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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 자오(Chloe Zhao), <노매드랜드>(Nomadland) | ARTLECTURE

클로이 자오(Chloe Zhao), <노매드랜드>(Nomadland)

-초월: 노동과 자유를 위하여-

/Insight/
by 박정수

클로이 자오(Chloe Zhao), <노매드랜드>(Nomadland)
-초월: 노동과 자유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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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궁핍하여 적게 소유하지만, 제도로부터 자신은 빼앗기지 않아, 영혼을 풍요롭게 소유하고 이를 자유로이 표현한다. 이들이 문명으로부터 거의 전면 유리되어 있었다면, 한편 절충하는 노매드들도 있다. 바로 본 작품 <노마드랜드>에서 타의와 자의에 의해 노매드가 된 사람들을 포착한다. 본 탐구를 지금까지 황야의 삶을 다뤄왔던 클로이 자오가 수행한다.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도시에 적응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전원이나 사막에서 산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지의 자연으로 향한다는 거대한 두려움이자 공포, 하지만 도시는 편한 공간이지, 결코 자유로운 공간은 아닐지 모른다. 그 도시가 속한 국가의 제도와 법 자체가 우리에게 안락, 행복을 보장할지언정, 자유는 오직 제한된 형태로만 허용한다. 그래서 도시의 호화로운 인프라를 마다하고 광야로 떠난, 현대의 ‘노매드(유목민)’들이 있다. 2010년대에 황금사자상과 황금곰상을 수상하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떠오른 지안프란코 로시의 <그들만의 세상>이 노매드의 삶을 다루고 있다. 도시인의 관점에서 그들을 감히 규정한다면 범법자로 볼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로시는 자신의 가치판단을 마다한다. 그의 카메라 렌즈에 날아든 파리, 그것을 제어하지 않는 감독의 태도는, 파리든 광야로 떠난 사람들이든 그들이 스스로 말한 것을 통제하거나 조작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객관성을 천명한다. 로시는 파리나 사람들에게 특정한 제스처를 취하거나 굳이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말한다. 스스로 말하는 몇몇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베트남전 참전군인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를 광야로 떠나게 했다. 편견과 차별에서 비롯한 폭력을 통제하지 않고, 오독된 자유라며 허용한 국가에서 떠나온 성 소수자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외에도 제도가 자신을 저버렸기에, 또 고통으로 가득했던 공간이었기에 도시를 떠나온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무법천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게 되는 혼란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떠나온 체계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궁핍하여 적게 소유하지만, 제도로부터 자신은 빼앗기지 않아, 영혼을 풍요롭게 소유하고 이를 자유로이 표현한다. 이들이 문명으로부터 거의 전면 유리되어 있었다면, 한편 절충하는 노매드들도 있다. 바로 본 작품 <노마드랜드>에서 타의와 자의에 의해 노매드가 된 사람들을 포착한다. 본 탐구를 지금까지 황야의 삶을 다뤄왔던 클로이 자오가 수행한다.     





1982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클로이 자오는 미국의 주목받는 청년 감독 중 한 명이다. 2015년 장편 데뷔한 그녀는 지금까지 줄곧 미국 전원지대에 살아가는 원주민, 카우보이, 불라이더들의 삶을 탐구하였다. 광야를 배경으로 삼는 공간적인 공통점과 더불어, 그녀의 작품에서는 가족에 의한 딜레마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다. <송스 마이 브라더스 티치 미>에서는 여동생과 어머니가 눈에 밟혀 온전히 독립할 수 없는 독립을 청년의 딜레마가 포착되고, <로데오 카우보이>에서도 경미한 학습장애를 앓는 여동생과 낙마 사고에 의해 장애를 얻게 된 형, 방탕한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장이 되어버린 브래디의 고민이 포착된다. 주인공을 둘러싼 민족성, 혈연이라는 딜레마와 더불어, 그들이 나고 자라 쉽게 떠날 수 없는 초원이라는 배경도 마찬가지로 쉽게 결정할 수 없지만,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다. <송스 마이 브라더스 티치 미> 같은 경우 이 같은 환경 내에서 어쩔 수 없이 특정 직업을 강제적으로 택해야만 하는 강제성이 떠오르고, <로데오 카우보이>에서 브래디의 꿈도 온당 주체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이 같은 환경에서 상호조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오는 이러한 딜레마 가운데서 균형을 강조한다. <송스 마이 브라더스 티치 미>에서는 말을 길들이는 과정에 균형을 빗대어, 종속하고 길들임과 동시에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한 개인을 둘러싼 구조와 서로 타협하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는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였다. <로데오 카우보이>에서는 가정환경과 더불어 복합적 부분발작에 의해, 더 이상 카우보이의 삶을 지속하기 어렵지만, <송스 마이 브라더스 티치 미>에서보다 더욱 강인한 태도로 꿈을 좇아야만 한다는 주제 의식을 역설한다. 이렇게 자오는 두 작품에서 연속적이고 유사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러한 이야기를 <송스 마이 브라더스 티치 미>에선 백인 중심적 미국 사회 내에서, 감독과 마찬가지로 타자에 다름 아닌 원주민, 원주민 혼혈의 삶과 공동체에 악순환을 포착하며 그녀의 위치와 연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로데오 카우보이>에서는 이 같은 딜레마를 백인으로 확대하며 특정 민족성에 갇혀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 개인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란 특정한 민족, 인종과 무관하게 힘겨운 일이라는 태도를 밝히는 것인데,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유목 생활하는 ‘타자’들을 포착한 자오의 신작 <노마드랜드>에서도 이 같은 자오의 관심과 연대는 이어질 것이다. 그간 클로이 자오는 비전문 배우들과 전문 배우들이 교차하는, 리얼리틱한 작품을 연출하며 현실의 삶을 녹여내곤 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경향은 본 작품에서 가장 짙어져,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만나게 되는 많은 타인은 실제 노매드들이다. 극 중 그들이 행하는 고백은 배역으로서의 고백인지, 현실을 살아가는 노매드의 고백인지 그 구분이 혼재하며, 표현 또한 자오의 디렉팅을 벗어난다. 자오의 디렉팅은 프랜시스 맥도먼드 등 기성 배우들에게 기교를 내려놓게 하는 데만 작용하지, 이러한 비전문 배우들을 향해선 작용하지 않는다. 이에 영화는 즉흥적이고 통제 불가한 현실을 영화로 생생히 기록한다는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비전문 배우들의 발화와 고백에 비한다면, 맥도먼드를 위시한 전문 배우들로 구성된 장면들은 이를 토대로 승화된 픽션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여전히 거칠지만 이와 동시에 세상의 풍랑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굳센 삶을 승화한 듯한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엿보이며, 일반인 배우들의 현실에서는 ‘그것 자체’였을 오브제들이 상징을 띠곤 한다. 일반인 배우들 각자의 대사가 개개의 삶이라면, 전문 배우들의 대사는 그 모든 사례를 함축하고 정제하여 다수의 노매드를 대표한다. 이렇게 자오는 현실과 그것이 담기는 다큐멘터리적인 숏들을 토대로 허구를 구축해야 한다는 창작의 태도를 비전문 배우들의 삶과 전문 배우들의 연기를 병치하며 탐구한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숏뿐만 아니라, 배우임이 자명한 맥도먼드가 연기하는 장면 가운데서도 이러한 생생한 몸의 즉흥과 우연이 강조된다. 본 작품에서 초반부와 중반부, 두 차례에 걸쳐 맥도먼드가 연기하는 펀이 용변을 보는 장면을 아주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이는 계획과 이성에서 멀어진 여행담을 담아낸 빔 벤더스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적나라한 용변 장면을 연상케도 하며, 최근 개봉한 작품들에서는 <암모나이트>나 <아이카>에서 통제되지 않고 흘러나오는 몸의 반응이 연상된다.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의식조차 통제하기 어려운 본 용변 장면들을 통해 자오는 몸의 자유와 해방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초반부에 펀이 만나는 동료의 문신에서도 강조된다. 동료 자신의 의식은 외부의 지배를 받는 노동에 종속되어 있을지언정, 제 몸에는 거주에 대한 솔직한 자신의 지론을 문신으로 새겨 놓았다. 몸은 이처럼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최후의 입이다. 인간은 이러한 몸의 자유를 추구했을 때 가장 즐겁다. 펀이 아마존 매장에서 일하는 도중, 획일화된 동선에서 잠깐 멈춰서 동료에게 장난을 치고 수다를 떨 때, 즉 즉흥적인 몸의 자유를 추구했을 때 진정 즐거운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몸은 타인의 제어 없이 해방되어야 한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감독은 샘에서 수영하는 펀의 육체를 아주 과감하게, 어떠한 이상화와 손길도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흡사 19세기의 혁신적인 누드화들인 <올랭피아>나 <누드의 마하>를 연상케 하는, 적나라하게 음부가 드러난 구도를 통하여, 누군가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고 생생히 해방되어야 할 육체의 자유를 역설한다. 이러한 본 작품은 느린 호흡을 지향하던 자오의 이전 작품에 비한다면 비교적 편집이 짧고 재빠르다. 숏의 길이가 대단히 짧아 재빨리 지나간다. 이러한 편집의 경향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일단 노동에 의한 삶에 상응한다.      


이러한 편집으로 구성된 시퀀스들은 순식간에 지나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펀이 무미건조하게 노동하고, 일과를 마친 이후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장면들이 본 편집 하에 재빠르게 지나간다. 반면 영화의 도입부에서 남편의 유품을 마주하고 기억하는 장면은 비교적 긴 호흡으로 포착되었다. 남편과 함께했던 그 시간은 펀에게 특별하게 각인되는 반면, 그녀가 참여하는 노동은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듯이, 흡사 허공에 흩날리듯 재빠르게 편집으로 잊혀간다. 이러한 편집을 기인하게 한 노동, 그것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편집은 삶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삶이 되어버렸을 때 사용된다. 진정 의미 있는 노동은 영화에서도 각별하게 포착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노동이 인간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기에, 작업 및 행위와 더불어 인간의 근본 활동이라 지칭한 것처럼, 노동은 나를 표현하고 생존할 수 있게끔 만드는 필수 활동이다. 물론 동시대의 노동은, 또 펀이 귀속되는 노동은 맹목적으로, 나의 진정한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곤 한다. 그래서 이에 반하여 노동이 근본적인 삶을 위한다는 그 본령을 환기할 때, 영화는 감각적이거나 노동으로부터 삶으로 연속되는 편집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삶에 필요한 노동을 성취함에 기뻐하는 펀을 포착하고, 그 노동이 남긴 생산품을 포착한다. 또한 인간의 가장 근원적 노동인 축산업이 극의 후반부 데이브의 집에서 포착된다. 이전까지의 노동은 펀에게서 연속하지 못했다. 네바다 지역에서 석고 기업이 몰락하기 이전 행정을 했던 경력, 기간제 교사를 했던 경험들은 모두 작금의 그녀에게 나타나거나, 생존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당시 노동을 했던 경험은 기업이 공중 분해되며 함께 흩어져 버린 듯, 그녀 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외부의 대상을 위해 노동하고 그 대상이 사라짐에, 당시의 노동은 현재로 연속하지 못한다. 지금 나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데이빗의 집에서 소와 말, 닭을 포착한 이후, 집안에서 이를 요리하고 맛보는 감각적인 숏으로, 연속해서 이어진다. 진정한 노동은 이처럼 나를 표현하고, 나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점에서 즐겁다.     


인간은 이처럼 노동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지만, 본 극의 전체에 거쳐 이는 불발된다. 사회주의를 탄생시킨 칼 마르크스가 본 이념을 정초 시켜 빈곤을 해소하려 한 이유는, 가난에 쪼들리지 않는 인류는 더 이상 강제적인 노동에 지배되지 아니하고, 생존이 해결되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노동을 펼치며 나를 표현하는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노동은 내가 취하는 하나의 도구여야 하지만, 해소되지 않은 궁핍 속에서 오히려 노동과 자본이 나의 주인이 되고, 인간은 그들의 장치이자 사물로 종이 된다. 이에 영화의 비연속적인, 짧게 이어지고 흐트러지는 편집이 기인한다. '어떠한 일을 하고 싶다'가 아닌,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라는 의식하에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의 몸이 즐거운 캠핑장 관리인 같은 일들은 노동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의미 있게 다뤄지지만, 이외의 노동에서 펀은 황량하고 쓸쓸하게, 자신에게 소외된 듯한 외로움을 풍긴다. 그리고 펀은 이러한 노동 때문에 노매드로서 '유목의 길'이 결정되지, 온당 제 뜻대로 자유로이 유랑할 수는 없는 처지다. 그녀의 유목은 자본이 가리키는 길을 향한다. 펀은 이러한 길을 가다가 다른 노매드에 의해 소개받은 장소로 향한다.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정, 그 길에서 감독은 즉흥적으로 펼쳐진 수려한 풍경을 카메라에 풍부하게 담아낸다. 아마존 공장의 획일화된, 철두철미하고도 딱딱한 풍경과는 다르다. 생명력이 피어오르고 색채와 형태는 다채로우며, 또 노동 때문에 결정된 장소와는 거리가 먼 즉흥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장소다. 이러한 풍경의 자연물들은 이념이나 특정 판단으로부터 벗어난다. 노동이나 자본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서, 어떠한 의의도 지니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특정 목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있는 그대로’ 번성하고 피어난다. 우리의 삶도 그래야만 하리, 자본주의에 의해서 결정되고 강제된 노매드의 삶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의미 있고 이에 피어나는 노매드의 삶을 말이다.      





이러한 본 작품은 유랑을 말하는 작품이기에 집이 강조되곤 한다. 펀의 동료가 몸에 새긴 문장도 바로 이 집과 관련된다. 집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구여야 한다. 하지만 집을 소유함으로써, 집이 나를 대신 말하는 풍조가, 그 집에 깃든 자본이 나를 대신 말하는 세태가 이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소유한 값비싼 집이 나를 대신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의 수단이자 나 자신이 말하는 수단으로 집을 삼아야 할 것이다. 펀이 자매의 집에 잠깐 방문했을 때, 손님들이 부동산에 투자해서 돈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펀은 이에 반대한다. 무수한 토지를 저점에서 매매하고 소유하여 그 자본으로 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 그 토지와 집을 진정 나의 표현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펀의 거주지나 밴이 그녀를 대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본으로 환원된 값어치가 아니라, 그녀가 향했고 표현했다는 그 자유로움의 궤적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이 이동하고 잠깐잠깐 거주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는 여정이기 때문에 영화의 편집은 비연속적으로 이어지곤 하며, 정착하지 않고 유동하기에 숏은 대체로 짧다. 이렇게 자유로운 삶은 언제나 행복과 맞물리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해방이다. 영화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펀이 향하는 풍경, 특히 설원의 가혹함과 차가움을 숭고하게 담아낸다. 이러한 거대한 대지에서 자유는 홀로 버티는 것이다. 영화는 익스트림 롱숏을 비춤과 동시에, 클로즈업을 교차한다. 클로즈업으로 펀, 데이빗, 스왱크 등 노매드들의 얼굴을 중앙에 꽉 차게끔 구성한다. 또 영화는 핸드헬드를 통해 단기직을 연연하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들의 삶을, 또 자유를 위해 홀로 세상의 모진 바람을 감내하는 그들의 삶을 거칠게 담아낸다. 하지만 이러한 대자연의 시련 속에서도 굴하거나 빗겨나가지 않으며, 흔들림에도 꿋꿋이 중앙에서 제 삶을 쥐고 있는 자들이다. 거대한 풍경 내에서 고독한 자유인들은 보편자, 세인들과는 반대 방향의 길을 가기 일쑤다. 영화는 캠핑장에서 펀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산책하며 홀로 걷는 장면을 포착하곤 하며, 특히 다른 사람들이 떠나는 방향과 반대로 걷는 펀의 초상을 담아내곤 한다. 이처럼 보편적인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그녀의 여정은 무수한 시선으로부터의 저항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고 저항하는 여정은 매우 버겁기에, 기침이 새어 나오고, 뇌졸중이나 배탈에 걸리게 되지만, 진정 자유인이란 근본적으로 홀로 이겨내고 버텨내야 한다. 영화의 초반부에 캠핑장에 홀로 남은 강아지를 펀이 데려가지 않는 것은, 자유로운 삶이란 결국 내 삶을 스스로가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의존하지도 않고 의존케 하지도 않는 것, 스스로가 염원하는 바대로 있게 만드는 것이랴. 이러한 자유로운 삶은 황량한 사막에서 중력의 속박에 저항하며 자유로이 비행하는 새의 모습으로, 쩍쩍 갈라지는 황야에서도 날카롭고 강인하게 자신을 피워내는 선인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렇게 꿋꿋이 절벽에 서서 나의 이름을 메아리치며, 나를 되돌려 받는 것이 바로 자유다. 이러한 나를 위해 나를 속박하는 그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 심지어 죽음이라는 필멸의 운명에도 낙담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한 진정한 자유이리라. 이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진정 내가 표현하고 싶은 노동, 필요한 노동이 환기된다. 펀의 노동은 그녀의 내부에 남지는 않더라도, 노동의 대가를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는 충실히 활용한다. 이를 추구하다 보면 외적으로는 비교적 궁핍하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을 알아가고, 이를 체화해감에 내적으로는 풍요롭다. 타인이 나의 내면을 차지하지 않기에, 내면을 오롯이 그녀가 소유한 펀은 루트가 정해진 투어에서도 자유로이 이탈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유로운 자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펀이 맞닥뜨리는 돌풍처럼 스스로 돌풍이 되어야 한다. 강인하게 세태에 저항할 힘을 토대로 자신을 책임지며 여행을 떠나야 하기에. 이러한 본 작품은 감독의 이전 작품에서도 사용되곤 한 시퀀스들이 반복되곤 한다. 바로 밤에 모여 캠프파이어를 하는 장면이다. 이전 작품에서도 캠프파이어를 통해 거대한 자연,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태에 저항하는 자유인들을 담아낸 것처럼, 본 작품에서도 캠프파이어를 통해 강인하게 자유를 추구하는 노매드들의 삶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일단 밤은 모든 실체가 감춰져 있어 위험과 혼란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함께 둘러앉아 연대하며, 공포의 시간을 이겨낸다. 또한 밤은 보편적인 이념조차도 잠드는 시간이다. 보편자들은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 이념조차도 그 노동을 감시하지 않고 잠드는 시간, 바로 그 시간에 자유인들은 스스로를 고백한다.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시간이 바로 밤이며, 서로는 함께 불을 피우고 저항하는 동지이다. 이렇게 피워낸 불은 어둠을 일부 몰아냄과 동시에, 무언가를 소멸시킨다. 그들에게는 타인, 자본, 이념에 속박되어 있던 이전의 자신이 불태워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불태워진다 해도 날은 밝아온다. 보편에서 벗어난 시간, 강제된 노동을 거부한 환경이 곧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노을, 황혼, 밤이 아닐까. 그들은 어둠으로 접어드는 듯한 위험 속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무시무시하게만 느껴지던 거대한 어둠은 물러나고, 여명과 아침은 밝아온다. 속박되어 있던 나를 죽여야지만 새로운 나로 재탄생할 수 있다. 영화는 무언가가 소멸한 이후의 희망을 강조한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그러한 저물녘에 펀은 홀로 걷고, 홀로 비치기가 부지기수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혼자 놓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홀로 지탱할 순 없다. 근본적으로 혼자이지만, 필연적으로 타인, 공동체와 관계를 맺어야하는 것이 우리의 타협하는 자유다. 이를 통해 자오는 상호 절충하는 삶이라는, 이전 작들로부터 이어지는 삶의 태도를 논한다. 영화에서는 누군가가 죽어서 남긴 물건을 물려받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체들의 죽음이 축적된 돌을 강조한다. 이러한 타인, 죽음 위에 우리는 서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혼자일 수 없다. 무수한 타인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타인들로 둘러싸인 세계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안긴다. ‘홀로’ 알래스카로 여행을 떠나는 스왱키가 마주 하고 싶은 것은 ‘무수한 타자’들로 둘러싸이고 구성된 생경한 세계다. 이러한 세계가 스왱키의 자아를 구성했다. 아이다호에서 약동하는 생명력을 마주한 스왱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이에 낙담하지 않고 세계와 상호 주관적으로 형성된 자신의 자아가 이끄는 여행을 떠난다. 즉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는 혼자이지만, 그 자유는 끊임없이 외부, 타인, 세계에 호기심이 있다. 극의 후반부에 펀의 자아가 향하고자 하는 곳도 바로 데이브가 아니던가. 홀로 산책하길 바라는 우리, 하지만 함께 놓여서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즐거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또 내게 결핍된 요인들이 있다. 타인은 바로 그것을 충족해주는 존재다. 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부족한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타인이며, 이에 나의 자유로운 삶은 지속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일방적이거나 우열이 나뉘지 않는다. 나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며, 각자는 서로한테 동등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동등함 대신 우열을 가려 수직으로 인류를 나열한다. 노동에 귀속된 펀은 취업을 위해 줄곧 자신을 숙이고 들어간다. 자본에 지배되는 인류는 자본과 기업을 숭배하고 굴종한다. 하지만 진정 자유로운 서로는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결핍되어 내어줄 수 있는 것을 자유로이 교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맹목적인 소유와 자본으로 나를 대신 말하는 것이 아닌,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을 알아가며 비로소 나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타인은 나의 자유를 침범하기도 한다. 펀을 도우려던 데이브가 실수로 그녀의 물건을 망가뜨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그녀가 화장실을 청소하는 와중에 무단으로 침범한 한 남자의 무례함도 그려진다. 또 그들이 떠나온 도시와 이념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는커녕 줄곧 침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타인, 그리고 문명과 결코 온당 절연할 수 없다. 문명의 끈과 영향력이 희미해진 야영장, 황야로 가더라도, 펀은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서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노동의 여정을 밟아가고, 또 도시에 속한 세탁소, 정비소, 병원에 줄곧 가야 하지 않던가. 다만 서로를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펀의 삶을 매도하고 폄하하는 손님들이 아닌, 그 자유로운 삶의 가치를 존중하고 이해해주는 언니처럼, 필연적으로 상호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자유이니, 우리는 그 자유를 보다 널따랗게 추구하기 위해서 침범과 폄하는 접어두고 병존과 긍정을 추구해야 하리라. 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펀은 데이브의 농장에 머물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난다.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결국 자유는 타인의 뜻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니, 우리는 서로가 떠나갔다는 것에 지나치게 구슬퍼해야 하지 않으리.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금 노매드로,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재회할 그 날을 기대해야 하리라. 나를 추구하다가, 나를 초월하여 타인을 만나고, 또 타인을 초월하며 나로 되돌아간다. 무언가에 속박되지 않고 줄곧 초월하는 것, 그렇게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자유다. 이러한 초월에는 타인, 이념, 세계만 해당하지 않는다. 나의 과거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속박하고 지배하는 아집이요 상념이다. 펀은 남편과의 기억에 지배되어 있다. 그를 기억하고 기리고자 여전히 반지를 끼고 있고, 유품을 정리하지 않으며, 그와 함께한 지역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데이브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뻣뻣하다.      


데이브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방종하여 아들의 유년기에 아버지의 몫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현재에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이러한 과거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 오히려 반성하여 초월하는 것이다. 과거에 불가능했다고 해서 현재에도 좌초하리라는 법은 없다.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이에 책임지는 것이니, 데이브는 과거에 다하지 못한 몫을 책임지면서, 현재에 진정 되고 싶은 아버지로 초월해간다. 이로써 과거를 벗어나는 것이다. 펀 또한 마찬가지로 붙잡고 있던 남편의 유품을 정리한다. 그녀도 남편의 기억에 얽매어 망자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에서는 돌, 일단 돌은 펀이 마주하는 풍경처럼, 무목적한 자유에 상응하리라. 어떤 목적, 기능 없이 돌은 그저 자유로이 존재한다. 그렇게 자유로이 존재하는 돌은 무수한 생명이 사멸하고 축적된 스스로의 역사를 담담히 얘기한다. 인간이 외부에서 소유한 것으로 자신을 대신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위치와 내부에 축적된 것으로 존재를 입증한다. 펀이 남편의 기억을, 그리고 유품을 붙잡고 있음에 그가 과거로부터 현재로 나아가는, 돌로 축적해가는 기회를 막아선 것인지 모른다. 그녀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유품을 정리함과 동시에, 그 유품이 자유롭게 해방되며 돌이 되기 위한, 그래서 펀이 소유한 남편이 아닌, 자유롭게 거리에서 노매드로 만나기 위해서 그녀는 그를 놓아준다. 이는 펀이 마주하는 오래된 고목들, 머나먼 광년의 거리에서 자신의 빛을 지구에 비추는 별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들은 과거가 축적된 현재의 자신을 말한다.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 과거의 기억은 향수에 빠져 작금의 나를 망각하는 도피처가 아닌, 지금의 나를 이루는 아름다움과 가치, 지혜의 총체여야 하며, 이에 현재와 공존해야 하리라. 기억을 아집처럼 붙잡는 우리는 알에 갇혀있는 셈이랴. 유년기의 사진, 시, 남편의 추억에 마냥 갇혀있을 순 없다. 우리는 그것을 깨야한다. 스왱키가 보내준 새끼가 깨고 나와 껍질만 남은 알 사진처럼, 우리는 과거라는 알에서 현재로 깨고 나와 초월하여 진정한 자유를 이룩해야 하리라.     


이렇게 클로이 자오는 본 작품을 통해 노동과 자유를 상세히 고찰한다. 맹목적인 노동, 노동에 지배된 인류의 초상이 아닌, 진정 내게 필요하고 나를 표현하며, 자유를 위해 활용하는 수단으로서 노동을 말한다. 노동에 의해 마냥 강제된 노매드가 아닌, 노동하며 자유로운 노매드여야 한다. 이는 본 작품에서 ‘집’도 마찬가지로, 강제된 노동에 의한 거주랄지, 아니면 사물인 집이 인류를 지배하는 형국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거주를 선택하며 이를 통해 자유를 표현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자유는 홀로 책임지는 것이나, 필연적으로 우리는 사람들과 둘러싸이니, 우리는 동등한 관계로 서로의 결핍을 충족하고, 상호 주관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되, 상대방에게 침범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으며 자유로이 각자의 길을 떠나야 하리라. 죽음조차 마찬가지로 사멸한 상대방이 자신의 무수한 역사를 돌로서, 다른 국면으로 얘기할 수 있게끔, 우리는 죽음에서도 자유롭게 순응해선 안 되리라. 무엇보다 이러한 상대방의 죽음이라는 과거와 나의 기억에서도 우리는 초월하여, 진정 현재에 자유로울 수 있는 초월을 고찰한다. 자오는 이렇게 이전 관심을 여전히 탐색하며, 이에 광야의 풍경, 캠프파이어라는 그녀가 선호하는 연출도 마찬가지로 이어온다. 또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감독인 켈리 레이차트와의 유사성도 목도되는데, 필연적인 고독을 논함과 동시에, 타인과 걸쳐져 있는 지론은 <어떤 여자들>을 닮아있다. 또 여성 노매드가 남성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장면은 여성 노숙인을 다루고, 마찬가지로 자본에 의한 비극을 다룬 <웬디와 루시>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노매드들의 삶에 상응하는 빠른 템포의 연출은 치열하지만 느리고 목가적이던 이전 작들의 연출과 차별화를 두며, 소재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감독의 연출력을 입증한다. 또한 현실, 다큐멘터리와의 미묘한 경계를 이루는 자오의 연출은 레이차트의 경향과는 분명 다른 것이기에, 유사하지만 다른 자신의 문법을 클로이 자오는 확립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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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