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시대의 미술과 몸; 앵그르의 누드 회화 속의 여성의 몸
프랑스의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는 지난 칼럼에서 이야기했던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외에도 오귀스트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라는 걸출한 화가가 있다. 앵그르는 다비드의 제자였으며, 다비드보다도 고전 스타일 구현에 더욱 충실한 화가였다. 다비드가 고전적 소재를 통해 도덕 및 정치적 규범을 내세워 교훈적인 장치로서 회화를 그렸다면, 앵그르는 고대에서 미적인 이상을 찾았으며 시각적 쾌를 위한 회화를 추구하였다. 다비드 회화 속의 인체가 논리적이고 해부학적으로 표현되었다면, 앵그르의 회화 속 인체는 선의 흐름을 위한 재료로 사용된다. 앵그르는 특히 인체를 표현할 때, 움직이지 않고 정지되어있는 자세를 즐겨 그렸고, 앵그르의 회화 속 인물들은 다비드의 회화 속 인물들이 서사적 배경을 기반으로 한 것과는 달리 서사가 최소화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다비드는 감상자가 그의 회화 속의 인물과 윤리적인 것을 동일시하도록 유도하였으나, 앵그르에게 있어서 감상자는 그의 작품 속에 감상자 자신을 이입하도록 하는 것 아니라 철저히 관음적으로 감상하는 입장에 머물게 한다. 이러한 감상자의 입장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앵그르의 초기 대표작인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을 꼽을 수 있다(그림 1).
그림 1.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ean-Auguste-Dominique_Ingres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에서 화면의 중앙에 놓인 여인의 몸은 얼핏 보면 사실적인 몸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면 해부학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는데, 가장 어색해 보이는 부분은 여인의 어깨이다. 어깨의 관절들은 해부학적이고 선명한 돌출구조를 하고 있지 않고, 그녀의 팔은 몸체에 느슨하게 붙어 있는 느낌이다. 어깨에서 내려와 그녀의 골반을 보면 골반은 실제 있어야 할 위치보다 뒤쪽으로 밀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허벅지는 상체에 비해 짧아 보이며, 한쪽 다리의 무릎관절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몸의 무게를 지탱해야 할 발목과 발바닥에 체중이나 긴장이 실려 있지도 않으며, 그녀의 피부는 아주 매끈해 보이지만 근육의 수축이나 이완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에서 여성의 몸은 해부학적으로 불완전하면서도 기능적으로도 온전치 못하다. 그렇기에 여성의 몸은 감상자의 시선을 위해서 배치된 상체 중심의 조형물로 보인다. 이 작품은 고전주의적 외관을 따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감상자에게 보여지는 형식으로써 몸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세적 몸의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2.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ean-Auguste-Dominique_Ingres
1814년 완성된 <그랑드 오달리스크>에서 여인의 몸은 감상자의 시선을 더욱 의식한 몸으로 거듭나게 된다. ‘오달리스크(odalisque)’는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 속한 여성을 의미하지만, 18-19세기 서구 남성들이 떠올리는 오달리스크는 실제 오스만 여성이 아닌 상상 속의 동양 여성이었다. 앵그르는 이러한 서구적 상상에 기반하여 오달리스크를 묘사하였다. 화면 속에서 낯선 이국의 여인은 옷을 벗고 비스듬히 관능적으로 누워있지만, 그녀는 낯선 이국의 여인이기에 감상자들의 윤리적 또는 사회적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무엇보다도 비판을 받았던 점은 왜곡된 오달리스크 몸이었다. 오달리스크의 머리는 그녀의 몸에 비해 매우 작고, 그녀의 척추는 해부학적으로 과도하게 길게 표현되었으며, 허리는 비정상적으로 잘록하다. 또한, 골반과 어깨의 뒤틀어짐은 그 각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각도이며,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의 여인처럼 오달리스크의 다리는 상체에 비해서 짧고 그 기능이 약화 되어있다. 이렇게 여성의 몸을 왜곡시켜 표현한 까닭은 앵그르가 인체를 정확하게 그릴 수 없어서가 아니라 몸의 곡선을 매끄럽게 만들어 여성 몸의 관능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그랑드 오달리스크>에서 여성의 신체는 의학적이거나 윤리적인 몸이 아니라 감상자의 시선을 위한 응시의 대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그림 3. 앵그르, <오달리스크와 노예>, 1842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ean-Auguste-Dominique_Ingres
1942년 완성된 작품인 <오달리스크와 노예>를 보면, 화면 하단에 옷을 벗은 채 누워있는 오달리스크룰 중심으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악사인 노예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노예가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나 <그랑드 오달리스크>와 차별화되는 점은 여성의 몸이 공간에 혼자 놓여 있지 않고 다른 여인들의 어긋나는 시선과 악사가 연주하는 들리지는 않지만 상상 가능한 소리 속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오달리스크가 주체성을 갖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달리스크와 그녀의 노예들은 서로를 보지 않고 외부의 시선, 즉 감상자의 시선을 의식한 채, 감상자를 정면으로 보는 것은 피하는 수동적인 자세를 하고 있다. <그랑드 오달리스크>가 화면 안에 고립된 누드라면, 이 작품에서는 여성의 몸이 노예, 음악, 장식 등의 늘어난 화면의 보조 장치들을 통해서 하나의 구조화된 장면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림 4. 앵그르, <터키 목욕탕>, 1862-3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ean-Auguste-Dominique_Ingres
앵그르의 말년에 완성된 <터키 목욕탕>은 여성의 몸을 개별적 인물로 재현하지 않고 반복 되는 시각적 패턴으로 구성하면서 여성 몸의 관능미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수십 명의 여성의 몸, 즉 반복적으로 겹쳐지는 여성의 가슴, 허리, 등, 팔, 다리 등은 원형의 화면 속에서 시작과 끝이 없이 끝없이 순환하는 구조 속에 갇혀 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감상자의 입장에서 어느 한 여성의 몸에 시선이 정착하지 못하게 하고 계속해서 시선을 배회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터키 목욕탕>에서는 중심이 되는 인물이나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상자는 이 화면 속에서 인물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읽지 못하고, 보는 행위 자체에 갇히게 되며, 철저히 관음적으로 감상하게 된다. 화면 안에 남성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화면 밖 남성들의 시선은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그러므로 이 화면 안의 공간은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남성들을 위한 밀폐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앵그르의 누드 회화들은 고전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전주의 신체 개념이 점진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다비드의 회화에서 인체가 윤리적 판단과 행위를 수행하는 주체였다면, 앵그르의 회화에서 인체는 순차적으로 행위의 주체성을 상실한 채 감상자의 시선을 위한 대상으로 전환된다.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에서 시작된 해부학적 균열은 <그랑드 오달리스크>에서 의도적인 신체 왜곡으로 심화되고, <오달리스크와 노예>를 거쳐 <터키 목욕탕>에 이르러서는 개별적 신체가 더 이상 묘사되지 않고 수십 개의 신체들이 반복적 패턴으로 구현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앵그르는 고전적 형식을 유지한 채 회화가 인체를 사실적이거나 해부학적으로 재현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어떻게 보이는가’의 문제로 진입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므로 앵그르의 누드는 신고전주의의 완성이라기보다, 근대 회화에서 신체가 시각적 대상으로 재편되는 전환점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칼럼에서도 근세시대의 몸과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번 칼럼의 일부 정보는 ‘캐롤 스트릭랜드의 <<클릭, 서양미술사>>를 참고하였다.
몸과 미술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