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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답게 살기 | ARTLECTURE

‘나’ 답게 살기

-렘브란트의 <자화상>-

/Picture Essay/
by 이지아
‘나’ 답게 살기
-렘브란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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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보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받아들이려 한다. 설령 그것이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어도 말이다. 진정한 ‘나로 산다’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자.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말이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다.”


5년 차 직장생활 정리를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내게 누군가 했던 말이다.


미술관이라곤 평생 가본 적 없던 내가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방문한 생애 첫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이다. 파리를 왔으니 루브르쯤은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과 약간의 호기심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림이란 나와는 매우 거리가 먼 고상하고 우아한 작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루브르의 모습은 내 생각하곤 매우 달랐다. 박물관은 77*53cm 남짓한 작은 그림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으로 왁자지껄한 시장판 같았다. 고개를 쭉 빼고 까치발을 한 사람부터 아이를 목말 태운 아빠까지 조금이라도 더 잘 보기 위해 아우성들이었다. 또 한쪽에선 사진기를 들이대고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그래,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면 느낌이 있을지도 몰라.’      


수많은 인파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섰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각도를 바꿔가며.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기도 했다. 그녀가 말을 건넨다고도 하던데 난…….

어지러웠다.      


이것이 그림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 앞에선 누구든지 저절로 감동이 밀려오는 줄 알았다. 모나리자니까. 하지만 워낙 문외한인 데다 감수성이라곤 애당초 갖고 있지 않았던 20대의 얄팍한 삶의 깊이로는 제아무리 모나리자를 들이댄다 한들 ‘소귀에 경 읽기’였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로 미술공부를 시작한 지 벌써 15년이 되어간다. 스케줄이 나오면 가볼 만한 미술관부터 찾았다. 전 세계 미술관을 다니며 원작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나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자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비행 스케줄을 기다리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결국 5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파리로 향했다.


‘그래, 나답게 살자.’


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한다는 것은 내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사직서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가장 많이 들여다봤던 작품이 한 점 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의 자화상!  


         

‘나’는 누구인가?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에서 40킬로 정도 떨어진 벳에스테이흐에서 비교적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9남매 중 여덟 번째였던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덴 국립대학에 들어갔지만 그림에 소질을 보이며 학교를 그만두고 미술 기초와 원리 등 본격적인 화가 수업에 들어간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회화도 이에 발맞춰 권위적인 교회나 왕가의 컬렉션이 아닌 소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룬 부르주아 가정에 어울리는 작고 우아한 그림을 선호했다. 주제나 규모 면에서 네덜란드 회화가 다른 유럽회화와 다른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내면을 꿰뚫어 보는 깊이 있고 진지한 인물화가로 유명했다. 특히 당시에는 온갖 종류의 길드(중세시대에 조합원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상공업자들이 만든 동업자 조합)가 성행하면서 집단 초상화가 유행했던 시기였다. 외과 의사 길드의 해부학 수업, 의류제조업자 길드의 그룹 초상화 그리고 <야경>과 같은 걸작들은 모두 길드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렘브란트의 집단 초상화는 큰 인기를 얻었고 그에게 즉각적인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다. 20대에 이미 유명인사가 된 렘브란트는 부유하고 교양 있는 집안의 사스키아와의 결혼으로 사회적 지위까지 얻게 된다. 더 이상 방앗간 집 아들이 아니었다. 결혼 후, 렘브란트는 인물 화가답게 가족들을 화폭에 여러 차례 담아낸다. 특히 작품 속 사스키아의 모습은 마치 비밀스러운 일기장을 보듯 그들의 결혼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봄의 여신 플로라> 1634. 에르미타주 박물관      



하지만 1650년대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회화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몇십 년간 휩쓸었던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그림보다는 사치스럽고 우아한 작품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소 엄격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렘브란트 초상화는 네덜란드 독립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할 수 있는 장식적이고 화려한 정물과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느낌의 초상화를 원했다.


하지만 육중한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렘브란트에게 도식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초상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렘브란트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컬렉터들의 취향은 이미 샀던 작품들을 거부하거나 환불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4백여 개가 넘는 그의 작품은 6백 길더라는 보잘것없는 가격에 처분되고 만다.      

이렇듯 젊은 나이에 화가로서 크게 성공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데는 1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육십 평생에 걸쳐 수많은 사별을 감당해야 했다.    

  

1630년 24세. 아버지 사망.

1635년 29세. 아들 롬베르튀스 2개월 만에 사망.

1636년 30세. 생후 2개월의 두 딸 모두 사망.

1642년 36세. 첫 번째 부인 사스키아 사망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이즈음 어머니와 아내 사스키아의 여자 형제 모두 사망.

1663년 57세. 두 번째 부인 핸드리케 사망

1668년 62세. 아들 티투스 사망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100여 차례가 넘게 유화나 드로잉, 에칭으로 자화상을 제작했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는 자화상, 주먹코를 하고 있는 자화상, 놀란 표정의 자화상, 모피 모자를 쓴 자화상, 잔뜩 인상을 찌푸린 자화상 등 그의 자화상은 새로운 예술의 시도와 탐구였다. 다른 초상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질감이나 깊이감은 이러한 시도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반복되는 자기 성찰을 통해 그가 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 ‘자기다움’이 아니었을까? 성공한 화가로서, 가장으로서, 혹은 그를 따라다니는 그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인간 렘브란트’ 말이다.   

  

렘브란트는 수십 점의 자화상을 남겼지만, 그의 자화상은 다른 화가들처럼 미화하지 않았다. 특히, 그의 말기 자화상을 보면 고상하고 우아한 차림새나 제스처는 전혀 없다. 오히려 넝마가 되어버린 옷, 백발이 다된 머리, 깊이 파인 주름, 권태와 회한의 눈빛을 숨김없이 진솔하게 내보이고 있다. 그의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림이 아닌 실제 렘브란트를 마주하고 있는 듯, 그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기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쓰라린 이별과 상실로 얼룩진 삶 속에서 화가로서의 명성마저 녹슬게 된 생의 끝에서 자신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워낙 복제품이 많아 그의 자화상이 정확히 몇 점인지 알 수 없지만 그중 가장 원숙미가 돋보이는 말기 작품을 소개한다.     




1668년 쾰른,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82.5*65cm     



죽기 4년 전에 그린 작품 속 작가는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지 않다. 지위에 걸맞은 특별한 포즈나 격조 있는 모습도 아니다. ‘보여주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냈다. 절망적인 삶 속에서 유일한 위안은 그림 작업뿐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비워내며 그리고 또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화가의 자화상은 많은 것들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 곤두박질쳐버린 사회적 지위, 가족을 잃은 허탈감, 상처, 절망, 덧없음……. 작가는 가장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며 벌거벗겨진 채 서 있다.      


     

반성문……. 남이 아닌 내 인생을 살자!


그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늘 무엇인가 숨기며 적당히 포장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고 불편해진다. 물론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늘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온 자신에 대한 반성의 의미에서 말이다. 부모님, 가족, 친구를 비롯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가 내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몹시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는데도 말이다. 내 인생을 살지만, 그 안에 진짜 나는 없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깨닫는 건, 그들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2년 전, 그토록 사직서를 던지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기업이 주는 안정감 뒤에 숨어 한 꺼풀 씌워진 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며 사는 자신이 너무 비겁하고 못나게 느껴졌다. 회사와 유니폼이 말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생긴 데로의 나로 살고 싶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말이다.      


돌이켜보면 파리 생활은 즐겁고 짜릿했지만 늘 불안한 삶이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게 했으니 말이다. 그 시절과 지금.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겼다는 것이다. 포기와 희생, 배려, 양보의 연속된 삶 속에서 온전히 나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보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받아들이려 한다. 설령 그것이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어도 말이다. 진정한 ‘나로 산다’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자.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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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아_항공사 승무원으로 재직하며 겪었던 일상과 예술을 통해 어떻게 하면 '온전한 나'로 살수 있는지 연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