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적 공간에서 부유하는 형태들
샤갈의 회화는 우리가 아는 구상화와 추상화 그 사이에 있는 듯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취한다. 소, 수탉, 때로는 사람인
이 형태들은 샤갈의 시대인 근대적인 공간이나 때로는 관념적인 공간을 부유하며 초현실적 감각을 눈 앞에 내보인다.
살바도르의 달리나 로버트 들로네, 또는 르네 마그리트 회화의 선과 색을, 그리고 형태를 떠올려 보면, 샤갈의 회화에서 주장하듯 뻗어오는 종교적
인상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회화가 구성된 환경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알아야 할 것이다.
샤갈의 회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려한 색과 형태이다. 샤갈의
형태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소, 사람, 에펠 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상 형태들은 공중에서 부유하거나, 선과
색으로 나누어진 입체주의적 공간에서 본래의 크기와 고전의 원근법을 무시한 채 나열되어 있다. 고전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단순 재현하는 것에서 시작해, 미메시스의 영역으로 이어졌다. 회화는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졌다. 권력가, 세력가, 때로는 왕실과 후원자, 이어
상인들의 주문을 받아 화단의 스타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런데, 모더니티의
시절부터, 선과 색이 회화의 수단과 요소가 아닌 그 주제 자체로 떠올라 해석의 중점이 되기 시작하였다. 권력 또는 생계의 수단 보다 ‘예술’이라는 목적이 가장 우선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부터 우리는 회화를
통해, 정확히는 회화의 선과 색을 통해 화가의 심리를 추측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융이 있지 않은가. 또한
이를 증명하기 위해 화가의 기록을, 그의 사회를, 나아가
그의 심리를 구성한 역사의 흐름을 회화에서 읽어내기-혹은 그 역방향으로도-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샤갈의 생애와 환경이 구축한 심리 상태를
알아보는 것이 그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나의 그림, 나의 인생, 샤갈
샤갈의 생애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환경 중 하나는 그의 유년 시절이다. 샤갈은 1887년 7월
7일 러시아의 작은 마을, 유대교의 하시디즘의 종교적 생활을
하는 비테브스크에서 태어났다. 하시디즘의 역사는 이렇다. 중세
유대 신비 전통인 카발라를 따르던 카발리스트들은 모든 존재가 신의 의지에서 비롯되어 창조되었으므로, 모든
것(물질-비물질 포함)은
신성이라 주장하였다. 하시디즘은 18세기 이후 바알 쉠 토브에
의해 등장하여 영적인 가르침을 전파하였는데, 중세 카발리스트들이 선/악, 성/속, 삶/죽음 등 이원적인 개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바알 쉠 토브는
이러한 이원적 개념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곧 종교적
의무와 두려움보다 기쁨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신과의 연결은 엄격한 규율을 따르는 종교적 행위에
국한하지 않으며, 일상 행위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대인의
결혼을 의미하기도 하는 드베쿳은 바알 셈 토브에게는 인간의 의식과 신이 결합되는 상태를 의미하였으며, 이것이
곧 종교적 목표가 되었다.
이러한 샤갈의 성장배경은 종교적인 성향보다, 의식 구성의 개념적인 영역에서 크게 자리하였으며, 이 후 입체파가 성장한 파리에서 기욤 아폴리네르, 호베르 들로네를
만나며 신 정신, 오르피즘의 선과 색과 결합하여 샤갈의 회화를 내보이게 된다.
나의 예술 뿌리를 키운 곳은 비테브스트 였으나, 나무가 물을 필요로 하듯 나의
예술은 파리를 필요로 했다. La terre qui
avait nourri les racines de mon art était Vitebsk, mais mon art avait besoin de
Paris comme un arbre à besoin d'eau.
마르크 샤갈, 하얀 십자가상 La Crucifixion blanche, 1938, 캔퍼스에 유채, 154.6x140cm, Art Institute of Chicago.
© 2018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샤갈의 <하얀 십자가상>은 1938년비테브스크, 파리, 그리고 전쟁
시기를 거쳐 구축된 그의 예술 세계를 내보이는 작품이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화면 중앙에 위치한 예수의 복장에서 나타난다. 머리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히브리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가시 면류관과 하체의 천 대신 두건과 기도용 숄을 두른 것, 중앙 하단의 메노라
촛대 등과 같다. 여기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이 강조된 배경으로는 샤갈이 자신의 상황을 반영한 의식적 결과로도
판단할 수 있겠다. 한 곳에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했으며, 유대인에
가해진 차별과 짊어진 고통이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의 상황으로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중심으로 주변은
둥근 원형으로 서로 다른 에피소드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는 포그롬으로 인한 황폐화된 샤갈의 환경과 유사하다.
화면의 왼편에는 화염으로 휩싸인 마을과 전쟁의 광란을 상징하는 붉은 색 깃발을 든 군인 그룹이 보인다. 붉은
색 깃발은 증오와 격앙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스탈린 정부와 나치를 바라보는 샤갈의 시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샤갈이 이들을 향한 분노의 표현으로 붉은 색을 사용하였다는
해석 보다, 그들의 상태가 증오로 격앙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대로, 방주를 타고 도망가는 그룹과 전경의 토라 두루마리나 아이를 챙겨 도망가는 그룹은 광기에 학살당하는 장면이 아닌 무사히
도망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해당 그림의 중심 색은 흰색이다. 흰색은
빛과 구원, 순수를 상징하며, 고통을 상징하는 요소들의 배경색인 검정색과
대조되어 사용되었다. 이 것은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뿐만 아니라, 중심
요소인 십자가 형에 처해진 예수와 함께 시간적 요소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이 것은 고통의 시간과 이 후
찾아올 부활 사이의 시간을 의미한다. 샤갈의 당시 상황도 고통의 상황이었으나, 십자가
형이 이루어진 직후, 고통이 거의 끝나가는 시간과 곧 찾아올 부활, 즉
기쁨으로의 시간을 흰색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유사한
주제의 고전 종교화와 달리 샤갈의 회화는 ‘도덕적 교훈’. ‘종교적
목적’으로 해석하기 보다, 그의 종교적인 환경에서의 성장 배경이 회화의
요소 구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거주지를 옮긴 샤갈은 1910년
파리로 떠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페르낭 레제, 호베르 들로네와 교류하였으며, 1914년 다시 고향인 비테브스크에 방문하여 벨라 로젠벨트를 만났으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후 1915년 벨라와 결혼 후 첫째 딸 이다를
가졌으며, 1923년 벨라와 함께 파리에 돌아온다. 이후 1944년 벨라는 감염으로 이해 사망하였으나, 벨라를 통해 느낀 사랑의 감정은
샤갈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2부에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