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에 살지 않았던 예술가를 소설로 만나는 기분은 어떨까? <천국은 다른 곳에>는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1848~1903)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페루 출신의 스페인 소설가 마리요 바르가스 요사(1936~ )가 2003년 쓴 그의 대표작이다. 국내에서는 2010년 새물결에서 출간했다.
2011년에 처음 읽었고, 2017년 두 번째로 읽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소설책으로 읽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처음에는 두 달이, 두 번 째는 한 달 하고도 반이 걸렸다. 사진과 회화는 같은 시각예술이기에, 읽은 책이기도 하다. 사진을 잘 하기 위해선 사진가뿐만 아니라 회가에게도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는 화가 폴 고갱과 그의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자신이 꿈꾸는 천국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간 두 사람의 인생을 그려냈다. 폴 고갱과 플로라 트리스탕의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편씩 전개된다. 전에 읽었을 때는 플로라 트리스탕의 이야기가 별로 와 닿지 않았는데 두 번째 읽어보니 정말 당차고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18세기에 여성주의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너, 넌 등 2인칭 주어를 사용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문체는 여전히 신선하다. 2010년 노벨문학상 타이틀이 괜한 것이 아니구나.
'만리타향 페루를 가보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었다면, 넌 지금의 네가 될 수 없었을 거야. 안달루시아 아가씨, 지금의 네 모습이 어떤데? 자유로운 여자. 맞아. 하지만 모든 점에서 실패한 혁명가이기도 하지.'
- 플로라 트리스탕 |
'너는 이 그림을 손으로 그린 것도, 머리로 그린 것도 아냐. 상상이 지어낸 산물이었다. 옛날 버릇이 다시 나왔던 것이다.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그 은밀한 욕망, 격렬하게 튀어나온 그 감정, 사납게 달아오른 그 본능, 괜찮은 그림을 그린다 싶으면 여지없이 끼어드는 그 충동에 따라 그린 그림이었다. 코케, 이런 그림은 절대 죽지 않아.'
- 폴 고갱 |
고갱은 처음부터 화가로 출발하지 않았다. 후견인의 소개로 증권 거래소의 중개인이 되어, 돈 잘 버는 부르주아의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 좋은 쉐프(고갱의 동료)를 만나, 그림이란 걸 배우게 된다. 28살의 나이었다. 35살에 직장을 떼려 치고, 화가로 전념하게 된다. 유럽은 병들었다면서, 때 묻지 않은 원시성을 찾기 위해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가게 된다.
소설이 점점 끝으로 흘러갈수록 플로라 트리스탕과 폴 고갱의 삶도 죽음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이에 앞서 생을 마감한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폴 고갱의 입장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증권사에서 일하며 취미로 그림을 시작한 폴 고갱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빈센트 반 고흐였다. 둘 다 아마추어로 그림을 시작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둘은 같이 살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둘 다 살아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다. 인물사진 촬영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하고 있을 때, 도슨트를 해주는 분이 관람객에게 해주는 말을 우연찮게 들었다.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매주마다 많은 전시가 열리지만, 유명한 작가에만, 유명한 전시에만, 사람들이 모여들고 관심을 갖는다. 예전에는 예술가가 죽음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지금 이 시대에서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의 죽음은 그냥 잊힐 뿐이다. 폴 고갱이 사후에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면...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했더라면... 그들의 존재는 잊혔을 것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의 인상 깊은 문장들...
"내 최고의 걸작들은 여자를 딱 끊고 지낼 때 그려진 걸세. 내 정액으로 그린 그림이란 말이야. 난 성욕을 품고 여자들을 파고드는 대신 그림을 파고들었단 말이야."
"헛소리 마, 빈센트, 난 말이야, 그림을 파든 여자를 파든 힘이 넘친단 말이야."
- 380p, 빈센트 반 고흐와 코케(폴 고갱)의 대화 中 |
폴, 네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너 역시 천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줄까? 네 그림도 그 미친 네덜란드 놈의 그림처럼 비싼 값에 팔리기 시작할까? 그럴 리는 없을 테지. 하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아. 인정받는다거니, 유명해진다거니, 불멸의 예술가가 된다거니 하는 것에는 넌 도통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럴 리는 없을 거야. 아투오나는 파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야. 예술계의 명성이나 유행이 온통 파리에서 결정되는 판에 그 방정맞은 파리 놈들이 네 작업에 관심이나 가지겠어?
- 395~6p |
1880년, 다섯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넌 여덟 점의 그림을 출품했어.
그해에 에두아르 마네는 처음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그림을 호평했어.
"나는 휴일 밤낮을 이용해 예술을 공부하는 일개 아마추어일 뿐입니다."
넌 누벨 아테네에서 그렇게 말했어.
"그렇지 않아요."
마네는 힘주어 말했어.
"아마추어는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넌 송구스러웠지만 행복하기도 했지.
- 445p |
폴 고갱은 방탕한 성생활로 얻은 질병으로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천국을 꿈꾸고 그리면서 삶을 마감한다. 그가 다시 되살아나 21세기를 살아간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까? 여전히 타이티섬에 머물러 화가로서 살아갈까?
마리요 바르가스 요사는 <천국은 다른 곳에>를 통해 자신만의 천국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지만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 일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비두리, 너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연작 작업 열심히 해."
비두리(박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