트로덕션>이랴. / 글.박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