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가면 두 명의 마하를 볼 수 있다. 두 마하는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한쪽은 옷을 입었고 다른 한쪽은 옷을 벗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옆에 나란히 걸려있어 묘한 기분이 느껴지는데, 덕분에 많은 관람객들이 이 작품들 앞에서 쉽게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옷을 벗은 마하>는 미술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명작 중의 하나이다. 그림에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도 이 그림만큼은 알고 있으니 말이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가 그린 이 작품은 에스파냐의 총리였던 마누엘 고도이의 주문에 의해 그려졌다고 한다. 고야는 화면의 정중앙에 여성 모델의 음모를 그리는 적나라한 구도를 선택했는데, 가톨릭 국가였던 보수적인 스페인에서 이 그림은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려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의뢰한 사람이 당시 스페인의 실세였기 때문이다.
<옷을 벗은 마하>, 1800년경, 캔버스에 유채, 95*190cm
<옷을 입은 마하>, 1805년경, 캔버스에 유채, 95*190cm
명화 속 여인의 나체는 단순한 남성의 욕망적 대상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으로 고야는 당시 스페인 여성들의 성적 주체성을 보여주고, 여성의 성을 대하는 기존의 고리타분한 관점을 기만하고 있다. 관람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과 차가운 색조의 육체로 인해 그녀의 자세는 야릇한 기분을 선사한다. 미술 비평가 로버트 휴즈는 <옷을 벗은 마하>를 이렇게 평했다. "그녀는 도전적이며 분명히 매혹적이다. 그러나 분명히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다. 그녀는 남성들의 환상에 수동적으로 호소하는 사랑스러운 소녀가 아니다 … 그녀는 비록 옷을 벗고 있어도, 멸시당하지 않을 강인하고 거센 진정한 마하다.”라고.
<옷을 벗은 마하>는 작품성뿐만 아니라 풍문으로도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떡밥이다. 당시 유명인이었던 알바 공작부인이 고야의 작업실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내연 관계로 발전하였고, 그림의 모델이 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한 알바의 공작부인을 연모했던 고야가 얼굴은 공작부인의 얼굴로, 몸은 윤락녀의 몸으로 그려 합친 것이라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알바 공작부인>, 1797년경, 캔버스에 유채, 210.2*149.3cm / <알바 공작부인>, 1795년경, 캔버스에 유채, 194*130cm
고야의 작품은 당시 누드화를 배척하는 교황청의 심한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미누엘 고도이 총리의 의뢰로 그려진 작품이고, 총리가 직접 소유했기에 처벌은 면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종합해 봤을 때 고도이가 누드화에 상당히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에게 누드 미술품을 모아 놓은 방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옷을 벗은 마하>를 걸고 그 앞에 도르래로 <옷을 입은 마하>를 설치해 위아래로 움직이며 두 그림을 감상했다고 하니, 줄을 내리면 <옷 입은 마하>가, 줄을 올리면 <옷 벗은 마하>가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1808년 미누엘 고도이는 실각하게 되고 종교재판소는 그가 소장하고 있는 누드화 모두를 압수하는데, 특히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재판에서 고야는 이 그림의 가치와 신비로움을 지키기 위해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고야의 태도 덕분에 이 그림은 더욱더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과연 이 <옷을 벗은 마하>는 예술인가 외설인가 하는 논쟁은 결국 작품성으로 승화되었고, 가치를 인정받아 프라도 미술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프라도 미술관 전시 풍경
당시 보수적인 스페인 사회와 문화에 반하는 작품 <옷을 벗은 마하>. 어쩌면 가장 비밀스러운 것이 제일 예술적이라고 고야의 작품 속 ‘마하’가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