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 순간 혐오라는 질병은 우리 사회를 잠식해 많은 것들을 왜곡하고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인종 혐오와 사회적 약자 비하 등 특정 집단과 소수자를 매도하고 폄하하는 현상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는 다른 생각과 행동에 혐오라는 낙인을 찍어 소모적인 논쟁만을 야기한다. 혐오가 휘젓고 다니는 시대는 서로를 부정하고 대립하게 만들어, 공존을 힘들게 만든다.
이미 혐오라는 독이 깊숙이 퍼진 오늘날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혐오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가 말해주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모노노케 히메>, 1997년, 135분, 지브리 스튜디오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은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또한 인간의 문명도 급속도로 발달하여 빠르게 변화했던 과도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작품 속 서사는 크게 자연과 문명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대립이 항상 발생하고, 고립된 자연에서도 인간을 대하는 자세에 짐승마다 뚜렷한 온도 차이가 존재한다. 즉 크게는 자연과 인간의 충돌을 다루지만, 면밀히 보면 서로 다른 집단과 욕망 간에 생기는 수많은 대립이 작품 속에 존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각자의 욕망에 의해 대립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는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미야자키 하야오, <모노노케 히메>, 1997년, 135분, 지브리 스튜디오
작중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은 인간의 문명을 나타내는 타타라 마을의 수장 ‘에보시’와 숲에 버려져 들개 신들과 자란 ‘산(모노노케 히메)’의 대립이다. ‘에보시’는 혼돈의 시대에 버려진 약자와 길 잃은 방랑자들을 위해 마을을 만든다. 그녀는 더 좋은 마을을 건설하고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을 정복하려 한다. 반면 ‘산’은 들개 신들과 함께 ‘시시가미(자연 그 자체)’와 숲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산’은 매번 ‘에보시’를 죽이려고 한다. 두 인간은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신념을 위해 충돌하고 대립한다. 그들은 서로 소통하지도 타협하지도 않는다. 다만 서로를 증오할 뿐이다. 이 거대한 두 신념이 충돌하여 생긴 증오와 원한이, 작품의 주 무대이다.
원한의 증표와 증오의 피해자 ‘아시타카’
영화는 재앙신의 출현으로 시작된다. 멧돼지 신 ‘나고’는 인간의 총에 맞아 살이 썩고 원한이 쌓여 재앙신이 된다. 재앙신은 문명과 자연의 충돌에 의한 원한의 증표이다. 그 원한의 증표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재앙신은 주인공 ‘아시타카’의 마을도 파괴하려 한다.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고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재앙신의 눈에 화살을 쏘아 죽인다. 주인공은 재앙신에 깃든 원한의 대가로 오른팔에 저주가 걸린다. 뼈를 파고들어 결국 죽게 만드는, 생명을 갉아먹는 저주를 막기 위해 그는 할 수 없이 여행을 떠난다. 예언에 따라 서쪽으로 가 '타타라 마을'과 짐승이 태곳적 모습을 하고 있는 ‘시시가미의 숲’에 다다르게 된다. ‘아시타카’는 거기서 일어나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원한이 결국 자신에게까지 와 저주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반복되는 원한의 굴레를 끊기 위해 그들의 전쟁에 스스로 참전한다. 주인공은 증오의 피해자로서 원한과 재앙의 시대의 진실을 마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
서로 원한과 증오에 잠식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또 각자의 신념에 의해 혐오로 무장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작중 주인공 ‘아시타카’는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마주한 다음 정한다고 말한다. 작품의 배경과 오늘날의 세계는 수많은 갈등으로 왜곡되어 진실이 감춰진 상태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은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뿐이다. 서로 간의 대립과 갈등 속에 혐오라는 감정이 들어가면 그들의 칼날은 방황하여 방향성을 잃기 쉽다. 작품 속 멧돼지 신들이 인간에 대한 혐오감만으로 바다를 건너와 지뢰밭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이러한 싸움이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진실한 눈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모노노케 히메>, 1997년, 135분, 지브리 스튜디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에서 사람들이 ‘시시가미의 숲’을 파괴하고 얻은 철을 통해, 인간답게 사는 모순을 보게 된다. ‘에보시’는 자연을 억압하고 유린하지만 그와 동시에 팔려 나온 여자들에게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나병 환자들을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재앙 같은 시대에 버려진 자들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구원자이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것만큼 누군가에게 중요한 ‘숲’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짐승들과 ‘산’은 그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 원한과 증오로 가득한 그들의 싸움은 외부인인 ‘아시타카’에게까지 이르러 오른팔에 걸린 저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증오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단지 소모적인 싸움을 멈추라고, 혐오에 휩쓸리지 말라고 소리 내어 말한다.
‘아시타카’와 오늘날의 우리는 암울한 현실과 우울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시대를 비관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중재자의 태도와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마주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로 싸움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감독은 증오와 원한의 시대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세를, 혐오가 배제된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을 아시타카를 통해 보여준다.
원한과 증오의 시대에서 부디 살아라

미야자키 하야오, <모노노케 히메>, 1997년, 135분, 지브리 스튜디오
“살아라, 너는 아름다우니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주인공 아시타카의 입을 빌려 혐오의 시대에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이 말을 전한다. 원한과 증오의 시대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싸우고 타인을 혐오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싸움과 고통 속에도 아름다움과 소통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보시’가 시시가미를 죽임으로써 인간(마을)과 자연(숲)은 모두 종국적으로 파괴된다. ‘산’은 자신을 키워준 ‘모로’(들개 신)와 숲을 잃고 ‘에보시’는 들개의 신에 의해 팔을 잃게 된다. 그렇게 숲과 마을은 파괴되고 대립하던 산과 에보시는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된다. 원한과 증오의 끝은 우리가 이룬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아무도 모르게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간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종국적으로 자연과 마을이 파괴되지만 숲은 다시 태어나 새로운 꽃을 피운다. 인간들도 자연과 공생할 수 있는 더 좋은 마을을 세우기 위해 다시 시작할 것이다. 숲으로 ‘산’이 돌아가면서 ‘아시타카’에게 “너를 좋아해. 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라는 말을 남긴다. 그럼에도 아시타카는 “그래도 좋아. 나와 함께 살아가자.”라고 답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증오와 원한이 넘쳐나는 혐오의 시대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세상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모노노케 히메>, 1997년, 135분, 지브리 스튜디오
제한된 공간에서 우리가 살아있는 한 싸움과 혐오는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