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 씨 옷에 신경 좀 써 ~ 우리 팀장님은 예쁜 사람 좋아해…….” 검은색 9부 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은 내게 같은 팀 언니인 YOU가 했던 말이다.
그다지 붙임성이 좋지 못한 사회초년생이던 시절 괌으로 비행을 갔다. 12명 남짓한 팀원들과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티 타임을 좀 더 갖기로 하고 함께 방을 사용하는 2년 선배와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자 한참을 망설이다 YOU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아무리 회사 선배라 하더라도 같은 여자로서 민감한 이야기를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의 말 한마디에 쉽게 휘둘리거나 잊지 못해 마음 아파하는 여리고 순수한 사람이 못 된다. 강남역 사거리 한복판에서 친구와 소리 지르고 싸워도 집에 오면 다시 웃으며 전화 통화하는 매우 단순하고 호방한 사람이다. 하지만 당시 사태를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단단히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 후로 난 옷차림 스트레스가 하나 더 늘었고 YOU와 함께하는 비행이면 더더욱 외모에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외모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그녀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현지에서 관광을 나갈 때나 쇼핑하러 갈 때, 혹은 호텔 아침 뷔페를 먹으러 갈 때조차 비행기 승무원이라면 민낯에 청바지 차림은 좀 곤란하다는 생각들이었다. ‘언니(선배님이라는 호칭 대신 언니라고 부른다. 나이와 상관없이)’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신입사원들에게 교육했고 그때 그녀들이 가장 많이 댔던 핑계는 같은 비행기를 탔던 승객과 마주칠지 모른다는 것과 승무원으로서의 품위유지였다. 물론 난 호텔 아침 뷔페던, 쇼핑몰이던 옷이나 화장 따위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아름다움이 특히나 여성에게는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시각 차이가 있겠지만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성형외과가 붐비는 것을 보면 외적 아름다움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지금처럼 미를 가꾸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의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이란 어떤 가치였을까? 오늘날처럼 미용이나 성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여인들이 미를 추구했던 방법이 궁금해졌다. |
미의 기준
<투왈렛에서의 여인> 1590
우리에게 ‘화장실’로 익숙한 ‘투왈렛 toilette’은 그림이 그려진 16세기에는 세수하는 것에서부터 메이크업, 헤어, 옷을 입는 행위 등 소위 ‘grooming 몸단장’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제목에서 말하듯 작품 속 주인공도 몸단장이 한창인 듯하다. 앙리 2세의 정부였던 디안 드 푸와티에는 현대인의 눈으로도 무척 빼어난 미모의 여성임을 알 수 있다. 당시에도 오늘날 미스코리아나 슈퍼모델의 심사기준과 같은 나름의 잣대가 있었을까?
알랑 드코의 <미의 기준>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세 가지 하얀 것 – 피부, 치아, 손
세 가지 검은 것 – 눈, 속눈썹, 눈썹
세 가지 빨간 것 – 입술, 뺨, 손톱
세 가지 긴 것 – 몸통, 머리카락, 손가락
세 가지 짧은 것 – 치아, 귀, 발
세 가지 가는 것 – 입, 허리, 발볼
세 가지 굵은 것 – 팔뚝, 허벅지, 다리
세 가지 작은 것 – 젖꼭지, 코, 머리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중에서
지금과 비교하면 의아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매우 디테일하고 정교하다. 그림 속 여인은 과연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기준 중에서도 그녀의 미모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단연 백옥 같은 피부이다. 요즘 우리는 섹시하고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태닝을 하곤 하지만 하얀 피부는 여전히 미의 상징 같은 것이다. 당시에도 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외출 시에는 양산과 모자, 장갑 등은 필수품이었고 나름대로 각자 화이트닝 비법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핏기 하나 없는 하얀 피부를 가꾸고 난 뒤에는 본격적인 메이크업으로 들어간다.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 신부 화장조차 가볍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우리와는 달리 당시의 화장이란 변장술이라 할 정도로 매우 두터운 것이었다.
화장술? 아닌 변장술!
18세기의 통계에 따르면 파리지엥들의 하루 물 소비량은 10ℓ가 채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센강에서 퍼온 오염된 물이었고 깨끗한 물은 구할 수조차 없었다. ‘태양왕’이라 불리던 루이 14세도 칠십 평생 목욕 횟수는 20번 정도였고, 잠자리에 들기 전 시종장의 가장 중대한 임무는 침실에 뛰어다니는 벼룩을 잡는 일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보통 사람들에게 목욕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스레 한번 화장을 하면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고 얼굴의 뾰루지나 여드름 자국은 늘 그들의 골칫거리였다. 보기 싫은 흉터를 가리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두터운 화장이었다. 좀 더 완벽한 보정을 위해 흉터 자국에 검은색 비단을 오려 붙이기도 했다. 소위 ‘애교점’이 유행하면서 많게는 10개가 넘는 애교점을 붙인 여자들도 있었다.
뽀얗고 하얀 피부 표현이 가장 중요했던 당시의 화장술을 살펴보면, 일단 백분 가루를 아낌없이 바른다. 그리고 붉은 염료를 볼에 두드리면 더없이 하얀 피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게다가 얼굴이 작아 보이는 효과도 있었으니 볼 터치는 피부 화장 다음으로 중요한 필수 아이템이었다. 마지막으로 검은색 잿가루를 기름에 녹여 일자 눈썹을 만들어 주면 완성이다.
아마도 여인들은 2시간이 넘는 공들인 화장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자신을 보며 흡족해했을 것이다.
“허리를 졸라매야 해. 더, 더!”
이제 완벽한 변신을 위해 의상을 고르는 일만이 남아있다.
당시에도 파리는 패션의 중심지로서 명성 있는 디자이너들이 넘쳐났다. 유럽 전역에서는 이러한 유명 디자이너들의 의상을 차지하기 위해 직물 샘플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주문에 들어갔다. 이것이 18세기에 전 유럽을 휩쓸었던 ‘robe de panier 호브 드 파니에’이다. ‘파니에’는 ‘바구니’라는 뜻으로 허리선 밑으로 퍼진 스커트의 모습이 마치 바구니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러한 실루엣을 만들기 위해서는 볼륨 있는 엉덩이와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해야 했고 코르셋의 착용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robe de panier 호브 드 파니에>
중세시대부터 등장한 코르셋은 19세기에 들어 정점을 찍는다. 18세기 고래수염을 이용한 코르셋에 이어, 19세기 ‘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철’이 여성의 신체를 자유자재로 정형화할 수 있는 코르셋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코르셋은 가슴을 떠받치고 허리를 잘록하게 하며 엉덩이를 볼록하게 하는 일종의 거푸집과 같은 도구였다. 흰 면으로 만든 코르셋은 등 뒤에 있는 구멍에 끈을 끼워 양쪽을 연결하여 조이는 방식으로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할리우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 하녀가 비비언 리의 뒤에서 힘껏 허리를 조이고 난 후 18인치 반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비비언 리는 자신의 허리 사이즈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혹은 권력을 갖기 위해 이러한 갑옷에 자신을 가두며 자신을 기형적인 신체구조로 점점 내몰아 갔다.

<코르셋 착용으로 변형된 신체>>
19세기 중반 이후 의료계와 예술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코르셋에 관한 다양한 의문과 불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의사인 오귀스트 드베는 코르셋 착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기도 했다.
‘코르셋을 착용한 100명의 젊은 여성들 가운데서 25명이 폐결핵으로 죽었고, 15명이 첫 번째 분만 직후에 죽었으며, 15명이 분만 이후에 불구가 되었고, 15명이 기형적으로 신체가 변했으며, 단지 30명만이 버텨냈지만, 조만간 다소 심각한 육체적 불편함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장 베라르디는 ‘폐결핵에 걸려 죽은 파리의 젊은 여성들 5명 가운데 4명은 코르셋을 이용해서 날씬한 허리를 만들기 원했기 때문에 그녀들 스스로 자살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르주아의 사회와 패션
의복에서 과도한 S라인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남성들의 전쟁 참여로 당당히 역사의 전면으로 진출한 여성들은 코르셋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실용적이고 활동이 편안한 일명 ‘갸르송 스타일’을 추구하면서 코르셋은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21세기의 코르셋
그렇다면 과연 코르셋은 오늘날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의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허리를 졸라매야 했던 여인들이 이제는 또 다른 아름다움의 통념에 갇혀 차가운 수술대에 몸을 맡긴다. 성형과 다이어트, 거식증이라는 코르셋 덕분은 아닐까? 이쯤 되면 9부 바지 대신 나풀나풀한 스커트를 입는 일은 귀여운 투정 정도리라. 여자로서, 딸을 가진 엄마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워야 했던 그녀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서글프다. ‘아름다운 여인’이 되는 것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했던 여인들에게 투왈렛은 가장 강력한 의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