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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리기 위한 가장 긴박했던 20일 | ARTLECTURE

진실을 알리기 위한 가장 긴박했던 20일

-<마리우폴에서의 20일> (20 Days in Mariupol, 2023)-

/Art & Preview/

진실을 알리기 위한 가장 긴박했던 20일
-<마리우폴에서의 20일> (20 Days in Mariupol,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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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은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포위된 우크라이나 도시 마리우폴에 유일하게 남아, 은폐될 뻔한 진실을 기록한 AP 취재팀의 긴박했던 20일을 담은 프론트라인 다큐멘터리로,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초의 오스카 수상을 비롯하여 전 세계 33관왕 & 47개 부문 노미네이트라는 대위업을 달성했다.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제7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올랐던 <마리우폴에서의 20>은 유일한 다큐멘터리 작품으로서, <추락의 해부>, <존 오브 인터레스트>, <패스트 라이브즈>와 경쟁하며 일찌감치 올해 절대로놓쳐선 안 될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영상 기자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사진기자 에우게니이 말로레카, 영상 프로듀서 바실리사 스테파넨코를 포함한, AP 통신 취재팀은2022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포위된 도시 마리우폴을 떠나지 않고 유일하게 잔류했다. ‘마리우폴은 가장 참혹한 전투의 최전선 점령지인 만큼 러시아의무자비한 공습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AP 통신 기자들은 언제 공격당해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 통신 취재팀은 한순간에 평화가 증발했고 분노와 슬픔만남은 마리우폴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의 소명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잃지 않은 AP 통신취재팀은 무차별 폭격이 이어지는 순간에도 절대로 카메라를 놓지 않고, 하루아침에 일상을 잃은 마리우폴시민들의 울분과 고통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주요 인프라 시설이 파괴된 나머지, AP 통신기자들은 본인들이 기록한 영상 및 사진 자료를 외부에 전달하지 못하고 러시아군에 전부 빼앗길 위기에 빠진다.





다행히도 우크라이나 특별 기동대의 도움을 받은 AP 통신 기자들은 점령지에서 100km를 달려서 러시아 검문소 15개를 통과했고, 결국 탐폰’, ‘자동차좌석 아래등에 숨긴 각종 하드 드라이브 및 파일들을 반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의 전쟁범죄 은폐를 가로막은 AP 통신 기자들은 가짜 뉴스를반박했으며, 인도주의적 지원 경로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3 퓰리처상공공보도상을 받았다.


AP 통신 취재팀의목숨 건 취재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은 영원히 감춰졌을 뻔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쟁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알려면 마음 아파도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TheHollywood Reporter), “잔인한 시간과 현장을 기록한 압도적인 다큐멘터리”(TimeOut),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긴박하고 등골이 오싹해진다”(TheWrap) 등 세계유수 매체들의 리뷰는 누구나 언제든 겪을 수 있는 비극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현재 진행형인 우크라이나전쟁에 절대 외면하면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한다.


 

감독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의 성명문


러시아가 우리를 사냥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이 포함된 명단을가지고 있었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도시 마리우폴에 남은 유일한 국제 기자들이었고, 2주가 넘도록 러시아군의 포위 공격을 취재하고 있었다. 병원 내부를 취재하고 있던 차에, 총을 든 사람들이 복도를 돌아다니기시작했다. 이에 의사들은 우리가 위장할 수 있도록 흰 수술복을 나눠주었다.

 

그러다 새벽녘에 갑자기 수십 명의 군인들이 들이닥쳐서는 망할, 기자들은 어디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파란색 완장을 찬 것을 보고, 그들이위장한 러시아군일 확률을 계산해 보다가 신분을 밝히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당신을 탈출시키러 왔다라고 말했다. 밖에서 날아오는 포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수술실 벽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안에 있는 게 더 안전해 보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우리를 데려오라는명령을 받고 온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 주던 의사들,포격을 당한 임산부들, 갈 곳이 없어 복도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을 버리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을 모두 남겨두고 떠나려니 참담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9, 아니 10,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는 시간 동안 폭격으로 무너진 아파트건물 사이를 이동했다. 하지만 포탄이 근처에 떨어지면서 우리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포탄 한 발 한 발 사이의 시간을 재면서, 긴장하며 숨을 참았다. 연이은 충격파가 가슴을 뒤흔들었고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어느 입구에 도착했고, 곧 장갑차가 우리를 어두운 지하실로 데려갔다.그제야 한 경찰관으로부터 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를 병원에서 구출했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당신들이 잡히면 러시아는 당신들이 이제껏 촬영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게 만들면서 그 광경을 촬영할 것이라면서, 당신들이 마리우폴에서 한 모든노력이 헛된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죽어가는도시를 전 세계에 보여 주라고 애원했던 이 경찰은 이제 우리에게 가자고 간청했다. 그러고는 우리를 마리우폴을떠날 준비를 하는 수천 대의 낡은 차량들 쪽으로 안내했다.

 

3 15일이었다. 우리는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러시아 국경으로부터불과 20마일 떨어진 우크라이나의 도시 하르키우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나는, 정규 교육 과정에서 총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당시엔 아무 의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는 우호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전쟁을 취재하며 참혹한 상황을 전 세계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정작 올겨울 키이우에서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대사관 직원들을 대피시켰을 때도, 그리고 고향 바로 건너편에 증강된 러시아 군대가자리 잡았다는 지도를 보았을 때도 안타까운 내 조국이라는생각이나 할 뿐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러시아군은내가 20대까지 누비며 놀았던 하르키우의 넓은 자유 광장을 폭격했다.

 

나는 러시아군이 아조우해에 위치한 동부의 항구 도시인 마리우폴을 전략적 요충지로 여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2 23일 저녁, 오랜 동료이자 AP 통신의 우크라이나인 사진작가 에우게니이 말로레카와함께 흰 폭스바겐 밴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가는 도중에 여분의 타이어가 필요하겠다 생각했고, 마침 한밤중이지만 타이어를 팔겠다는 한 남자를 온라인에서 발견했다. 우리는그에게, 그리고 밤새 일하고 있는 식료품점의 계산원에게 전쟁을 준비하러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미쳤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새벽 3 30분에 마리우폴에 도착했고,전쟁은 한 시간 후에 시작되었다. 43만 명의 마리우폴 주민 중 약 4분의 1이 전쟁 첫날, 아직도시를 떠날 수 있던 그때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러시아군은하나씩 폭탄을 터뜨리며 전기, 수도, 식량 공급을 끊었고, 결정적으로 휴대전화, 라디오, 텔레비전송신탑까지 차단했다. 도시에 있던 몇 안 되는 기자들은 마지막 연결이 끊기고 완전한 봉쇄가 시작되기전에 빠져나갔다.

 

봉쇄로 인한 정보의 부재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다. 첫 번째는 혼란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공황 상태에 빠진다. 처음에는 마리우폴이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나는 그것이 소통의 부재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두 번째는 면죄다. 도시로부터철거된 건물과 죽어가는 아이들의 사진을 포함한 아무 자료도 나오지 않는 상황 속, 러시아군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아무 보도도 없었을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가 본 것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고, 러시아는 우리를 뒤쫓을 만큼 분노한 것이다. 나는 살면서 침묵을깨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죽음은 빠르게 다가왔다. 2 27, 우리는 파편에 맞은 소녀를 구하려는 의사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소녀는결국 죽었다. 이어 두 번째 아이, 세 번째 아이가 죽었다. 사람들은 통신 신호가 잡히지 않아 구급차를 부를 수 없어졌고, 구급차는폭탄이 터진 거리를 헤쳐 나갈 수 없어 부상자의 구급차 수송이 중단됐다. 의사들은 우리에게 사망자와부상자를 데려오는 가족들을 촬영해달라고 부탁했고, 점점 줄어가는 발전기의 전력을 카메라 충전에 사용할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은 우리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했다. 곧 포격이 병원과 주변 주택을 강타했다. 우리 밴의 창문이 깨지고, 측면에 구멍이 뚫리고,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불타는 집을 촬영하러 나갔다가 폭발음 속에 다시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부디벨니키우 거리의 약탈당한 식료품점 바깥에 안정적으로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이에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그곳으로 가, 계단 아래에 쭈그리고앉아 사진과 동영상을 전 세계에 업로드했다. 우리를 보호하기엔 충분하지 못한 계단이었지만, 야외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3 3일이 되자 신호가 사라졌다. 우리는 병원 7층 창문으로 영상을 전송하고자 했다. 그곳에서 견고한 중산층 도시였던마리우폴의 마지막 조각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포트 시티의 슈퍼마켓이 약탈당하고 있었고, 우리는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뚫고 그쪽으로 향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전자제품, 음식, 옷이 가득 담긴 쇼핑 카트를 밀며 달리고있었다. 그러다 가게 지붕에서 포탄이 터지고, 나는 바닥으로넘어졌다. 그렇게 긴장한 채로 두 번째 공격을 기다리면서, 카메라가켜두지 않은 스스로를 수백 번 저주했다. 그때 또 다른 포탄이 끔찍한 굉음과 함께 옆 아파트 건물을강타했다. 나는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며 숨었다.

 

10대 청소년이 전자제품 상자를 가득 실은 사무용 의자를 굴리며지나갔고, 상자들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소년은 제 친구들이 거기 있었는데, 포탄이 우리로부터 10미터 옆에 떨어졌어요. 친구들이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20분 만에 부상자들이 속속들이 들어왔고, 그중 일부는 쇼핑카트에실려 왔다. 며칠간 우리가 외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위성 전화뿐이었다. 그리고 그 전화가 작동하는 유일한 장소는 포탄이 떨어진 곳 바로 옆의 야외 지점이었다. 나는 앉아서 몸을 웅크리고 신호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모두들 전쟁이언제 끝날지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매일우크라이나 군대가 러시아의 포위망을 돌파하러 올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 무렵 나는 병원에서 죽음을, 거리에서 시체를, 그리고 수십 구의 시체를 집단 무덤에 밀어 넣는 모습을 목격했다. 너무많은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 처참함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은 채로 촬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3 9, 두 차례의공습으로 밴의 창문에 테이프로 붙여둔 비닐이 찢어졌다. 폭격을 목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귀 안쪽과피부, 얼굴에 통증이 밀려왔다. 우리는 산부인과 병원에서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구급대원들은 피투성이가 된 임산부들을 폐허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배터리는 거의 방전되었고, 기록을 전송할 통신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통금 시간이 몇 분 남지않았을 때, 한 경찰관이 우리끼리 병원 폭파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이야기하던 것을 우연히 엿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쟁의 흐름을 바꿀 겁니다라며, 그는 우리를 전원과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곳으로 데려다줬다. 우리는 수많은 사망자와 죽은 아이들의 모습을 끝없이 찍고 있었다. 나는왜 그가 여기서 더 많은 사람이 죽는 게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자료가 빠르게 전송될 수있도록 영상을 세 부분으로 나눈 뒤, 휴대폰 세 대를 이용해 자료를 전송했다. 몇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통금 시간을 훨씬 넘겼다. 포격이 계속되었지만, 우리를 호위하기 위해 배치된 경찰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마리우폴 바깥세상과의 연결이 다시 끊겼다. 우리는 죽은 금붕어가 가득한 수족관이 있는 텅 빈 호텔의지하실로 돌아갔다. 고립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러시아가우리의 보도를 폄하하기 위해 가짜 뉴스 선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런던 주재 러시아대사관은 AP 통신의 사진이 가짜이며, 임산부가 배우라고주장하는 트윗을 두 차례나 올렸다. 러시아 대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산부인과 병원 공격에대한 거짓말을 반복했다. 그 사이, 마리우폴에서는 전쟁에대한 최근 소식을 묻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도시 바깥의 가족들이 자신이 살아있다는것을 알 수 있도록 자기 모습을 찍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마리우폴에는 우크라이나 라디오 방송이나 TV 신호가 전혀잡히지 않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마리우폴을 인질 삼아 건물에 포격을 하고, 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러시아의 왜곡된 거짓말을 방송하는 라디오만이 유일하게 잡히고 있었다. 이 선전의 힘은 정말 강력해서, 우리가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 중일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방송을 믿고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는소련 방식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마리우폴은 포위되었다. 무기를 내려놓아라.” 3 11, 자세한 내용도 없었던 짧은 통화에서 편집자는 산부인과 병원 공습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을 찾고 그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산부인과를 찍었던 그 영상이 러시아 정부의반응을 불러일으켰을 만큼 강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최전방에 있는 병원으로 가 생존자들을 발견했다. 일부는 아기를 안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분만 중이었다. 어느 여성은 아기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7층으로 올라가 겨우 연결된 느린 인터넷을 통해 영상을 전송했다. 그곳에서전쟁을 뜻하는 러시아의 표식인 Z가 새겨진 탱크가 병원 건물 옆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포위되었다. 수십 명의 의사, 수백 명의 환자와 함께.

 

병원을 지키던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식량과 물, 장비가 실린 우리의 밴으로 가는 길은 병원 바깥에 있던 의료진을 쏘아버린 러시아 저격수에 의해 막혀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이 흘렀고, 어느 군인들이우크라이나어를 외치며 우리를 데리러 왔다. 그러나 구조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한 위험에서 다른 위험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을 뿐. 이때까지마리우폴의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고, 안도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언제든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군인들에게 몹시 감사하면서도, 무감각했다. 그리고 떠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세 가족과 함께 현대차에 몸을 싣고, 5km에 달하는 교통체증을 뚫고 도시를 빠져나왔다. 그날 마리우폴을 빠져나간 사람은 약3만 명이었는데, 러시아 군인들이 비닐 조각으로 창문을 덮은 차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겨를이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사람들은 긴장했다. 서로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매 순간 비행기가 지나가거나 공습이 있었다. 땅이 흔들렸다. 우리는 15개의러시아 검문소를 통과했다. 그때마다 우리 차 앞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우리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격렬하게 기도했다.

 

세 번째, 열 번째, 열다섯번째. 중화기를 든 군인들로 가득 찬 검문소들을 통과할수록 마리우폴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은 점점사라져갔다. 우크라이나 군대가 마리우폴에 다다르려면 너무 많은 것들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의 진격을 막기 위해 파괴했던 다리에 도착했다. 20대의 적십자 호송 차량이 그곳에 갇혀 있었다. 우리는 도로를 벗어나들판과 뒷길로 향했다. 15번 검문소의 경비병들은 코카서스 지방의 거친 억양의 러시아어를 구사했다. 그들은 도로변에 위치한 무기와 장비를 감추기 위해 호송대 전체에 헤드라이트를 내리라고 명령했다. 차량에 칠해진 흰색 Z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검문소에 차를 세웠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목소리. 압도적인 안도감을 느꼈다. 차 앞좌석에 앉은 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빠져나왔다.

 

우리는 마리우폴의 마지막 언론인이었다. 이제 그곳엔 아무도 없다. 우리에게 촬영되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메시지가 빗발친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낯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치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처럼 절박하고 친밀하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주 말, 수백 명이 대피해 있던 극장이 러시아의 공습으로 무너졌을 때, 나는생존자들에 대해 알아보려면, 잔햇더미 아래에 몇 시간 동안 갇혀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려면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건물과 그 주변의 파괴된 집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아래에 갇힌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요일,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가 약 400명이 대피해 있던 마리우폴의예술학교를 폭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곳에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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