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계몽주의가 대두하며 미술사적으로 ‘행복한 어머니상’이라는 도상이 빈번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음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전형적인 행복한 어머니의 도상은 딸에게 애정어린 스킨십을 하고 있는 아름답고 관능적이나 인자한 어머니와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계승할 준비를 하는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도상이 당시 계층을 막론하고 널리 퍼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 전반 프랑스의 소설가인 발자크의 삶과 그의 작품인 ‘루이 랑베르’를 통해 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비제-르 브룅과 그녀의 딸, 잔 마리-루이즈',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 (1780-1819)
발자크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루이 랑베르에서 이야기는 루이 랑베르가 방돔 기숙학교로 보내지면서 시작된다. 발자크 역시 7세부터 13세까지 방돔 기숙학교에 다녔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방돔 기숙학교에서 루이 랑베르가 느끼던 억압과 향수병은 사실 발자크 본인이 느끼던 감정이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기숙학교에서 만나 관념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감을 쌓아가는 소설 속 ‘나’와 루이 랑베르는 학교 내에서 ‘시인과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문학과 철학이라는 측면에서 발자크의 모습을 반영한다. 루이 랑베르, 그리고 발자크는 어떤 계기로 기숙학교에 보내지게 된 것일까?
당시 프랑스에서는 봉건 체제 아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조됨에 따라 혈통을 이어 나가는 것이 결혼의 주된 목표였다. 결혼이 단지 아이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함에 따라 정략혼이 빈번했으며 혈통을 잇는다는 역할 외에 부부간의 신의는 없었기에 불륜이 빈번했다. 우리가 흔히 당시 시대를 그려낸 프랑스의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불륜이 만연한 실태를 보고 충격을 받곤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당시 사회, 특히 귀족 사회에서 아이의 양육은 부모보다는 유모에 의해 이루어졌고 아동기에 접어들어서는 수도원과 기숙학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등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은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발자크의 부모 역시 정략혼으로 이루어진 관계로 발자크의 아버지보다 32살이나 어렸던 발자크의 어머니는 발자크를 낳은 후 발자크를 유모에게 맡기고 불륜을 통해 그의 동생을 낳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결핍은 발자크 소설에 등장한 다양한 여성의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루이 랑베르의 초반부에서 강조되는 루이 랑베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묘사는 작가 자신이 바라던 이상적 어머니의 모습을 투영한 결과이다. 또한 소설의 후반부에서 루이 랑베르가 광증에 시달릴 때 그는 미치지 않았다고 반박하며 루이 랑베르를 지극한 모성으로 보살피던 폴린의 모습 역시 발자크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여성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상적인 여성, 이상적인 어머니에 대한 갈망은 미술 작품에서 ‘행복한 어머니’ 도상으로 나타난다. ‘행복한 어머니상’은 혈통 중심의 가족 제도를 비판하고 남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소가족 제도를 강조했던 계몽주의 사상에 의해 등장했다.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가족에서 아이의 양육과 교육은 모두 부모의 역할이 되었다. 언뜻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주장이 오늘날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18세기 가장 진보적이었던 사상의 아이러니는 그 속에서 여성들은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에 따르면 가장 이상적인 여성이란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하는 수동적인 여성이면서 남편의 파트너로서의 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정숙함과 우아함, 그리고 성적 매력을 모두 갖출 것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자들은 혈통 중심의 가족 제도를 비판하고 남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소가족 제도를 강조하며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모두 부모의 역할로 맡겼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인 사상 아래에서 여성은 오히려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당시 가장 이상화되던 여성상은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남편의 파트너로서의 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 따라서 하단 좌측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성들은 정숙함과 우아함, 그리고 성적인 매력을 갖출 것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그림 속 여성은 아이를 돌보는 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편 흐트러진 매무새로 한쪽 가슴을 드러내며 남성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와 같은 도상은 평민, 귀족 계급을 망라하고 널리 퍼졌으며 심지어는 하단의 우측 그림과 같은 왕정 초상화에도 반영될 정도로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좌) '행복한 어머니', 마리 프랑수와즈 콘스탄스 마이에 라 마르티니에르(1810), (우) '아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 앙뜨와네트',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1787)
‘행복한 어머니’ 도상이 유행함에 따라 남편은 바깥 일을, 아내는 집안 일을 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 그리고 성 역할에 따른 구분이 강화되었다. 이 도상을 보며 우리에게 익숙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계몽주의의 아이러니, 그리고 유교적 관념 속에서 제한되었던 여성의 영역은 점차 넓어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가부장적 사상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18세기의 프랑스에서 멀리 떠나온 지금, 과연 우리가 접해왔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서 출발했는지 되돌아보며 그 이면에 담긴 욕망을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사유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