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
<어디갔어, 버나뎃>(Where'd You Go, Bernadette) - 빛을 잃은 동시대성
“내가 타자의 지배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려고 시도하는 동안, 타자는 나의 지배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려고 시도한다.” -장 폴 사르트르-
지난 2018년 우리는 동시대적인 매체의 특성을 스크린으로 승화시켜낸 <서치>라는 영화를 만난 바 있다. 몇 천 년에 거쳐 물리적인 세계에서만 살아오던 인류의 삶, 허나 불과 몇 십 년, 아니 몇 년에 불과한 세월 속에서 우리의 삶은 가상적인 세계로 인도되고 있다. 우리는 실재 얼굴을 마주하고 감정을 읽으며 상대방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듣기보다는, 간접적인 매체를 통해서 상대방의 시청각적인 흔적을 대신 마주하곤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새로운 시대의 시청각적인 요소들을 바탕으로 현실을 비춰낸 작품이 바로 <서치>이다. 분명 그것들은 현실에서 모방된, 가상적인 요소들을 수반한 시큘라크르이지만, 이제는 그것을 마냥 거짓이나 허구로 여길 수 없는 동시대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동시대성을 보여주는 예술은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의 작가 마리아 셈플의 히트작, 『어디갔어, 버나뎃』도 이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소설의 대다수는 인물들이 직접적으로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문자나 메일, 보고서 등의 대화로 가득하다. 실재의 인물은 사라지고, 누군가가 묘사하고 모방하며 재현된 가상적 요소를 품은 인물만이 대신 자리해있다. 또 민주주의나 자유를 말하는 동시대이지만, 실상 나의 자유만 중요하지 상대방의 자유는 중요치 않은 풍조가 지적된다. 자유가 아니라 그것으로 오독된 방종의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여성은 자신의 뜻을 온당 펼칠 수 없고, 주부로 주저앉아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즉 『어디갔어, 버나뎃』은 동시대에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과 매체를 소설로 옮겨오고, 이를 통해 오해나 거짓이 범람되는 관계를 비판한다. 또한 동시대에서 무수히 외쳐지고 있지만 그저 허울뿐인 개념들의 이면을 들춰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같은 동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개성적인 소설을, 시간성을 가장 잘 다루기로 유명한 미국의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영상화를 시도한다.

리차드 링클레이터라는 이름을 들으면 보통 두 가지 생각이 날 것이다. 하나는 학창시절의 추억이나 공동체를 소재로 한 청춘물이나 코미디물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고스란히 영화 내에 담아내는 감독이라는 평가다. 두 경향이 결코 단절된 것은 아니다. 그의 청춘물 중 비교적 근작인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그의 청년시절의 열정과 혈기와 더불어, 그 시대에 통용되던 매체성에 대한 깊은 탐구를 선보이며, 당대의 시간을 고스란히 옮겨왔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청춘물에 대한 평가보다는, 시간을 다루는 <비포 시리즈>나 <보이후드>가 그의 걸출한 작품들로 평가되는 경향이 짙곤 하다. 그리고 다른 감독들과 비교하여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시간성에 대한 탐구는 대단히 현재적이라는 점을 차이로 꼽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는 우리에게 그 시간은 과거의 것이지만, 본 작품들이 촬영되던 당시에 프레임 안에 담기던 것들은 지극히 현재적인 것이었다. 링클레이터는 굳이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지도 않고, 미래를 예지하지도 않으며, 오직 현재에 있는 그대로의 존재들을 담아낸다. 그리고 이 같은 현재에서 목도되는 것은 일련의 우연성, 유한성이다. <비포 시리즈> 중 <비포 선셋>까지의 만남과 이별, 엇갈림은 언제나 우연의 연속으로, 내가 현재에 붙잡고 싶은 순간, 타인들이 나의 손아귀에서 속절없이 빠져나가 버림을, 그렇게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허망하고도 필연적인 현재를 담아내었다. <보이후드>에서도 마찬가지로 12년이라는 시간의 편린들을 담아낸 본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것은 당대에는 유행했지만 지금은 흘러가버리고 사멸되어 버린 매체들이요, 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만남과 이별은 언제나 반복되고 있다. 링클레이터는 언제나 끝이 존재하는 현재를 탐구하지만, 한편 그렇게 끝남과 동시에 현재는 나이테처럼 과거로서 축적되고 새겨져간다. <보이후드>의 끝자락과 <비포 시리즈>의 마지막 <비포 미드나잇>이 굳이 과거를 거슬러가지 않아도, 이러한 과거가 축적된 주인공의 현재를 보여주지 않던가.
이런 관점에서 <어디갔어, 버나뎃>은 링클레이터가 시간성에 대한 탐구를 내려놓곤 하는 전자의 경향을 보여줄 것이다. 한편 원전 자체에서도 버나뎃의 과거가 화두가 되는 만큼, 이 같은 시간성을 다루는 링클레이터의 관점은 일련의 조화를 이룰지 모른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설로 만들어진 <서치>를 연상케 할 정도로 동시대적인 매체에 대한 번뜩임이 돋보이던 원전의 형식을, 링클레이터는 보다 장르적이고 보편적인 연출로 옮겨온다. 그래서 형식에 있어선 보다 대중 친화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본 작품의 연출에서의 고민이 온당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단 도입부에서 극단적인 버즈 아이 뷰와 경이로운 익스트림 롱숏으로 남극해에서 카약을 타고 있는 버나뎃을 포착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반적인 시점 숏에서 버나뎃을 조망하고, 이후 플래시백을 거쳐 시애틀에 놓인 버나뎃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곤 한다. 이 같은 하이앵글과 시점 숏의 대비 속에서 원전의 형식적 고민이 일련 감지된다고 볼 수 있다. 원전의 형식에서 가상성이 대두된 것처럼 본 작품 속 하이 앵글 구도는, 인간이 실재로는 그렇게 볼 수 없는 일련의 가상적인 형식이다. 날 수 있는 새들의 시점이자 종교적으로는 절대자의 시점, 이를 항공 장비의 힘을 빌려야만 마주할 수 있는, 인류에게 제한적으로 그 진위가 확인되는 구도는 과연 그것이 실재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공한다. 이에 반하여 버나뎃의 육체, 그녀를 둘러싼 삶에 밀착하는 클로즈업과 인류의 시점 숏은, 가상적인 것들을 넘어선 실재적인 요소들로 넘어서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버나뎃을 둘러싼 다큐멘터리, 인터뷰 영상 또한 주목할 법 하다. 마치 원전처럼 타인의 말과 진술에 의해 재현된 버나뎃을 과연 실재의 버나뎃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을 말이다. 버나뎃의 다큐멘터리에 과연 버나뎃은 존재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케이트 블란쳇이 어색하게 합성이 돼있는 듯한, 배우임이 자명한 그녀가 삽입된 사진들의 경우 믿을 수 없는, 원전이 비판하고자 하는 허구성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시키는 듯하다. 이러한 형식으로 엮어진 본 작품의 시작은 누수가 일어나는 집에서 이를 통제하고자 바쁘게 움직이는 버나뎃, 그리고 딸 ‘비’가 하교하여 소식을 전하자 그것을 듣고자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버나뎃의 모습이 포착되며 이뤄진다. 그리고 이 같은 얼굴'들'은 버나뎃이 갖는 각각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엄마로서의 버나뎃과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이다. 이러한 본 작품은 자아와 주체성을 탐구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일단 엄마로서의 버나뎃은 그녀의 현재 자아처럼 보인다. 비는 그녀의 선택에 따른 책임으로서, 버나뎃은 비를 위해서 헌신하고자 한다. 비가 남극에 가고 싶어 하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지만, 결국 비를 위한 결정을 내린다. 엘진이 딸을 위한 선택과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와 망설이는 와중에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결국 버나뎃의 못이다. 그녀도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버나뎃은 자신의 책임을 위해 온당 수행하고자 한다. 자신이 오드리에게 공격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자신이 책임이 있는 비가 그녀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다만 버나뎃은 과거의 병약한 비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현재 충분히 주체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딸을 간과하고 있는 듯 보인다. 비는 자신의 반려견 아이스크림을 주체적으로 구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것마저도 모두 버나뎃이 행하고 있다.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비에게 헌신하는 그녀에게 자신은 존재하는가? 바로 지금은 망각되어버린 건축가로서의 자신이 말이다. 그녀의 집에는 누수가 일어나고, 또 목재 바닥에서는 싹이 피어나고 있다. 건물의 곳곳에 구멍이 있고, 이는 곧 관리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집과 버나뎃의 관계는 상징적인데,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이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준다. 또 자기 자신과 관련된 진실을 외면하며, 버나뎃은 건축가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있으며, 이에 그녀의 집은 서서히 쇠락해만 간다.
다만 건축가로서의 자신은 온당 포기한 것이 아니다. 포기했다기보다는 포기된 것, 그리고 다만 잊힌 것이리라. 그녀는 블랙베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며 벌어질 파국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한 뉘앙스다. 즉 버나뎃은 어머니임과 동시에 여전히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이다. 다만 현재의 그녀는 어머니일 수밖에 없는, 다른 한쪽의 주체성은 억압된 상황이다. 이 같은 주체성의 억압은 타인들의 무수한 시선에서 비롯한 간섭에서 일어난다. 영화도 그렇고 원전도 그렇고 주가 되는 소재 중 하나는 바로 '침범'이다. 오드리는 버나뎃 집의 블랙베리가 미관상 불쾌하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그녀의 정원에 침범하고, 버나뎃의 정원을 그녀의 뜻대로 좌우하려 한다. 이에 버나뎃은 귀찮은 오드리의 뜻대로 순순히 따라준다. 오드리가 버나뎃을 제외한 다른 타인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그 만인의 시선이나 선택을 따라가야만 한다는 일상 속 내려앉은 전체주의에 의해, 오드리와 얽혀있는 이웃, 학부모들은 그녀에 의한 선택을 내리게 된다. 과연 오드리의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주체적인 뜻이 그녀의 의중과 같았을까.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달아나는 장면들이 반복되곤 한다. 오드리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차의 속도를 올리는 버나뎃, 그리고 오드리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로부터 멀어져가는 카일의 모습이 말이다. 그렇게 시선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버나뎃이 엘진이 데려온 시선들로부터 달아나는 것도 자유 및 주체성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그렇게 타인에 의해 둘러싸인 삶 속에서 나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원전에서는 상세히 묘사되지만 본 작품에서는 설명이 모호한 오드리가 버나뎃을 도와준 연유는 바로 거기서 비롯한다. 무수한 시선, 남성에 의해 규정되는 시선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여성의 무력감에 의해 버나뎃의 도피를 도와준 것이다. 본 작품 속에서도 무수한 인파에 둘러싸였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공허해 보이는 오드리의 표정이 이를 암시하곤 한다. 이는 버나뎃이 여행을 두려워하던 이유와도 관련된다. 147명의 시선에 둘러싸여서 나의 영역, 생활을 잃어버릴까하는 그런 두려움, 타인에 의해 자신의 창작물이 붕괴되었던 상황,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공포이다.
그래서 버나뎃은 고립되어 가는 것이다. 실재의 사람들은 시선으로 자신을 옭죄기에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인물인 만줄라, 실재의 세르게이에게 버나뎃은 유일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을 뿐이다. 버나뎃에게서 그녀를 이해해주는 대화란 존재하지 않았다. 만줄라조차도 그녀를 이해해주는 만줄라라는 청자가 아니라, 그녀의 발화를 도구적으로 착취하는 세르게이가 이면에 내재해있었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는 청자가 부재함에 버나뎃의 대화는 자연스레 독백이 되어버렸다. 이는 원전에서도 강조되고, 본 작품에서도 나타나곤 하는 가상에 의한 것일 테다. 실재가 아닌 가상으로서의 상대방을 마주하고 그들과 대화함에, 각자의 발화는 결국 스스로의 환상에 사로잡힌 두 개의 독백이 되는 것이다. 이는 주관적인 판단을 넘어서기가 어려운 인간의 길고 긴 실수에 의한 것일 수 있고, 원전에서처럼 시뮬라크르가 범람하는 동시대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본 작품에서 수행하는 것은 가상에 의해 독백으로 변질된 소통이 아니라 실재의 대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독백이나 일방 통행하는 규정, 요구가 아닌, 오드리가 버나뎃을 알아가고, 또 부녀가 버나뎃을 알아가는 그 대화의 과정과 힘을 말이다. 이러한 대화에 의해서 버나뎃의 진실은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난다. 남성중심적인 건축계에서 여성의 새로운 관점, 패러다임을 제시한, 또한 보편성에 물들지 않은 개인의 힘을 보여준 버나뎃의 저력이 말이다. 영화는 여성 건축가인 버나뎃과 그녀의 오랜 벗인 흑인 건축가와의 대화 및 교감을 통해, 시선과 보편성에 무화되지 않는 개개인의 주체성 속에서 독창적인 창조력이 샘솟는 것을 역설하고, 또 그렇게 배려하는 관계 속에서 부활되는 자유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창조력은 남성이나 자본주의라는 이념에 의해 짓밟혀서는 안 되는 것임을 천명한다. 그 짓밟힘에 버나뎃은 좌절하지 않았던가. 지어져야하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란 타인에 의해 유폐되는 미드로나 힐이 아닌, 버나뎃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건설하고자 하고 향하는 그런 집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본 작품 속 대화의 의미는 이를 나누는 관계의 의미로도 확장된다. 오드리는 자신이 규정하고 재단한 버나뎃과 관계를 맺고 있기에,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줄곧 균열을 일으킨다. 또 버나뎃과 엘진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로 버나뎃이 친구에게 고백하는 발화와, 엘진이 상담사에게 진술하는 버나뎃에 대한 발화 사이에, 아주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강조하며, 양자의 괴리가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폭로한다. 이러한 자신들의 착각과 억견을 지속하기 위해 상대방에 대한 가상적 이미지를 유포하고, 또 실재의 그들을 유폐시키는 등, 나를 위한 이기적인 타인의 희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을 넘어서서 실재적인 것을 알아가고 이를 찾아가는 과정이 강조되곤 한다. 오드리가 판단한 버나뎃이 아니라, 실재 그녀가 마주한 버나뎃에 대한 진술을 바탕으로 비가 그녀를 찾아 나선다. 또 술을 마시면 자살할 것이라는 보편적인 통념에 기대지 아니하고, 자유를 되찾은 버나뎃의 개별적인 상황에 비추어, 또 건축가라는 그녀의 정보를 바탕으로 실재의 그녀에게 근접해가는 비의 여정이 대두된다. 만약 그들이 여전히 가상의 버나뎃에 휩싸여있었다면 결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거나, 낙담하고 좌절해버렸을 것이다. 이는 스스로의 세계에 자신을 가둔 버나뎃에게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잘 알아가며 존중해가는, 세계로의 참여가 도드라진다. 이는 버나뎃 자신이 건축가로서의 자신의 뜻을 재확인하는 과정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버나뎃은 건축가로서의 자신을 위해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희생할 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이를 승인하는 타인과 비의 상황을 인지함에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건축가로서의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의 자유란 고독한 홀로의 자유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무수한 타인들과 부대끼며 누리는 제한적 자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오드리와 버나뎃의 관계처럼, 또 버나뎃 가족의 희생과 배려처럼, 상호존중과 배려 속에서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거나 내어주는 그런 상호절충적인 자유를 누려야한다.
비로소 그 순간, 영화의 초반부에서 잿빛 안개에 가리어져 있던 시애틀이라는 세계와 멀리서 지켜만 보던 타인은, 마침내 투명하게 드러난 남극과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가족의 포옹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링클레이터는 동시대에 대한 소재와 형식을 적절하게 결합해낸 마리아 셈플의 『어디갔어, 버나뎃』을 스크린에 옮겨오고 있다. 다만 본 작품이 원전의 경향을 온당 고스란히 옮겨오는 것은 아니다. 원전의 경우에는 버나뎃의 메일과 사생활을 파헤칠 수 있는, 마치 fbi 요원과 같은 전능한 시점에서 작품 속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 군상들의 행태를 조명한다. 그리고 이를 비의 시점과 교차시키며 극을 전개해나가고, 버나뎃의 실종 이후에는 온당 비의 시점으로 전향하여, 전지적이지 못한 딸이 엄마의 진실에 근접해가는 일련의 추리 과정이 대두된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버나뎃의 시점이 중심이 되기에, 원전 속 미스터리하던 실종 사건의 진위 같은 경우도 미리 까발려진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원전의 모호한 버나뎃에 비해, 처음부터 버나뎃의 실재에 더욱 근접하는 극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 속에서의 실이 결코 없는 것은 아닌데, 원전에서 대두되던 비의 교우관계랄지, 오드리가 버나뎃과 연대하는 연유 등이 생략되다시피 한다. 그래서 버나뎃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삶에 대한 실재조차 세밀히 접근할 수 있던 원전의 미덕은 상실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어머니로서의 버나뎃에서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이 드러나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주체적인 여성으로 껍질을 깨고 나아가는 과정의 카타르시스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로 비유한다면 마치 <서치>처럼 동시대적인 매체를 절륜하게 활용하던 원전의 독창성은 거의 상실 되다시피 하여, 원전과 비교하든 연출 그 자체만 놓고 보든 비교적 상투적인 작품이 되고 말았다. 시간성에 집중하는 링클레이터의 작가적인 색채도 무뎌진 작품이요, 케이트 블란쳇도 그녀가 익히 펼쳐온 기교적인 연기를 별 다를 바 없이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분명 소재에 있어선 원전의 미덕을 충실히 옮겨오며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긴 하지만, 형식에 있어 동시대적인 번뜩임과 독창성이 돋보이던 원전의 미덕이, 스크린으로 옮겨오며 몹시 퇴색된, 밋밋하고도 상투적인 영상화라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