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파리의 정중앙에 크게 자리 잡은 공사 현장을 지나친 적이 있을 것이다. 샤틀레 역과 퐁뇌프 다리 맞은편, 센 강의 코앞에 자리잡은 이 거대한 부지는 과거 프랑스 아르누보 양식의 상징 라 사마리텐(La Samaritaine) 백화점의 것이다. 세계 최대의 패션 럭셔리 그룹 LVMH의 인수 이후 무려 15년을 잡아먹은 파리 최대 규모의 이 리모델링 공사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잠시 주춤했으나 끝내 막을 내려, 2021년 올해 재개장을 앞두고 있다.
사진 © 2021 DFS GROUP LTD
19세기 후반 완성된 라 사마리텐은 상업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화려한 색채의 플로럴 패턴과 금장 잎사귀 세공품들로 둘러싸인 라 사마리텐은 당시 파리에서 성행하던 도시 정비 사업 속 건축과 디자인의 결정체였으며 파리의 위대한 문화유산 중 하나로 남았다. 첫 개장 후 약 150년 동안 끊임없이 주변 건물을 매입하고 건축과 보강을 진행해온 라 사마리텐은 마치 세월의 흐름에도 절대 불변할 것만 같았으나, 시대의 변화와 자본의 흐름에 따라 변태를 앞두고 15년간 골조를 드러내고 서 있어야 했다.

프랑스의 누벨 이마주(Nouvelle image) 영화감독 레오 카락스(Leos Carax)는 2012년 발표한 영화 <홀리 모터스(Holy Motors)>에서 철거를 앞둔 라 사마리텐의 모습을 주요한 요소로 다룬다. 이야기적 구성에서 탈피하여 전위적인 이미지들의 나열과 추상적인 의미들의 발산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주인공 오스카가 하루 동안 각기 다른 9명의 인물로 변장하여 살아가는 조각 삶을 보여준다.
영화 속 라 사마리텐에는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는 백화점의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물건들은 남아있지 않고 마네킹만 덩그러니 쓰러져 있다. 앙상하게 골조만 남은 백화점이 보여주는 기괴한 스펙터클은 과거 영화(榮華)를 누리던 영화(映畫)와 닮아 있다. 이곳에서 오스카의 옛 연인 에바는 과거를 회상하는 노래를 부르지만, 과거의 영화(榮華)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의 영화(映畫)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 프랑스 영화계의 위대한 물결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시절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감독이 그랬듯, 레오 카락스 감독은 비디오와 작은 화면의 등장이 영화의 본질을 사라지게 했다고 생각했다. 삶과 창작에 대한 성찰로서 작용해야 할 영화예술이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종종 그가 겪은 시대상과 그에 따른 예술의 지위 변화를 담는다. 라 사마리텐과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 처음 등장한 영화는 초기엔 단순 이미지들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불러일으킨 현대 기계문명과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는 전위예술가들로 하여금 영화가 예술의 형태를 갖추도록 했다. 집단적 허무주의를 탈피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관을 찾으려는 시도가 짤막한 다큐멘터리 기록 수단을 스토리텔링과 예술 표현이 가능한 새로운 도구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에바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잠든 라 사마리텐에서 화려한 도시의 파노라믹 뷰를 등지고 추락한다.
스마트폰으로 Dolby Vision 4K HDR 동영상을 촬영하고, 팬데믹으로 수많은 상업 영화관들이 문을 닫고,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플랫폼들이 대전쟁을 일으키는 시대에 우리가 알던 ‘영화’는 언제든 퇴물이 될 수 있다.
사진 © 2021 DFS GROUP LTD
그러나 어떤 시대에도 전위적 시도는 존재하며, 시대에 대한 성찰은 예술적 발전으로 승화될 것이다. 라 사마리텐은 그간 희미해진 아르누보 모티프와 색상을 다시 복원하는 한편, 실크프린트 방식으로 인쇄한 커브드 패널을 이용하여 마치 베일 같은 곡선의 디지털 파사드를 설치했다. 비대해진 시대적 경계를 가로질러 라 사마리텐은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