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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오류: 자유의지란 실재하는가 | ARTLECTURE

이름의 오류: 자유의지란 실재하는가

-전시 ‘나메’ 리뷰-

/Art & Preview/
by 임현영
이름의 오류: 자유의지란 실재하는가
-전시 ‘나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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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나메: Name≫ 곽이브, 류성실, 이유성, 이환희, 정수정, 최이다, 최하늘 2020.12.03.-02.07 뮤지엄헤드
뮤지엄 헤드의 개관전 ≪나메: Name≫는 무의식적으로, 또 무비판적으로 흡수되는 개인의 이름에 담긴 조용한 폭력성을 고발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곽이브, 류성실, 이유성, 이환희, 정수정, 최이다, 최하늘은 어긋나버린 기표와 기의의 관계성을 이름과 정체성 간 생긴 틈에 투영함으로써 그 틈으로 인해 야기된 모종의 위계질서를 전복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들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아를 입증하기 위해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해야만 했던 타자가 오늘날 증식과 범람을 반복하며 개인간의 차이를 없애고 개인의 존재를 무화시키는 위협적인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으로까지 비판의 영역을 확장한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우리는 이름으로 불린다. 굳이 소리 내어 호명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부름에 성실히, 그리고 자동적으로 응답한다. 이는 이름이 개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데서 꽤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 불가분의 관계는 과거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진 나와 이름의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곳곳 이름없이 태어나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수많은 생명체와 무생명체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에게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도 아니고, 필수적인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을 부여받은 자들이 마냥 그 자체로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도 단정짓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이름을 끊임없이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름이 지닌 강제성때문이다. 이름은 우리의 존재에 선행하며, 우리가 현존하기 전부터 개인을 그 틀에 맞춰 조직하고 구조화하기 시작한다. 작명소에서 받았든 조부모나 부모가 지었든, 타인에게 부여받은 이름이라는 기호는 개인이 동의하지 않은 사회적 임무와 고정된 정체성을 그에게 암묵적으로 요구, 주입해왔다. 호명이론으로 유명한 알튀세르의 기념비적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저자는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1)라는 테제를 세웠는데, 이는 한 개체가 속한 이데올로기가 그 개체의 본질을 결정짓는다는 주장이다. 알튀세르는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의해 구성된 물질적 관습에 의한 제약을 받기 때문에, 그는 진정으로 주체적이거나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의견을 굳이 도입하지 않고도 개인의 삶만 되돌아본다 하더라도 애초에 우리에게는 주어진 이름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 전에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혹은 어떤 이름을 갖고 싶은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선택권의 부재에 대해서는 박탈이라기 보다 사회적 관습에 의해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거되어 버렸다는 표현을 쓰는 편이 더 적합하다고 느껴진다. 결국, 개인은 그의 유한한 삶을 사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로도 어떠한 방식으로 기억되거나 기록될 때 타자에 의해 규명된 존재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뮤지엄 헤드의 개관전 나메: Name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또 무비판적으로 흡수되는 개인의 이름에 담긴 조용한 폭력성을 고발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곽이브, 류성실, 이유성, 이환희, 정수정, 최이다, 최하늘은 어긋나버린 기표와 기의의 관계성을 이름과 정체성 간 생긴 틈에 투영함으로써 그 틈으로 인해 야기된 모종의 위계질서를 전복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들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아를 입증하기 위해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해야만 했던 타자가 오늘날 증식과 범람을 반복하며 개인간의 차이를 없애고 개인의 존재를 무화시키는 위협적인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으로까지 비판의 영역을 확장한다.

 

곽이브는 평면적인 매체로써 관람객의 입체적 인식, 경험을 유도하며 건축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재조명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름 곽이브A2사이즈에 음소단위로 나눠 그린 후 여러 장의 종이를 이어붙여 벽면을 도배하듯 채운 <곽이브>(2020)을 선보인다. 음소단위로 해체된 이름은 태초의 의미를 잃고 소리로만 존재하게 되나, 이름의 형태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음과 모음들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고 이어지며 새로운 의미로 확장된다. 곽이브 작업의 주요 매체인 종이 인쇄물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품에 독특한 조형성을 부과하는데, 여기서 조형성이란 종이의 고유한 2차원적 성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에 따라 재조형되는 입체적 상태, 나아가 공간과 함께 조망되는 건축적 차원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 관객은 늘어선 종이들의 군집 사이에 그들의 시선을 개입시킴으로써 작품의 시지각적 가변성을 더욱 확대시키고, 그 확장된 장에 위치한 이름의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다.


곽이브, <곽이브 KWAKeve>, 디지털페인팅, 오프셋인쇄, 가변설치, 42×59.4cm, 4EA, 2020


 

이유성은 <잠자리 스피드>(2020), <Slow Love>(2020), <감속컨테이너>(2020)에서 누군가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보편명사(2)를 경계한다. 보편명사란 특정 속성을 공유하는 집단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외연은 다르지만 동일한 내포적 의미를 지닌 상이한 사물들은 같은 보편명사를 공유한다. 이러한 보편명사는 집단 사이의 구별을 쉽게 만드는 반면. 그 집단 안에 속한 각 개체만의 특수성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몰개성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아가 개체는 보편명사의 의미에 종속되어 그것이 표상하는 바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견고한 일반관념으로 굳어지고 마는데, 이유성의 <잠자리 스피드>, <Slow Love>, <감속 컨테이너>는 이에 대한 예리한 반론을 제기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세 작품은 모두 속도와 이동성을 공통적으로 갖는 오브제를 재료로 포함하지만 해당 오브제가 취하는 태도는 속도나 운동감과는 거리가 멀다. 작업에서 이들은 이동하는 대신 멈춰선 채로, 정적인 모습으로 구현된다. 죽은 듯이 고정되어 있는 롤러스케이트의 휠과 도중 달리는 것을 포기하고 내버려진 듯한 스키부츠, 그리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흐르지 않는 정지된 시간은 오브제들을 동세와 시간감의 맥락으로부터 탈피시키며 관객에게 낯설고도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좌)이유성, <감속 컨테이너 Decceleration Container>, 나무, 휠, 17×187×17cm, 2020

(우)이유성, <슬로우 러브 Slow Love>,혼합매체, 50×120×118cm, 2020  



류성실은 이름이 개인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본인의 서사와 연결 지으며 이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OO류씨 OOOO대손으로 태어나 성실이라는 이름을 받고 한국의 여느 자식들처럼 비범한 사람이 되어 가문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온 작가는 이름을 통해 한 사람이 살아갈 방향을 미리 함축, 유도하는 사회의 관습은 개인이 죽은 이후에도 그 후손을 통해 이름과 업적을 길이 보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라고 본다. 모바일 비디오 작품 <죽지 않는 가문>(2020)에는 엘리베이터를 배경으로 갓을 쓴 노인이 우리의 조상으로 등장한다. 그는 겨울에 가장 많이 쓰는 끈은?’ 따위의 질문에 따끈따끈이라고 자답하며 본인의 농담에 만족한 듯 껄껄 웃지만 애석하게도 냉정한 관객들은 왜 웃긴지도 모를 황당한 농담에 같이 웃어주지 않는다. 철지난 농담들은 마치 작가가 들으며 자란, 그러나 지금 세대에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가문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말과 오버랩 되며 관객 스스로가 이름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한다. 또한,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조상 캐릭터의 구현 방식, 8비트의 조상 캐릭터가 스마트폰을 통해 현대를 살고 있는 후손들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K-작명의 관습이 현대를 사는 후손들에게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기법이라 할 수 있겠다.


(좌)류성실, <죽지 않는 가문 Never Ending Family>, 모바일 비디오, 2분 10초, 2020

(우)류성실, <죽지 않는 가문 Never Ending Family>, 모바일 비디오, 2분 10초, 2020



최하늘의 작품 <형식을 창조하는 자>(2020)<형식을 파괴하는 자>(2020)는 모두 조각으로 통칭되지만 각각 구상과 추상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위치하며 그 형태 또한 매우 상이하다.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스티로폼 커팅기를 든 채 비장한 얼굴로 서 있는 <형식을 창조하는 자>는 누군가에게 반대쪽 손으로 손가락 욕을 날리고 있는데, 그 대상은 바로 반대편에 있는 <형식을 파괴하는 자>. <형식을 창조하는 자>의 욕은 자신은 구체적인 형상을 띄고 있는 반면, 형식이` 없이 내용만 가지고도 자신을 조각이라고 칭하는 조각인 척하는 조각을 향한 비난인 동시에 추상과 구상, 이동과 정지, 창조와 파괴처럼 결코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영역끼리의 불화를 표상한다. 그러나 작품 내부의 의도적인 모순으로 인해 이러한 갈등은 화해의 국면을 맞이하는데, 그 이유는 창조자와 파괴자, 두 조각이 관람객을 통해 하나의 시점에서 조망되며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한 시야에 들어온 조각들은 구상으로부터 추상, 매끈한 표면으로부터 울퉁불퉁한 표면, 프라이머 회색으로부터 형광 핑크색으로의 흐름을 드러내며 이 가운데 이분법의 불합리함을 끝내려는 전위적인 의지를 내비친다.(3)


(좌) 최하늘, <형식을 창조하는 자>, 다양한 재료와 cap, 110×55×183cm, 2020

(우) 최하늘, <형식을 파괴하는 자>, 무겁고 가벼운 다양한 재료, 110×45×196cm, 2020

 


정수정은 <새가 지나갔다>(2020)에서 외부 사건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슈들과 가십을 재구성했던 기존의 경향에서 자신의 내면적 동요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코틀랜드에서 유학하면서 북유럽 종교화의 매력에 빠진 작가는 중세 유럽의 종교화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구도와 대칭을 활용하는데, 해당 작품에서는 ‘Bird’s Eye View’라고도 불리는 조감도법과 좌측상단과 우측하단을 대각선으로 구분하는 대칭구도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주로 여성이며 이들은 범례와 사유를 초월한 미스터리한 대상으로 그려지는 동시에 세속적인 규칙과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주체로 묘사된다. 화면의 우측, 야생동물들과 함께 꽃과 나무로 가득한 원시의 자연을 달려 가로지르는 여성들은 그들의 가냘픈 외모와는 상반되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들이다. 입을 꾹 다문 결연한 표정과 금세라도 캔버스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강렬한 역동성은 인물들이 입고 있던 웨딩드레스 따위의 피륙이 이들의 행동을 제약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화면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날개는 주인공들이 언제라도 현재를 넘어 다른 세상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존재로, 작품을 감상한 여성 관객이라면 한번쯤은 떠올려 봤을 법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지닌 제약에 대한 극복으로 나타난다.


정수정, <새가 지나갔다 Bird's Eye-View>, 캔버스에 유화와 스프레이, 227.3cm×181.8cm, 2020



최이다의 작품은 마치 수미상관의 구조처럼 전시의 시작과 끝에 놓여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통일적인 주제를 이끌어낸다.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 <유제>(2020)<부름>(2020)은 시간의 차를 두고 결론적으로는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연속적인 작업이다. <유제>는 영상의 주인공이 이름 없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며 왜 수신자란을 공백으로 비워 둘 수밖에 없었는지 해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이 수신자의 이름을 침묵으로 대신한 이유는 그가 이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상에서 수신자는 프랑켄슈타인박사에 의해 창조된 무엇, 즉 생명은 받았지만 이름은 받지 못한 존재로 설정되었다. 어쨌든,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붙여지는 이름과 또 그것의 아무런 의심 없는 적용이 불만인 주인공은 이름이 무엇이든 다 자기 하기 나름이기에 이름은 아무래도 중요치 않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이어 나간다. <부름>에 다다라 이 편지를 받은 수신자의 정체는 목소리였던 것으로 밝혀지게 되는데, ‘목소리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인간에게만 이름을 통해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에 분노하며 예전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던 인간에게 이름을 양도해 줄 것을 요구한다. 결국 목소리속마음이 맑다는 뜻의 리아라는 이름을 얻지만, 그에게 있어 이름이란 그를 분노케 했던 자들 앞에 심판자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작가는 두 작품을 통해 이름의 자격을 얻지 못한 자가 이름의 주인이 되었을 때의 혼돈과 원치 않는 이름을 받은 개인이 이름의 의미와 자아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대비시키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분열을 야기하는 징표로서의 이름에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다.

 

(좌)최이다, <유제 Entitled>, 싱글 채널 비디오, 8분 21초, 2015

(우)최이다, <부름 Calling>, 싱글 채널 비디오, 12분 47초, 2020


 

회화와 회화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관찰해 온 이환희는 회화라는 이름의 범주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한다. 그는 회화의 마지노선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되 절대 그 선을 넘지 않는 방식으로 회화의 범위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기를 택하는데, 이를 위해 회화라는 매체가 지닌 평면성을 극한으로 실험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식과 조형성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결과, 관람자의 시각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평면성은 점차 강조되지만 회화 이면의 의미, 그리고 회화 표면에 위치한 이미지의 의미는 점차 감소되어 궁극적으로는 2차원의 캔버스만이 남게 된다. 한편,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엑서터>(2020)<임바머>(2020)는 회화적 순수성만이 강조되는 가운데 잊혀져 가는 서사와 의미 체계의 복권을 꾀한다. 그가 그동안 지속해온 작업의 과정을 총체화하여 보여주는 두 작품들은 결코 회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무조건적으로 회화의 문법에 순응하지만은 않는다. 정면에서는 넓게 퍼져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게 되면 서로 엉겨붙어 입체성이 강조되는 마티에르는 이환희의 회화가 회화라는 이름 아래 모더니즘 회화의 고정된 관념처럼 제시되는 대상이 아님을 드러낸다.


(좌)이환희, <엑서터 Exerter>, 캔버스에 유화, 60×70cm, 2020

(우)이환희, <임바머 Embalmer>, 캔버스에 유화, 164×260cm, 2020


일곱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비춰진 이름은 사회적 매커니즘으로 정교하게 포장된 폭력성과 강제성을 숨긴 기호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며 타인들과 섞이고 또 구분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명사다. 이처럼 나메: Name전의 작가들은 이름의 존재를 양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면서 호명 이전의 장을 찾아 헤매기보다 여러 이름들 사이에서 전체와 맞물려 있지 않은 어긋난 이름을 추구한다. 이러한 중립적 태도는 그들이 정체성 탐구를 핑계 삼아 개인의 자의식 과잉으로 나아가거나 극심한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며, 어쩌면 작가들 스스로가 영영 진정한 의미로서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끔 한다. 하지만 이들은 주체의 허구성을 인정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기술하고 재확인하는 작업에 진심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각색된 자아, 연출된 개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일부를 있는 그대로 밝히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부분에서만큼은 개인이 뚜렷한 주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누군가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 단지 목적론적 오류에 의한 자기기만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리겠지만, 여기 놓인 작업들은 때때로 우리가 이름의 벽 앞에서 무너지거나 좌절할 때 이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는 이유 역시 바로 그 믿음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끝없이 활성화되는 주체에 힘을 실어준다.


 <각주>

(1) 서찬욱,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중심으로”, 시립대 석사학위논문, 2011, p.40, 알튀세르의 말 재인용.

(2) 여러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명사로, ‘보통명사’라고도 불리며 같은 보통명사로 분류되는 대상들은 동일한 속성을 공유한다. 

(3) 권혁규, 「나메: Name 전시서문」, 뮤지엄헤드, 2020, p.1

 

<참고자료>

권혁규, 나메: Name전시리플렛, 뮤지엄헤드, 2020

서찬욱,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중심으, 시립대 석사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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