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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찰나를 견디며 변화하는 것 | ARTLECTURE

첫사랑, 찰나를 견디며 변화하는 것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첫사랑』-

/Artist's Studio/
by 수인
첫사랑, 찰나를 견디며 변화하는 것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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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첫사랑’은 정말 처음이기에 첫사랑일 수도 있지만, 내가 새로워지기에 첫사랑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시작하지만, 사랑이 끝나고 나서는 더 이상 계절을 그리지 않는다. 사랑 없이는 변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었다. 아직 겨울을 다 떨치지 못한 까닭일까, 낮에는 완연한 봄빛에 마음이 들뜨다가도 아침과 밤에는 차가운 공기에 다시 마음을 여민다. 시간 속에서 생경함을 느낀다.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넘어갈 때 느끼는 익숙함 속 낯섦은 해마다 새롭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 봄의 열기가 느껴진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햇빛 속에 때 이른 여름의 열기가 담겨있다. 아마 오랜 시간 동안 내리쬔 햇볕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겠지, 점차 몸이 달궈지는 것을 느낀다. 적정한 온도를 찾기 위해 밖을 나가 봄길을 걸어본다. 겨울과 봄, 봄과 여름 사이의 시간을 정처 없이 헤매는 하루 속에 문득 소설 『첫사랑』이 떠올랐다.




『첫사랑』은 러시아의 대문호 중 한 명인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의 중편 소설이다. 투르게네프가 『첫사랑』은 “창작이 아니라 나의 과거”라고 말했을 만큼 이 소설은 자전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투르게네프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는데,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라는 당대 최고의 가수를 사랑했다. 하지만 폴린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투르게네프는 평생 그녀와 그녀의 남편과 함께 기묘한 삼각관계를 유지했다. 투르게네프는 자신의 인생과 소설 속 기형적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사랑하면서 변화하는 세 사람을 그린다. 열여섯 살의 소년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스물한 살의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그리고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인 표트르 바실리예비치는 각자 다르게 경험하는 ‘첫사랑’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느끼는 모든 것에는 새롭고 말할 수 없이 감미롭고 여성적인 무언가에 대한 반(半)의식적이고 부끄러운 예감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예감, 이러한 기대는 나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것을 들이마셨고, 그 감정은 피 속까지 스며들어 모든 혈관을 따라 흘렀다······.그리고 그것은 곧 실현될 운명을 띠고 있었다.” (13~14쪽, 『첫사랑』,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민음사, 2003)



블라디미르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사랑을 예감하는 것만으로도 생각에 잠기고 우수에 젖을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이다. 지나이다를 사랑하고 나서부터는 처음 겪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연적을 질투하기도 하고 지나이다의 눈길, 웃음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다. 그런 그가 허무하게 사랑이 끝나고 난 후에는 감정을 절제하고 주어진 상황에 순응할 줄 아는 청년으로 변한다.


지나이다는 아름다운 외모와 변화무쌍한 매력으로 뭇 남성들을 희롱하곤 했지만, 표트르를 사랑하면서 한 남자에게 순종적인 여성으로 바뀐다. 표트르는 자신의 자식에게조차 적정한 거리를 둘만큼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륜이 발각된 후 어느 날, 아마도 지나이다와 관련된 내용일 것으로 추측되는 편지 한 통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급기야는 그 충격으로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 


사랑하면 겉모습도 변한다. 사랑을 알지 못할 때의 지나이다는 커다란 회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활기찬 얼굴의 소녀였다.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지나이다는 사뭇 다르다. 안색은 창백해졌고, 걸음걸이는 얌전해졌다. 몸가짐에는 어딘지 위엄이 깃들었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에게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어머니가 맞춰주신 재킷을 벗고 프록코트를 입으려고 한다. 아내 몰래 지나이다를 만나고 돌아온 표트르의 엄격한 얼굴에는 전에 없던 ‘부드러운 인정과 연민의 정’이 어린다.


사랑은 늘 새롭다. 이미 겪어봤는데도 다시 마주친 사랑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마치 매번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가 생경한 것처럼, 사랑의 감정도 끊임없이 변주한다. 어떤 사랑은 눈물이 되고, 어떤 사랑은 환희가 된다. 어떤 사랑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고, 어떤 사랑은 마주하게 된다. ‘첫사랑’은 정말 처음이기에 첫사랑일 수도 있지만, 내가 새로워지기에 첫사랑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시작하지만, 사랑이 끝나고 나서는 더 이상 계절을 그리지 않는다. 사랑 없이는 변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첫사랑의 환영을 한 가닥 한숨과 어떤 쓸쓸한 감정으로 간신히 더듬으면서, 내가 무엇을 바랐고, 내가 어찌 풍요로운 미래를 기대했겠는가?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 중에서 과연 무엇이 실현되었는가? 그리고 벌써 내 인생에 황혼의 그림자가 밀려오기 시작하는 지금,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봄날 아침의 뇌우에 대한 추억보다 더 신선하고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120~121쪽)



*블라디미르에게 지나이다에 대한 사랑은 찰나의 섬광 같은 것이었다. 

이 강렬함을 한번 경험한 이상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게 사랑일지도 모른다.

픽사베이 https://pixabay.com/images/id-1905603/



어쩌면 첫사랑이자 끝 사랑이었을 지나이다와 아버지의 사랑은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서로에게 다른 사랑은 없을 것이기에 그들은 변화를 멈추고 죽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블라디미르는 ‘봄날 새벽의 뇌우’같던 지난 추억을 생각하며 상념에 젖을 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이미 세상에 없는 지나이다와 아버지, 그리고 아직 세상에 남겨져 있지만 이전처럼 생생하게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기묘한 삼각관계로 시작한 『첫사랑』은 추억을 기리는 한 사람의 허무한 기도로 끝이 난다.


사랑은 변화를 수반하지만, 변화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필요한 조건이 있다. 바로 사랑이라는 순간 속에 잠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렬한 만큼 짧은 그 순간 속에서 느껴지는 각종 상념과 감정을 견디며 온전히 그 속에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지만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블라디미르는 자신에게 찾아온 혼란스러운 감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한 번에 들이닥친 기쁨, 슬픔, 우울, 자조, 질투, 동경 등 갖가지 감정을 바라보고 충분히 받아들였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잡는 사람이 되었다. 지나이다는 공작의 딸이라는 체면을 벗어던지고 사랑에 자신을 던졌다. 그렇게 사랑을 모르는 소녀에서 사랑을 아는 숙녀가 되었다. 표트르는 비록 불륜이기는 했지만, 우연히 찾아온 사랑을 적극적으로 쟁취했다. 그 덕에 무심하게 살아가는 사람에서 감정에 흔들릴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계절의 변화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여겨지는 건, 지난 계절에 충분히 머물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의 혹독함을 온몸으로 견뎠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에서 느낀 고통, 슬픔, 아픔을 오롯이 느꼈기에 새로움과 생명력으로 반짝이는 봄을 맞이하는 게 못내 어색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찰나를 지나며 변화한다. 시간 속에서 변했을 것이고, 또 다른 계절 속에 잠기며 새로움을 맞이할 것이다. 새로움 속에서 익숙해지고, 익숙함 속에서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생을 건너간다. 그렇게 다시 한번 첫사랑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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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인_작품 속에 흩어져 있는 삶의 이야기를 모아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