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1 표지 이미지
“내가 작품에 그리는 풍경들이 변하지 않는 익숙한 모습이자 이 소녀들에게 특별한 순간으로 보여지기를 바란다.”[1]
회화작가가 그려내는 대상과 만화작가가 그려내는 대상은 얼마나 다르고 같을 수 있을까? 캔버스와 만화책이라는 매체에서 스캔된 납작한 그 이미지들이 스크린에 전사될 때 회화적 인물과 만화의 인물은 어떤 차이를 보유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과거에 의미없었다, 만화와 회화적 대상들이 동일한 매체에서 마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회화와 만화의 그려진 것들은 스크린 위에서 동일자가 되어버린다. 당연히 이미지가 아닌 부호화된 데이터의 관점에서 이 둘은 동일하다. 그러나 매체에 시각을 의존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이미지들을 마주할 때 회화는 만화에 완전히 패배해버린다. 20세기의 평면적 시각성을 회화가 지배해왔다면, 오늘날의 평면 시각성의 주도권은 무수히 많은 매체들에 의해 조각났다. 회화는 아주 적은 지분만을 보유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쿠라야 에미’의 회화작업들을 ‘갤러리 페로탱’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의 작업들은 대부분이 중앙에 위치한 망가에서 기인한 작법으로 묘사한 소녀 형상의 것과 사진으로 찍어서 베낀 것으로 보이는 풍경의 조합으로 이루어져있었다. 헤게모니를 상실한 회화라는 매체에 망가적 묘사법을 도입하는 시도는 일본에서 이미 다양한 작가에 의해 시도되어왔다. 이러한 작업들은 대부분 서브컬쳐의 데이터 베이스를 자기들 세계관의 배경으로 삼는다. 따라서 배경과 달리 소녀들은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소녀로 의미되도록 데이터 베이스에서 조합된 이미지로 여길 수 있다. 이는 곧 소녀들이 재현된 것이 아닌 커스터 마이징된 이미지로 이해해야함을 의미한다. 이 글에서는 작업에서 크게 이분적으로 나뉘는 배경과 소녀에 대해서 분석하고 최근작에서 작가가 ‘말풍선’이라고 지칭하는 타원형의 삽입된 풍경 이미지를 고찰한다.
그림 2 Emi KURAYA, Backyard (부분 촬영), 2021, 162x130.3cm, Oil on canvas
‘쿠라야 에미’ 작가의 회화표면에는 크게 소녀와 풍경이 나누어져 있다. 소녀의 신체성은 앞서 말한 망가-데이터 베이스에서부터 기인하며, 현실에서 시각적으로 지각되는 형상이 아닌 그려진 채로 무수한 데이터로서 그 존재감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소녀 뒤로 그려지고 있는 풍경 이미지는 사진으로 찍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 스스로 작업 노트에서 밝히는 것을 읽지 않고서도 그려진 풍경이 오늘날 우리의 손에 쥐어진 일상을 포획하는 카메라의 시선과 유사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진-풍경은 회화-풍경으로 끝내 그려진다. 망가, 회화 그리고 사진이라는 세 가지 매체는 회화 표면 위에서 자신들의 각각의 광학적 특성을 드러내면서 충돌한다. 망가는 인물의 묘사법, 회화는 풍경의 묘사법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은 풍경의 원인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작가의 화면은 매체의 충돌뿐만 아니라 조화도 상상하게 만든다. 소녀들과 눈을 마주치며 전시장을 돌아다니면 그들의 표정이 상당히 미묘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정은 아련한 느낌이라는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없는 나의 느낌 이외에도, 내러티브에서 상황의 확실성을 보장받는 만화 매체의 특징을 만화적으로 그려진 대상에서 읽어낼 수 없게 함으로써 작가의 작업이 회화라고 받아들여지도록 만든다. 사진에서 기원하는 풍경은 회색조가 섞인 색으로 묘사됨으로써 명료한 사진 이미지가 아닌 그려진 것임을 지각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각 매체의 시각성은 회화표면위에서 충돌하지만 유화 물감과 캔버스 그리고 붓을 통한 재현아래에서 각 매체는 서로 뒤섞이고 만다.
그림 4 Emi KURAYA, Nearby Town (부분 촬영), 2021, 162x130.3cm, Oil on canvas. // 그림 3 Emi KURAYA, Password (부분 촬영) , 2020, 194x162cm, Oil on canvas
작가는 작업 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작인 “창” 연작은 일본 망가의 말풍선에서 유래했다. 배경 속 원 안에 들어 있는 또 다른 풍경은 내 상상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내가 찍은 여행 사진 속 일상이기도 하다. 보러 가고 싶은 경치를 볼 수 없는 지금, 이 경치들을 보러 가고 싶은 갈망이 더욱 커졌다.”[2] 우리는 여기서 ‘말풍선’과 ‘여행 사진’ 그리고 ‘보러 가고 싶은 경치’에 주목해야한다. 이전 작업들이 중앙의 대상과 배경이라는 이항관계였다면, ‘창’ 연작 이후 작업은 중앙대상-배경-말풍선의 삼항관계를 보인다. 말풍선이란 무엇인가? 만화를 읽을 때 우리는 말풍선에 쓰여진 말이나 생각을 통해 이미지로만 확정되지 않는 내러티브를 구체적으로 지각한다.[3] 또한 일반적으로 말풍선은 말이나 생각을 담는 구름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 구름을 창으로 변환시킴으로써 만화적 작법에서 탈피한다. 그리고 이렇게 재현된 창은 작가 자신에게는 창문이지만 관람자에게는 거울로 바뀌는데, 작가의 경험이 관람자에게는 결여되어 풍경을 개인의 기억 속에서 반추되는 것으로 대체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치된 풍경은 작가가 그린 것이 아닌 보는이의 기억을 반사하는 거울로 기능한다. 만화적으로 읽으면 소녀가 창안에 그려진 풍경을 그리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려내는 작가 자신이 그리워하고 있으며, 이 작업을 보는 이들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창 속의 풍경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만화적 관습에서 행위의 대체물로 상징되는 말풍선을 기억과 그리움의 제스쳐를 담는 창으로 변환시켜 회화 화면위에 그려낸다.
그림 5 전시 전경
전시장에서 ‘쿠라야 에미’ 작가의 소녀들을 보는 행위는 만화를 보는 것과 달리 ‘미술 제도’를 관통함으로써 수행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작품, 관람자 그리고 전시장이라는 미술계의 전통적 관계도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작가의 이미지를 지각할 때 우리는 다른 이미지 계보학을 요구받는다. 모에 혹은 캐라 데이터 베이스라고 부를 수 있는 일본 망가 서브컬쳐 데이터 베이스가 쌓아올린 역사말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회화 표면이 단순히 ‘소녀’를 그리거나 ‘소녀의 초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표면 위에서 회화와 초상의 전통 그리고 망가 데이터 베이스를 시각적으로 충돌시키고 광학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융합되도록 만든다. 전시장에서 처음에 작업을 마주할 때 작업을 해석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만드는 이유는 이미 말했 듯 사진과 만화라는 시각성에서 기인한다. 일상적 풍경을 촬영한 사진은 지각자에게 해석을 처음부터 요구하지 않는다, 만화역시 내러티브를 따라가게 하는 것이 우선이지 해석을 선두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쿠라야 에미’의 회화는 해석되기보다는 단순히 지각되는 과정에서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을 매체의 충돌과 섞임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왜 그녀의 회화를 ‘회화’로 지각하는 동시에 ‘오타쿠 문화’의 산물로 인식할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1995년생의 회화가로서 그녀는 풍경화에 위치한 만화적 대상들을 통해 회화라는 시각 예술과 서브 컬쳐가 이미 매체 연합 체계 속에서 동일자로 존재한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의 태도에서 매체들은 다른 매체로 전환되는 일종의 조작 가능한 데이터로서 ‘확장자’만 다를 뿐이다. By. Jaeyong Ha
그림 6 Emi KURAYA, Pigtails (부분 촬영), 2020, 130x80.3cm, Oil on canvas.
그림 7 Emi KURAYA, Changing Sceneries (부분 촬영), 2020, 72.7x50cm. Oil on canvas.
그림 8 Emi KURAYA Riverbank in the Sun (부분 촬영), 2021, 194x162cm, Oil on canvas.
[1] https://leaflet.perrotin.com/view/101/window-and-scales [2] https://leaflet.perrotin.com/view/101/window-and-scales [3] 웹툰이나 만화책 모두 여전히 컷과 프레임 사이의 빈 공간들을 통해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을 완전히 감퇴시키지는 않는다. 반면에 애니메이션은 성우들의 음성과 빈 공간 없이 중첩되며 밀려들어오는 움직이는 화면으로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고 상황을 고정시켜버린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서브컬쳐 향유자들은 그려지지 않은 상황들마저 자신들 입맛에 맞게 재창작한다. 이러한 관점이 영화나 회화 향유자와 다른 서브컬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로 보인다. 이외에도 말풍선은 무성 영화의 자막이나 소설의 따옴표, 큰 따옴표와 비교해볼 수 있지만, 이 글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