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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링크: https://artlecture.com/article/2020
아티스트 소냐 닐슨과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작업을 함께 한 지현아 시인과 나는 인터뷰 질문 작성에 앞서 닐슨의 작업 주제에서 파생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서신의 형태로 나누었다. 그 가운데 시인은 시를 썼고 난독증을 갖고 있는 닐슨은 질문자가 끌어들였던 책들까지 찾아 읽어가며 천천히 단단하고 세밀한 답을 주었다. 부족하지만, 한 아티스트의 작업과 그곳에 담긴 아이디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락다운으로 인해 두 번이나 연기된 닐슨의 [Visibility is a trap] 전시는 독일 쾰른의 자린발 코쉬박트 Zarinbal Khoshbakht에서 3월 12일 오픈한다.
시詩 / 지현아
또한 나는 엄마를 미워한다 닭을 미워하고 꽃을 미워한다 러시아인형 같은 건 소름이 끼친다 내가 나온 나와 나를 드나드는 나 모두 나이고 전부 내가 아닌 것들 늘어서 있을 때 나는 그게 통증들이라는 걸 안다 엄마가 진통을 시작하자 의사는 손가락 열 개를 펴고 왼쪽에서부터 번호를 붙여 지금 어디만큼 아파요 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 몇 번 인형일까 내 집은 자학을 골조로 한다 도시는 10번 인형이다 통증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음식 냄새와 시티팝을 튀겨 내는 거대한 마트료시카
하지만 나는 눈을 가리는 것들을 사랑한다 허기와 취기는 물론이고 돌려받고자 하지 않는 다정과 펑펑 쓰고 잊어버린 애정 같은 것들에 한눈을 판다 한눈을 파는 동시에 의심한다 사실은 한 번도 믿어 본 적은 없다 믿음은 사랑과 엇비슷한 감각도 되지 못하니까
눈이 오면 좋겠다 눈이 와서 먹기도 멈추고 음악을 트는 것도 잊은 채 모두가 한눈을 팔았으면 좋겠다 시력에 온 힘을 쏟아도 의심스러운 걸 발견할 수 없다 이건 믿음이다 눈이 그치면 엄마에게서 전화가 올 것이다 가끔 받지 않고 간혹 받는다 눈 구경을 놓친 엄마는 탄식한다 그 슬픔은 연기란 걸 안다 이 연기는 몇 번 인형일까 다음엔 엄마를 깨워주겠다고 약속한다 이건 사랑일까
그만한 약속을 얼마나 했을까 죄책감은 거짓말의 딸이다 죄책감들도 엄마를 미워한다 미움이 엄마보다 커졌을 때부터 내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단지 풍기고 들릴 뿐 그건 내 감각인데 엄마의 유산으로 남을 것이 이상하다
*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Rich
인터뷰 전문
글로방전(이하 글) : 어떻게 패싱을 주제로 삼게 되었나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난독증이 있습니다. 요즘은 왼손잡이처럼 그저 조금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보지만, 제게는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제 난독증을 지적 능력의 한계로 여길 거라 확신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숨겼습니다. 그 무엇보다 그것을 이겨내려던 제 방식이 저를 더 많이 성장시킨 듯 합니다.
짧게 제 이야기를 해 볼게요. 저는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읽고 쓰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학교에선 제 고충을 해결할 길이 없어 보였죠. 저처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모아놓은 반에서 시간을 보내며 학교 공부를 따라가야 했습니다. 저만을 위한 선생님이 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장점도 많았지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공부는 혼자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이후 예술 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새로운 분야에 관심이 생겼고 예술 이론에 발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학구적인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우리는 연인이 되었습니다. 심리치료사 에스더 페렐 Esther Perel이 어느 강연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 우리는 약점끼리 보완이 되는 사람과 협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간이 필요한 사람은 장비를 많이 갖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제 경우는 제 읽기와 쓰기를 거의 다 도와주는 애인과 완전한 상호 의존 관계를 맺었죠. 다른 사람의 판단이 두려워 누구도 모르길 바랐고 이 마음은 일종의 이중생활로 이어졌습니다. 아주 복잡한 일이었고 대가도 컸지요. 고생은 했지만 큰 의미가 생겼습니다. 나도 이곳의 일부라는 일종의 소속감이요. 이것은 패싱의 역학에서 제가 특별히 흥미를 갖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패싱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속이는 게 아니라 내가 속한 듯한 곳에서 실격당한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죠.
지현아(이하 지) : 영상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이 궁금합니다. 직관적으로는 패싱이라는 주제가 함의한 시간적인 부분을 영상 매체가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야기를 시각화하는 과정이 항상 즐거웠습니다. 관객의 위치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게 제 바람이었고요. 이 작업에서는 인물 영상을 벽 속에 배치해 과거 이들이 우리 공간의 일부였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우팅(원치 않았던 폭로)을 상징하는 그들은 관객과 멀찌감치 떨어져 오직 벽 사이의 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비디오 프로젝션으로 만들어 입체감을 갖는 홀로그램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가끔씩 우리와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는 관객인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벽에 뚫린 구멍은 부서져버린 네 번째 벽이 되어 우리의 상황과 입장을 일깨워줍니다. 저는 관객이 제 작품을 통해 마음속에 남는 산 경험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술은 보통 시간이 지나고 다른 사람의 글이나 설명을 통해 이해되지만요.
지: 여러 인물들을 재현하고 있는데, 인물들을 선정한 기준이 궁금합니다. O.J. 심슨까지 있어서 놀랐어요. 아마 더 많은 인물들을 조사하고 자료를 모았을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책 속에 들어가지 못한 인물들이 있다면 그들이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다양한 장면에서 다루고 싶었던 주제가 있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따라 그 장면에 포함시킬지를 결정했지요. O.J. 심슨을 묘사한 작품은 외모를 바꾸지 않고 패싱 하는 내용입니다. 이를테면 O.J.는 어떻게 이례적으로 모든 백인 커뮤니티에서 받아들여졌는가와 같은 거요. 그의 이야기는 O.J.가 어떻게 이런 백인 집단의 일원으로 둔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젊은 O.J.의 이야기라는 특정 부분 집중하고 싶었지만 이후 일어난 주변 사건들을 신경 쓰지 않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자기 삶을 망가뜨린 그는 무죄 선고를 받았고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과거 법원이 로드니 킹*Rodney King case 사건의 가해자들을 눈감아 준 것도 그렇고 다른 유사 사건들도 원칙적으로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명확히 말해 제 작품 대부분의 등장인물과 달리 이는 개인적인 차원의 패싱 이야기가 아닙니다.하지만 패싱의 본질을 잘 담고 있는 중요한 장면이죠..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에 담지 못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한 예로, 반 동성애 정책을 펼쳤던 오스트리아의 우익 정치인 요크 하이더 Jörg Heider 사례를 조사했었는데요. 공식적으로 그는 부인과 자녀와 함께 살았지만 교통사고로 사망한 당시 어린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로 밝혀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다루고자 하는 어떤 주제에도 들어맞지 않아 뺐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당사자. 1991년 3월 2일 신호 위반을 이유로 백인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가해 경찰들이 무죄를 선고받자, 흑인 사회가 분노했다 - 위키백과, 번역 주
글 : 거짓말이 아니라는, JT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계속 궁금했습니다. 무엇이 살아있는 정체성이고 그 반대는 또 무엇인지도요. JT의 말을 들어보면, 그 자체로 '살아있는' 정체성이란 것은 없고 단지 우리를 살아있고 존재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이 아이덴티티로 불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고요. 한편, 당신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주체가 살아있는 정체성을 가진 거라고 얘기하는 듯 보입니다. 정체성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나를 거짓말로 만들어버렸고 나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인간처럼 되어버렸죠.
글쎄요, 어쩌면 내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난 분명 살아있었어요."
- J.T., [Point of no return]
저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패싱’ 하는 동안 특정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묘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들이 ‘폭로 당한’ 이후 일어난 모든 사건부터 이들의 죽음은 물론 그 이후 오늘날까지 일어난 일들을 전부 알고 토론할 수 있길 원했습니다. 정체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 끊임없이 변하는 집단적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시대정신에 인물들의 정신과 사고방식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시대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잠시나마 그들의 존재를 믿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JT는 한때 젊은 젠더 플루이드 작가였고 트럭 휴게소에 살던 십 대 마약 중독자이자 성매매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주제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이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 그 자체이기도 했지요. 이것이 JT를 살아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체를 만든다는 오늘날의 인식은 JT 이야기를 매우 특별하게 만들어 주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변한 건 단지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해석뿐이죠.
지 : [Point of no return]에서 빌리 등 어떤 인물들은 침묵이 최선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거기에는 생존이나 안전, 혹은 프라이버시 등의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쏘냐는 드러내기로 했죠. 쏘냐에게 침묵하지 않음의 가치가 우선했던 까닭은 무엇인가요?
모니카 르윈스키 Monica Lewinsky는 한 인터뷰에서 "내 익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하더군요.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돕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폭로된 후에는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지요. 저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건들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를 본보기 삼아 이야기를 나누면 우리가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책에 실을 인물을 조사하다가 그중 한 명이 젊은 시절 성 확정을 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웹 사이트 어디에서도 이 정보를 볼 수 없더라고요. 이 정보를 실으면 제가 인물을 상대로 일종의 아우팅(폭로)을 저지르는 꼴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 : 영상을 보는 방법에 [벽]을 사용한 것에 감탄했어요. 어떤 불통의 벽 같았거든요. '클로짓 게이' 같은 단어도 떠올랐고요. 벽에 난 구멍으로 엿듣는 혹은 훔쳐보는 방식으로써 아우팅이 범죄라는 시각적 효과를 주는 것 같아서 그 점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 역시 패싱일까요. 물론 말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하는 것도요.
아름다운 해석이네요.. 약점, 다칠 위험, 또는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움이 없다면 패싱은 필요 없겠죠. '클로짓(벽장)'이 이걸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패싱은 분명 벽장 속에 숨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벽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죠. 이게 바로 ‘아우팅’이죠. 어떤 사람들한테는 벽장에서 뛰쳐나가는 게 속 편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커밍아웃' 하는 겁니다. 부끄러운 비밀이라는 뜻의 영어 표현 '벽장 속 유골 skeleton in the closet'을 떠올리면 그 상징성이 더 뚜렷해집니다.
글: 정체성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몸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당신 책에 이런 내용이 있죠 - "레이몬드는 남성이 호르몬과 수술을 통해 여성이 되는 것과 트랜스 여성이 여성으로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몸에 붙어 성장한 살아있는 경험과 차별의 역사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더불어 작품 속에서 J.T. 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걸걸하지 않고 다른 여성스러운 부분들이 빛을 낼 때야 내가 진짜로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마흔 살의 통통한 여자의 몸으로 살아갈 방법은 없었어요. 당신은 다른 사람이 되어 정신으로 존재할 수는 있지만 이게 현실이 되려면 만질 수 있는 몸을 필요로 한다는 거예요."
당신에게 몸은 어떤 의미인가요? 자기 존재에 상응하는 마땅한 몸이 없다면, 패싱은 불가능한 걸까요? 가시성이 함정이라면, 눈에 보이는 몸을 바꾸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기만이라기보단 사람들의 눈을 감게 하는 행위로 이해해야 할까요?
패싱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동기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의도였는지도 그들 자신만이 답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귄터 월 라프Günter Wallraff가 패싱을 저널리즘의 방식으로 사용했던 때와 패싱이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이 되어 온 시간을 비교해 볼 때, 후자의 경우 사람들은 대개 대중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때 패싱은 항상 어떤 특권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제한한 영역에 접근하거나 보다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려는 것처럼요.
몸을 이야기할 때 상당 부분은 우리의 선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 관습과 편견에 따라 평가를 받고 각기 다른 신체적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예를 들어, 시대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에 놓이게 하지요. 겉모습이 알쏭달쏭 한 사람들은 패싱 할 가능성이 확실히 훨씬 더 높습니다. 그럼에도 몸은 단지 패싱의 일부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보디랭귀지, 사고방식, 말하는 방식은 물론 페로몬같이 아주 미묘한 요소까지도 의사소통에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끼는 절친과 함께 있을 때 목격한 일을 한 번 이야기해볼까요. 저희는 클럽에 가려고 줄을 섰는데, 그 친구가 그 줄을 슥 지나 입구에서 자신있게 손목을 내밀고 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친구의 그 당당한 태도 때문에 입구에 서 있던 가드도 확인을 깜빡하고 들여보내 준 것 같아요. 스탬프도 찍히지 않은 손목을요. 마찬가지로 패싱은 사고방식을 구체화하고 실현시키는 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글 : 브랜든이 "역설적이군요. 어떤 면에서 당신은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당신이 되어가고 있는데, 당신 과거를 알게 되자마자 사람들은 그것만 보고 있으니 말이에요”라고 말할 때, 우리 인식에 각인되고 형성된 또 다른 가시성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눈에 비친 것만 보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브랜든과 빌리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성취한 후에도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로 억압당하지요. 그래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한편으론 그들의 다양한 정체성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거나 인간관계를 위한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도, 결국은 당신이 말한 대로 '함정'일 수밖에 없는 거죠. 이것이 각자의 현실세계에 상당히 비협조적이고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기도 하니까요. 가시성이 왜 함정이라 했나요? 당신은 관객에게 보여주기보단 들려주고 싶다고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이 생각이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당신 작품에서 가시성이란 무엇인가요?
사실 그 둘에 대해서 제가 지나치게 낭만적인 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의 삶이 장난기 넘치고 긍정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많은 여성들이 그들에게 매료되었으니 당연히 그렇지 않았을까요? 가까웠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제 생각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자 친구에게 몸을 공개하지 않으려면 성적으로 어땠을지 짐작이 되지요. 하지만 이런 추측은 그들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내면 깊숙이 '갇혀 있었을'것이라 단정 짓는 거라 생각합니다.
어쩐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더 진정한'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트랜스젠더는 종종 다른 성별이 자신의 몸에 갇혀 있다 주장합니다. 브랜든과 빌리의 이야기가 폭로되었을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잘 정립되어있지 않아서 그들은 대개 남장 여성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트랜스젠더 정체성 같은 걸 부여하겠죠...... 자신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레즈비언으로 생각할지 공개할 수 없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졌다고 생각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에겐 이런 생각 그 자체가 진정한 비극이고 무엇이 '함정'인지를 말해줍니다.
지: 가시성의 함정이란 말을 계속 들여다보다가 한국에서 오래된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어요. 원효대사의 해골물. 어두운 동굴에서 해골에 고인 더러운 물을 맛있게 마시고 날이 밝은 후에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구토를 했다는 이야기예요. 어둠은 눈을 가리지만 갈증을 해소해 주었고 빛은 현실을 드러내지만 고통을 주었죠. [Visibility is a trap]을 거꾸로 읽으면 이런 이야기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Visibility is a trap]이 패싱을 주제로 한 전시 제목으로 선택된 까닭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원효 대사와 해골물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을 창조하는 데 있어 정신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궁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현아 씨가 작품 제목과 내용을 해석하는 방식에도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네요.
미셸 푸코의 파놉티콘에 관한 글에서 가져온 작품 제목(Visibility is a trap)은 질서를 위한 감독관이나 통제관이 보이지 않을 때 개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후퇴나 청렴이 허용되지 않는 개인은 계속 노출되고 감시 하에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 [Visibility is a trap]의 전시형식과 등장인물 [JT]가 저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어요. [시리 허스트베트]의 [불타는 세계]라는 소설 속 [해리엇 버든]이 [로라 알버트]와 유사한 실험을 하거든요. 또한 [해리엇 버든]의 소설 속 주요 작품이 상자 속의 작은 사람들이에요. 전시를 보는 사람들은 작은 상자가 놓인 위치에 따라 몸을 구부리거나 거의 기듯이 관람을 하기도 하고요. 아주 좋아하는 책이에요. 그래서 쏘냐의 작업이 매우 반가웠답니다.
소설 속에서 [해리엇 버든]은 재능 있는 여성 예술가예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의무들, 결혼 출산, 육아를 마친 후에야 작업을 보여줄 수 있게 되지만, 예상할 수 있듯이 창작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 온갖 여성성을 흠잡아 외면당하고 말아요. 그래서 젊은 남성을 작품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성공하죠. 이건 픽션 속 이야기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패싱으로 봐도 좋을까요? 그래도 좋다면 여기서 패싱 하는 것은 [젠더]겠죠?
아직은 패싱을 이야기할 때 젠더 패싱을 떠올리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하지만 쏘냐의 인터뷰나 작업 영상을 보면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맞다면, 패싱에서 가장 주요한 키워드는 뭘까요.
Harriet Burden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패싱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대답에 있습니다.
지: 글로방전이 그랬어요. 패싱은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서사를 바꾸는 것 같다고.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패싱을 조금 폭넓게 적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 성별뿐 아니라 [환경]을 바꾸는 일에도 패싱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원해서 혹은 내가 초래하여 갖게 된 환경이 아니라면 나는 그걸 그냥 지나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나의 첫 패싱을 떠올려 보니 그건 가족 그리고 엄마더라고요. 그리고 그 시를 썼어요. (시를 읽어 주고 흥미로워해 줘서 고마워요. 정말 기뻤어요.) 그것이 내가 패싱을 자의적이고 나이브하게 해석한 게 아니길 바라면서요. 이것도 패싱이 맞을까요?
현아 씨 시를 읽게 되어서 좋았어요. 그 시가 패싱이란 용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아서 매우 기뻤고요. 사실 제 의도는 '패싱'에 관한 작업을 하는 게 결코 아니었는데, 마침 그 시기의 모든 이야기들이 그 말의 주변을 살금살금 걸어 다니고 말았어요. 말씀드렸듯이, 현아 씨 해석은 아름답고 제 작품에 스며드는 정체성의 역학을 탐색하기에도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패싱을 설명할 때, 저는 보통 그것을 '한 사람이 자신의 출신이 아닌 정체성 그룹의 일원으로 인식되는 능력'이라고 표현합니다. 위키피디아와 다른 백과사전들은 패싱을 이렇게 묘사하죠 : '자신과 다른 정체성 그룹의 일원으로 인식되는 능력'. 전 이게 항상 무례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란 걸 누가 결정하죠?
글 : (정치적이지 않은 걸 얘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당신 작품이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정치적인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것은 어떤가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대답하고 싶습니다.
내용상으로는 확실히 제 작업 주제가 정치와 관련있습니다. 사람들은 배경을 알아가며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사물을 보곤 합니다. 의미, 그리고 상처의 관점에서요. 이 둘은 때론 서로 그다지 관련이 없지만요
애착을 기준으로 말해볼까요. 비록 제 작업이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해도 제 관심과 시선은 심리적 본질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고방식을 납득시키는 건 좋지 않은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정치적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동기와 목적을 기준으로 얘기해보겠습니다. 대중이 작품을 볼 때 마법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창작한 것처럼 제 작품을 보게 되는 희한한 기분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이렇게 작품이 '고유한 생명을 얻도록' 놔두는 게 제겐 의미있습니다..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정말 믿지 않아요. 설사 믿는다 해도, 그 변화는 생각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지: 미술이 혹은 예술이 발언의 수단은 아니지만, 발언하지 않는 미술 혹은 예술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어요. 페미니즘이 제게 준 영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쏘냐는 페미니스트인가요?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예술가로서 쏘냐의 작업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가 있는 곳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죠.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제 작품이 제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고요. 예술가로서의 제 의도는 정치적인 동기를 갖고 있기보단 탐구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페미니스트 작품을 만들어 낸 많은 예술가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제가 '페미니스트 예술가'로 인정받는 것은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글 : ‘예술은 정치적 이어선 안 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작품과 관련해 관객으로부터 일종의 해결책, 내지는 정치적 입장을 요구받은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이 질문엔 짧게 대답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예술은 기꺼이 정치적 주제에 관한 것일 수 있지만, 해결책을 제공하는 데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이 예술을 흥미롭게 만드는지 생각해보세요. 애인처럼, 예술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탐험하고 싶은 것이잖아요. 의도를 알아차리면 이내 흥미가 떨어지죠.
글 : 대학을 다닐 때, 한 교수는 식민지 시대에 창작된 문학 작품을 역사적 상황에서 좀 떨어뜨려 해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게 과연 있을까요? 당신 작품을 보면 사회와 분리된 예술이나 그 가치는 떠올릴 수조차 없는데 말이죠. 예술 창작 자체가 사회적 과정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도 같고요. 사회 내 어떤 포지션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쏘냐 닐슨의 작품은 누구를 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맞아요. ‘예술을 위한 예술’ 같은 게 있다면, 그보다 더 지루하고 무의미한 것을 생각해낼 순 없을 것 같네요. 그런 생각이 갖고 있는 유일한 재미는 그게 완전히 모순된다는 것이지요. 순수하고 자유로운 예술을 성취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독단적인 도덕관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할 뿐이겠죠.
관객을 통해, 예술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즐거운 접속의 순간은 종종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통찰력과 관점을 제시할 때였습니다. 예를 들면, 한 대화에서 종교 연구자 한 분이 자신이 불법적 전용을 어떻게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그분은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취하는 것으로서, 또 새로운 종교들이 발전해 온 하나의 중요한 방식으로서 본다고 말했습니다.
우선은 아이디어를 보는 방식으로, 그 생각들이 저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보기 위해 작업을 합니다. 그다음 그 내용이 자신의 관심사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에 진입할 수 있느냐죠. 많은 경우, 작품이 다루고 있는 이슈들을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잖아요. 예를 들어, 이번 작업은 무언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있어 거짓말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보여줌으로써 거짓말을 둘러싼 생각들을 재고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와 전통적 가치를 바탕으로 가족들과 함께 살고 현대 사회의 이념에 따라 친구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그게 모두 이중생활을 이야기해주지 않나요? 무엇도 파괴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나로 엮기 위해 우리는 많은 비상용 거짓말들을 필요로 하니까요.
지: 작년 스웨덴의 상영 영화들은 여성 감독의 비율이 절반 가까이 된다고 들었어요.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성 예술인의 활동을 크게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독일에서의 전시를 앞두고 있지만) 스웨덴 여성 아티스트로서 작업 환경이나 작품 활동에 대해 특별한 점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가 여성이라는 점이 제 일의 내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 스웨덴에 프로젝트 지원금을 신청하면, 50 % 의 확률로 혜택을 받죠. 사실, 저는 지원금을 신청할 때 이 부분이 정말 싫어요. 지난 2 ~ 3 년 동안 그 기금이 남성들에게 주어지는 걸 보았거든요. 여러분도 올해는 여성들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럼 제가 훨씬 더 큰 기회를 갖게 될 텐데 말이죠!
행복은 인간의 권리 Happiness is a Human Right / 쏘냐 닐슨 Sonja Nilsson / 번역 글로방전
[어머니의 삶은 딸에게 물려주는 유산이다] 시작노트 / 지현아
“패싱은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서사를 바꾸는 게 아닐까”라는 친구의 말이 패싱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바꾸고 싶어 한 나의 서사가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 관한 것이고, 그중에서도 엄마였다. 그렇다면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내 삶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사랑에 대한 건 또 다른 문제다.
나는 엄마를 닮았다. 어쩌면 거의 같다. 엄마는 나의 전생인 것 같다. 나는 내세가 없다고 믿는다.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현세를 충만하게 살기 위해 전생을 잊으려 한다. 하지만 나의 몸과 일상 곳곳에 전생이 끼어든다. 엄마를 떠나 집을 나와 내 공간을 꾸려도 그 일은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물리적인 환경부터 영혼에 관한 것까지 다시 구성하고 싶어 한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데이터를 쌓기도 한다. 나는 그런 삶이 거짓이라거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 혹은 가족이 만들어 준 내가 진짜 나라는 건 결국 모든 인간이 같아야 성립하는 명제 아닌가.
나는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충만한 삶을 위해 많은 삶들을 들여다보고 강력히 원하는 모습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렇게 재구성한 나의 서사가 거짓일까. 과거의 내가 혹은 나를 만든 엄마가 나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패싱이라는 단어에 지금 내가 머무른 지점이다.
*지현아 시인
11년부터 시를 썼고 12년부터 고양이들과 함께 살며 16년부터는 책과 술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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