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장편 데뷔작 <그로운업스>(2008)가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된 바 있는 안나 노비옹 감독은 <마거리트의 정리>(2023)로 제76회 칸 영화제 스페셜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되며 다시 한번 칸의 선택을 받았다.<마거리트의 정리>는 끊임없는 논증과 반증을 거쳐 객관적인 논리로만 자신의 삶과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주인공 마거리트(엘라 룸프)의 실패 이후의 회복과 성장을 그려낸다. 명문 파리 고등사범 학교에서 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마거리트는 가장 인정을 받고 있는 천재이자, 베르네르(장 피에르 다루생) 교수의 지도를 받는 동급생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유년 시절 우연히 접한 ‘골드바흐의 피라미드’의 무한성에 매료되었던 일을 계기로 세계 3대 수학 난제 중 하나로 꼽히는 ‘골드바흐의 추측’에 관한 연구에 매진하던 마거리트는 드디어 자신의 연구를 증명하는 세미나에 서게 된다. 하지만 베르네르 교수의 또 다른 제자 루카(줄리앙 프리종)가 마거리트의 증명 과정에서 굉장히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하고, 한순간에 지금까지 준비했던 게 모두 부정당했다고 느껴 형언할 수 없는 실의에 빠진 마거리트는 자퇴서 제출과 함께 수학 공식 바깥의 세상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마거리트의 정리>의 초반부는 마거리트가 수학을 대하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열의를 보이지만, 그 외 일상에는 무심한 존재가되었는지 추적한다. 초반부 장면들을 세부적으로 파헤쳐 보면 대단히 중요한 세미나를 앞둔 마거리트는 완벽한 증명과 발표를 위해 교차 확인을 받고자 베르네르 교수가 수업하고 있는 강의실로 향한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마거리트는 베르네르 교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결하게 답변한다. 얼핏 보면 해당 장면은 마거리트의 천재성을 보여주기 위한 보편적이면서 간결한 연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장면의 본질은 강의실에 있는 남성들의 시선이 유일한 여성인 마거리트에게만 집중된다는 점을 통해, 그녀가 남성 중심 환경 속에서 겪는 일상적인압박감을 함축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휴식을 취하며 편히 식사를 해야 하는 공간에서도 남성 동급생들의 부담스러운 관심에 실시간으로 노출되는 마거리트의 모습은 타의적으로 부여된 ‘예외적 존재’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성별이 계속 상기되는 사회에서 항시 자기 능력을 증명해야 하고, 그런 부담이 그녀가 수학 이외 일상에 벽을 쌓게 했음을 명백히 이야기한다. 특히‘유일하다’ 및 ‘예외적이다’라는 정체성은 실패하면 재기할 기회조차 받을 수 없는 차별과 직결되며, 그렇기에 마거리트는 불완전성을 견딜 수 없는 상시적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세미나 사건 이후 다른 지도 교수를 연결해 주겠다는 베르네르 교수와의 대화 장면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우발적인 선택이긴 하나 마거리트는 오랜 시간 우울감 속에 빠진 대신, 신발가게에 취업하고, 새로운 친구 노아(소니아 보니)와 동거를 시작하며, 클럽에서 만난 남자와 생애 처음으로 육체적 관계를 맺는 등 새로운 일상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고 노력한다. 마거리트는 수학이 아닌 것들과 연관 있는 변수를 대처하는 게 미숙해 여러 차례 실수를 저지른다. 그렇지만 마거리트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정면 돌파를 한다. 바로 본인에게 매일 압박감을 줬던 남성들의 세계에 다시 입성하는 것이다. 노아의 밀린 월세를 대신 메꾸고자 마거리트는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마작판에 뛰어든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남성들의 괄시와 조롱이 섞인 언어에 둘러싸였음에도 마거리트는 이전과 다르게 회피 대신에 직시의 방법을 택하며 그들이 침묵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마거리트는 ‘A’라는 문제 혹은 세계를 이해하려면 ‘A’의 내부만 깊숙이 파고드는게 아닌, 무관할지언정 외부에 퍼져 있는 다양한 요소와 현상을 지나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으며 자신의 우주를 확장할 발판을 스스로 마련한다.

결정적으로 마거리트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끄집어낸 라이벌 루카와의 로맨스를 경유해 성장을 도모한다. ‘골드바흐의 추측’을 다시 증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마거리트는 루카에게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하고, 타인을 경계하기보다 소통하는 일을 좋아하는 루카는 이에 응한다. 또다시 수학에만 매몰되기도 하지만 마거리트는 진심으로 눈을 맞추는 루카의 태도와 열린 자세에 자기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반성할 뿐만 아니라, 증명을 진행하고 멈추는 일을 반복하면서 루카의 반증에 경청하기 시작한 그녀는 이성적 사고에 의존하지 않으며 한계를 돌파하는 발상을 하는 자기 발전을 꾀한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마거리트와 루카 사이에는 로맨스 기류가 형성된다. 허나 <마거리트의정리>의 로맨스는 절대 도식적으로 소비되지 않으며, 보편적 성장 드라마처럼 고난을 명쾌히 극복하고 자아 확장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루카와의 로맨스는 두 번째 실패를 겪은 마거리트가 언젠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먼발치서 자리를 지키는 등대의 빛 같은 역할을 한다. 이는 마거리트가 분을 못 이겨 루카에게 모진 말을 했어도, 루카는 언제든 마거리트를 환영해 줄 수 있는 태도에서 헤아릴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증명 과정으로 빼곡했던 검은 벽 앞에 좌절한 마거리트가 바깥세상으로 나가기까지의 시간을 지그시 포착하는 연출과도 유관할 테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 앞에서 증명을 마친 마거리트에게 도달한 따뜻한 햇살은 마치 그녀의 우주가 팽창하는 순간을 축하해주는 것 같아 신비롭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마거리트가 지금까지 본인을 기다려 준 루카에게 달려가는 장면은 자기만의 폐쇄적인 우주에 깊숙이 고립되었으나, 비로소 타인의 빛과 믿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반응하는 그녀의 용기 있는 변화를 그려낸다. 그렇기에 <마거리트의 정리>는 기존 성장 드라마와 달리 낭만까지 머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