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미래작가상 展>은 크게 세 개의 주제로 구분된다. 이지민 작가의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생각했는가>, 민가을 작가의 <Sign>, 류준열 작가의 <부재의 아카이브>. 사진은 작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고정된 장소와 시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작가의 시선을 바라보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느끼곤 한다. 좋은 사진은 단순히 상황을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의미까지 충분히 내포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후반 작업을 거쳐 표현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가 지향하는 지점이 분명해야 가능할 것이다.
세 작가의 작품에서 이 시대에 사진이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지민, 김수연, pigment print, 2019>
<이지민, 김은영, pigment print, 2019>
<이지민, 선유이, pigment print, 2019>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생각했는가.> 20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대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양귀자 모순 이 구절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20대라는 코드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나의 20대를 생각해보면 정답보다는 그 주변만 헤매는 것 같아 어려웠고 나 말고 나와 같은 시기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이 작업은 주변 인물들부터 시작하였다. 20대란 나이 때는 어른이지만 어른이 아닌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 요상한 시기 속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 마주하니까 어떠한 표본 속에 있는 개체 같았다. 그들 한 명 한 명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작업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는 표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현재 또는 과거나 미래의 20대들이 겪었거나 겪을법한 하나의 시기를 정성스레 기록하고 싶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자신들만의 생각이나 고민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이지민 작가는 20대라는 모호한 나이에 주목한다. 이도 저도 아닌 나이, 취업과 백수의 경계선에서 허덕이고, 졸업과 유예라는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연애와 결혼을 선택하지 못해 헤매는 완전한 것보다 불완전한 게 많은 나이다. 작가는 20대의 표본을 기록하고, 그 표본은 곧 작가의 작품이 된다.
작품은 하나같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보통 정면을 응시하면 당당하고 밝은 느낌이 들기 마련이지만 작품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들은 불안하고 불완전해 보인다. 그들은 말하자면 바코드다.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누군가 확인해주기 전까지 그들은 20대라는 모호함 속에 묶여 있는 것만 같았다.
작가는 그런 20대의 불완전함을 기록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20대라면 자화상처럼, 그 이상이라면 앨범을 보는 것처럼 그들의 눈을 보길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면 한 명 한 명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길 권장한다. 어쩌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항상 가장 중요한 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니까.

<민가을, Grandmother grandfather, pigment print, 2019>
<민가을, Missing Lid, pigment print, 2019>
<Sign> 나는 메시지 성(정보성)을 가진 피사체를 촬영한다. 어디를 가도 존재하는 광고판을 보면서 대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와 메시지는 분명해 보이는데, 그 안에서 말하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모호했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사는 지역(서울)과 그 주변에서 이전부터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지만,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형태가 무너진 메시지를 가진 대상들을 촬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강남 한복판에 쏟아지는 수많은 광고판을 보면서 느꼈던 모호한 감정은 정보 전달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여전히 지시하고 있는 그 모습에서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감정은 소비와 생성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익숙한 풍경’이 ‘감상의 풍경’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며, 본다는 것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내 감상의 영역이 이동했다는 것을 말한다. ‘실재’의 영역이 ‘실체’ 하지 않는 풍경 속에서 나는 이미지 너머에 보이지 않는 Sign을 느낀다.’ |
간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장소에 정체성을 부여하며,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 서울에서는 ‘좋은 간판 공모전’이 열릴 정도다. 간판은 논리적, 감각적, 시각적인 정보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없는 간판이라면? 민가을 작가는 간판의 의미를 상실한 간판들에 주목한다. 버려진 간판, 지시하는 대상을 잃은 간판들에서 느껴지는 의미 없음,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작가의 노력을 살펴본다.
사람들은 모든 행동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의미는 그것을 행동하게 하는 동기가 되고 결과물의 방향을 이끄는 본질이 된다. 어떤 행동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전체적인 방향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 속 간판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의미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고, 지시하는 대상을 찾지 못한 메시지는 외계어처럼 흩날린다.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나는 그냥 멈춰서 작품을 바라봤다. 마치 빈 곳을 응시하듯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작가가 간판을 찍기 전에는 간판들이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 속을 떠돌았다면, 작가가 간판을 찍은 순간부터 그 간판들은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작가의 작품을 가리키게 된다. 새로운 거처를 찾은 간판들은 그것들 자체가 사라질 때까지 다시금 지시하는 대상을 찾게 된 것이다. 분명 이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작가가 느낀 ‘Sign’은 어쩌면 간판이 노리고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류준열, 115동, pigment print, 2018>
<류준열, 2단지, pigment print, 2018>
<류준열, 인터폰 호출기, pigment print, 2020>
<부재의 아카이브> 내가 둔촌주공아파트를 알게 된 것은 2012년 고등학교를 단지 옆의 동북고등학교로 배정받으면서부터였다. 학교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단지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나는 2015년부터 이곳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2017년 둔촌주공아파트는 재건축을 위한 관리처분 인가를 받았고 아파트가 위치한 둔촌 1동이 서울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행정동이 되는 데에는 그로부터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번 작업은 이주가 끝난 아파트의 풍경과 아파트에서 수집된 물품들로 나누어지는 두 갈래의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지 속의 대상들은 대부분 나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이제 아파트는 완전히 철거되었고 남겨진 이미지들은 부재에 대한 기념비가 되었다. 나는 이것들을 보다 직관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내가 경험하지 못한 대상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엿보고자 한다. |
마지막으로 류준열 작가의 작품이다. 앞서 두 작가가 20대의 불완전함, 지시 대상을 잃어버린 간판의 모호함을 보여줬다면 류준열 작가의 작품은 그보다 명확해 보인다. 실제로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둔촌주공아파트’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가 고등학생 때 겪은 경험과 현재 그것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작품 속에는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한다.
첫 번째는 사진을 찍은 시점의 시간이고, 두 번째는 현재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간이다. 두 시간 사이에 있는 류준열 작가의 작품은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과거와 현재처럼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있다. 그렇기에 명확한 대상을 포착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포착한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 현실 때문에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나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둔촌주공아파트’를 수식하는 단 하나의 기호가 되어 관객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곳에 살았던 누군가는 작품을 앨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곳에 살지 않았던 또 다른 누군가는 작품을 역사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작가는 이런 다양한 감상들이 충돌하는 장으로 ‘둔촌주공아파트’를 선택한 것이다. 이곳에서 이뤄지는 관객과 작가 사이의 담론은 ‘둔촌주공아파트’를 자꾸만 상기시키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나마 계속 존재하게 만든다.
결국 세 작가의 작품은 모두 모호성을 담보로 한다. 20대, 버려진 간판, 사라진 아파트 모두 모호한 시공간과 현실을 사진 속에 포착하고 그것을 관객들과 공유하길 바라고 있다. 관객들은 그 모호함 속에서 현실을 바라본다. 확실한 것은 없다. 현실은 언제나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고, 우리는 그것을 그저 견딜 뿐이다. 세 작가의 작품은 그것을 상기시킨다. 이건 새로운 방식의 위로다. 단순히 우리의 현실을 공감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을 인지시키고, 그것을 자꾸만 떠오르게 만드는 것. 우리는 20대, 버려진 간판, 사라진 아파트를 보며 이런 점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전시정보: https://artlecture.com/project/5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