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ossible is Possible, ‘에릭 요한슨 사진展’
: “우리를 제한시키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다” - 에릭 요한슨
전시회를 다니다 보면 종종 지루한 전시회를 만나기도 한다. 분명 나올 준비를 다 하고 씩씩하게 전시장 안으로 걸어들어왔는데도 예상보다 재미가 없어 유심히 보는 척만 했던 전시회들이 머릿속에 스쳐 간다. 그런 내게, ‘에릭 요한슨 사진展’은 오랜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 좋은 설렘을 안겨준 전시회였다. 한 작품마다 오래 서서 작품을 곱씹게 되는, 그런 전시였을지도.
에릭 요한슨은 스웨덴 출신의 사진작가이다. 그러나 그는 엄밀히 말하면 사진작가인 동시에 이야기꾼이기도 하며,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가 카메라를 이용해 사진을 찍는 것은 맞지만, 그사이에는 많은 과정이 숨어있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내고,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를 포착해 자신만의 상상 속의 장소로 변화시킨다. 작품의 소스가 되는 사진을 찍어낸 후, 포토샵을 이용하여 2차 가공을 한다. 어쩌면 굉장히 현실적일 수 있는 직업이지만, 허구적이기도 하다. 그의 내면엔 어린아이, 또는 마법사가 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에릭 요한슨은 자신에게 사진이란 ‘셔터만 누르면 끝나는 게 아니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부터 자신의 상상력에서 나온 장면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다음 장면이 무엇일지, 이후의 이야기는 어떨지 상상하게 된다. 오래도록 그의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했던 이유이다.
“어릴 적 상상, 꿈꾸던 미래”
<The Full Moon Service, 2017>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진은 바로 <Full Moon Service>였다. 평소 달이나 신비로운 밤하늘을 좋아하는 나로선 보자마자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달을 좋아하는 나였어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달의 모양이 매일 바뀌는 것은 사실 사람이 직접 달을 바꿔주는 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라니, 참 웃음이 나는 재기발랄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진이 작가 본인이 가장 애정을 가진 사진인지,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유독 자세히 공개해주어서 좋았다. 머릿속 상상을 스케치로 옮기고, 어떻게 찍을지 구상하고, 실제 사람들이 달처럼 만든 공을 들게 한 채 사진을 찍고, 진짜 공을 진짜 달처럼 수정하는 작업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었다. 포토샵 작업을 할 땐 무려 150개 이상의 레이어를 썼다고 한다. 실제 깔았던 150개의 레이어를 축소해 사진과 함께 전시해두었는데, 셔터만 누르면 끝나는 게 아니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Leap of Faith, 2018>
마치 영화 <업(Up)>이 떠오르는 이 사진은 어릴 적 한 번쯤 해본 풍선에 매달려 날아가는 상상을 재현했다. 사실 풍선을 들고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는 저 사람이 떨어질지 말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실이라면 떨어지는 게 맞지만,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그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가지 않을까, 하고 바라게 된다. 어릴 적 상상과 꿈꾸던 미래가 결합한 사진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만 몰랐던 비밀”
<Falling Asleep, 2018>
내게 전시회를 가는 이유를 꼽아보라면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한 번에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 몰랐던 작품의 비하인드를 알 수 있다는 점, 전시회마다 개성 있는 포토존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나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대개 결과물만을 전시하는 중요한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달리 전시회는 ‘과정’에 더 힘을 주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Falling Asleep>이란 사진이 이번 사진전 내에서 가장 과정의 힘을 잘 보여준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에서 물건들과 함께 사람이 떠다니고 있는 듯한 이 사진은 어쩐지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저 사진은 어떻게 찍은 걸까, 궁금했는데 비하인드 영상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정답은 바로 물속. 수영장 속에서 카메라로 인물을 찍고, 포토샵으로 배경을 없앤 후 인물만 따서 합성한 것이었다. 다른 물건들도 사람이 손으로 들고, 비슷한 기법을 사용해 따로 합성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수고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으며, 기초 작업마저도 탄탄한 에릭 요한슨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조작된 풍경”
<Go Your Own Road, 2008>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를 천처럼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사람의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이 때론 어떤 말보다 힘이 있게 느껴지곤 한다. 제목도 한몫했다. ‘길을 들고 있는 남자’도 아니고, ‘Go on Your Road(너의 길을 가라)’였기 때문에 더 작품의 의미가 와닿았던 것 같다. 나의 길 정도는 내가 개척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묘하게 뻔뻔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그림이다.
에릭 요한슨의 상상 속에서 우리는 무거운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도 들 수 있고, 공중에 떠 있을 수도 있고,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 수도 있다. 상상을 정말 현실처럼 그려내는 그의 탁월한 재주는 여기저기 다양한 그의 작품들에서 묻어나온다.
“어젯밤 꿈”
<Life Time, 2017>
이전 사진들이 어딘가 재치 있고, 긍정적이고 밝은 사진이었다면 이 사진은 조금 다르다. 유쾌한 발상이긴 하지만,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다. 거대한 시곗바늘 위에 서서 조금 후면 바다에 빠질 것만 같은 긴급한 상황이다.
이 사진의 제목은 바로 <Life Time>이다. 인생을 시곗바늘에 비유하고 있다. 어젯밤 꿨던 꿈, 또는 악몽을 재현한 사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테마의 사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진이다.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은데, 벌써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고 공감하는 나 자신이라니, 어딘가 꺼림칙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한 공감 또한 그의 사진이 가진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에릭 요한슨의 작업실 스튜디오를 재현해놓은 공간
현실과 공상의 발칙한 변주에 빠져 허우적대니 전시장 밖을 나가기가 싫었다. 전시장 커튼을 열고 나오면 바깥세상이 현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끝으로 갈수록 더 찬찬히 작품을 감상했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의 신작 두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더 의미가 있었다. 한 작품마다 섬세한 작업을 하고, 공을 들이는 작가라 1년에 8개 작품 이상을 발표하지 않는다기에 더욱더 반가운 소식이었다.
에릭 요한슨 작품의 영감은 ‘만약?’에서 비롯되며, 우리를 제한시키는 유일한 것은 오직 우리의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오직 상상력만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처럼 이 전시를 보는 모든 이들이 감춰왔던 자신의 상상력을 건드리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