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들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
문선희 작가의 십여 년 여정은 이런 글로 시작합니다.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를 느끼고, 그들에게 다가서고, 이해해 보려 한 작가의 발걸음은 『이름보다 오래된』이라는 책 제목처럼 오래되어 어렴풋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름보다 오래된』은 오래간만에 무척 마음에 드는 사진집이었습니다. 책을
보고 나니, 작년에 열린 전시를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지만 전시장에서는 글과 사진을 함께 음미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니,
책으로 만난 것이 더 좋은 듯도 합니다. 곱씹어 쓴 글은 정갈하고, 마음을 기울여 만든 사진은 잔잔한 울림을 줍니다. 글과 사진을 통해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고라니들을 만났고, 어찌하여 이런 초상사진을 찍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름보다 오래된』 표지
작가가 고라니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는 길 위에서 우연히 스쳐 간 한 마리의
동물이었습니다. 노루? 아니면 고라니?라는 호기심은 그들의 생태에 관한 조사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궁금증이 점점 커지는 눈덩이처럼 굴러가며, 십
년이 걸린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그 십 년은 전국의 보호소를 찾아다니며 “온 마음을 다해 작업 취지를 설명하고, 사람을 설득해야 했던 시간"과
그곳에서 만난 “고라니들과 교감을 쌓아 올린 시간"이었습니다. 그 세월 안에는 단순한 두 자리 숫자에 다 담을 수 없는 땀과 노력이 배어
있습니다.
그녀가 마주한 고라니의 현실은 모순적입니다. 한쪽에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어 사냥당하는 고라니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고, 인간의 침범 때문에 서식지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 근처까지 다가와 농작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며 포획했습니다. 한반도와 중국의 극히 일부 지역에만
서식하는 고라니는 우리 고유종인데, 뒤늦게 들어 온 사람의 필요에 따라 운명이 바뀌게 된 겁니다.
초상을 찍는다는 것 ©문선희
반대쪽에는 덫에 걸려 다쳤거나, 부모를 잃거나 한 이런저런 사정으로 보호소에
들어온 고라니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임시로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며 야생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라니는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인간 덕분에 목숨을 연장했습니다.
초록과 빨강 ©문선희
한가지 아이러니 한 건 포획당한 고라니 숫자와 농민들이 입은 피해 금액의
상관관계입니다. 문선희 작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포획된 고라니 개체 수가 두 배 가까이 느는 동안, 유해야생동물 때문에 입은 피해 금액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냥꾼들이 받아 간 포상금(죽은 고라니 꼬리를 들고 가서 사냥 사실을 증명하면, 마리 당 몇만 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은 외려 농작물 피해 금액을 넘어서기에 이르렀죠.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라니 03 ©문선희
동그란 초상사진 속 새끼 고라니는 웃고 있고, 슬퍼하고, 겁을 내고,
지쳐 있고, 궁금해하며, 때론 우수에 차 있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어린 생명체들의 초상을 마치 ‘유치원 졸업앨범’처럼 보이도록 꾸미면서, 목에
걸린 인식표를 따라 이름 붙인 그것들 한 마리, 한 마리를 떠올렸습니다. 여름과 겨울의 털갈이 사정에 따라 동그랗게도, 뾰족하게도 느껴지는 어른
고라니는 새끼보다 조금 더 뚜렷한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개개의 얼굴을 몽환적인 회색 안개로 둘러싸면서 “고라니들의 얼굴에 오롯이 새겨진
고유성"을 담았습니다.
어른 고라니 ©문선희
서른이 되면서 사진과 글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문선희 작가는 전염병으로
생매장당한 동물의 살처분 매몰지를 기록한 <묻다>, 5.18을 겪은 어린아이들의 기억을 탐구한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고공농성 현장을 찾아가 담은 <거기서 뭐 하세요> 같은 작업을 해 왔습니다. 작업의 결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혹은 아예 인지하지도 못한 작은(물론 실제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지만, 무시당하고 잊힌) 사건과 사물에 주목할 줄 아는 감성의 소유자입니다.
작은 생명체 한 마리로부터 출발한 여정을 십 년간 이어올 수 있던 힘도 작가의 이러한 마음일 겁니다.
라니115 ©문선희
참조. ● 문선희 작가 홈페이지: https://sunnybymoon.modoo.at/?link=15k3fii5 ● Yes24 책 구매 링크: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0511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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