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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 ARTLECTURE

영화란 무엇인가.


/Insight/
by 강석주
Tag : #비디오, #Film, #영화, #역사
영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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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결국 무엇이 ‘좋은 영화’ 인가라는 물음으로 회귀된다. 전술한 바처럼, 좋은 영화란 실재계를 끈질기게 포착하고 있는 영화이다. 단순히 오락, 유희거리로서 영화를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가(즉 감독)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를 어떤 식의 선회를 통해 담아낼 것인가라는 문제가 관건이다....



1895, 뤼메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특허를 받았을 때(1), 그것은 사진에 대한 전위 이자 예술에 대한 전위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란 필연적으로 작위적일 수밖에 없다. 카메라를 통해 피사체를 담아내어 그것을 상영하는 이중 매개를 걸쳐야 비로소 관람객들의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구축된 세계는 당연히 작가라 불리는 감독의 통제 하에 철저하게 통제된다. 여기서 통제란, 억압이라기보다는 실재계 그 자체를 표상할 수 없음에서 오는 통제이다. 하지만 좋은 영화’, 영화라는 매개는 실재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그것은 영화라는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완전하게 극복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선회하여 타협할 수는 있다. 예컨대, 우리가 거장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감독들(타르코프스키, 브레송, 오즈 야스지로 등)은 이러한 선회를 선택한다. 익스트림 롱샷으로 롱테이크를 가져간다든지, 아니면 카메라의 움직임을 철저히 제한시켜 관객의 시야를 일정수준 이상으로 가져갈 수 없게 한다든지, 아니면 카메라를 인물의 시선에 맞춰 그것을 카메라로 담아낸다든지. 이러한 선회는 단순히 영화가 극으로서 작동한다기보다, 모종의 실재계의 옷자락을 붙잡고 흔드는 것과 같다. , 아도르노가 얘기한 바처럼 확실하게 통제된 합리적인 세계를 스크린에 투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재계 그 자체를 어떻게 해서든 포착해내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거장을 거장으로서, 혹은 영화를 영화로서 작동시키는 모종의 페달과도 같다. 그렇다는 것은 영화라는 것은 로베르 브레송이 말한 것처럼, 극과 차별되어 움직이는 이미지들과 소리들을 가지고 하는 글쓰기이다. 이것은 여타 예술들과는 달리 실재계를 끈질기게 붙잡을 여지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홍상수의 <강변호텔>은 탁월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두 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통제되지 않은 카메라(핸드헬드)와 아버지라는 존재이다. 전자의 경우, 처음 쇼트를 핸드헬드로 잡으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를 제시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 모종의 선언과도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제된 상황이 아니라는 선언. 다시 말해, 실재계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다는 홍상수의 선포와도 같다. 이 핸드헬드이 어떻게도 이러한 선언과 연결될 수 있을까?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시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주인공들의 시선에만 머물던 카메라가 뜬금없이 어떤 고양이 한 마리를 잡는다. 홍상수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듯, 그 고양이는 일부러 넣은 것이 아니다. 그래, 그냥 지나가는 길고양이 중 한 마리였을 뿐이다. 그런데 홍상수는 아주 노골적으로 이 고양이를 계속해서 카메라에 담는다. 이 고양이를 담을 때, 카메라는 줌인과 줌아웃을 통해 계속해서 이것이 카메라에 담기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이것은 첫 번째 쇼트, 그러니까 핸드헬드과 연결되는데, 이러한 시도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이것이 영화임을 상기시키지만, 현재 담고 있는 것이 통제된 상황이 아닌 통제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최면을 거는 것. 이러한 카메라의 기술을 통해 상황의 비통제성을 공연히 하고 반대로 그 비통제성에서 오는 이것은 영화다라는 명제를 통해 실재계를 끈질기게 붙잡는 것이다. 여기서 실재계라 함은 진리에 가깝고, 그 진리란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이미지들 그 자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탁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 진리가 무엇을 향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홍상수 영화를 익히 아는 사람들이라면, 홍상수가 가족이라고 하는 관계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라고 하는 존재는 상당히 생경하다. 그 어떤 작품에서도 아버지라는 존재가 <강변호텔>처럼 대두된 적이 없고, 기껏해야 어머니라는 존재가 부수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강변호텔>의 주인공은 전적으로 아버지. 이것은 첫 번째와 연결되는데, 이 작품이 끈질기게 실재계를 붙잡고 늘어진다면 이 아버지라는 존재는 누구를 투영한 것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홍상수 본인이다. 그래, 여기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홍상수 본인을 투영시킨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첫 번째를 통해 이것이 실재계를 끊임없이 붙잡고 있음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 실재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 실재계란 다름 아닌 작가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작가의 세계란, 홍상수라는 인물이 겪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그렇다는 것은 이 작품이 전적으로 홍상수가 겪고 있는 세계라는 것을 말하고, 동시에 홍상수 본인이 영화 어딘가에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투영된 홍상수는 다름 아닌 아버지이고(아이러니하게도 본인도 아버지이고) 이것은 홍상수가 어떻게 세계를 대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2) 이처럼 영화란, 단순히 극적 재미나, 교훈적인 얘기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계라는 문제. , 영화가 담고 있는 세계가 단순히 합리적이고 장르적 세계로 가미된 것이 아닌 얼마나 실재계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영화란 얼마나 실재계라고 할 만한 세계를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있는 지와 관련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의 탄생>, <전함포테킨> 등은 역시 탁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국가의 탄생>남북전쟁과 미국의 재건을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만든 작품’(3) 라고 할 때, 이것은 새로운 반향을 일으킨다. , 이 작품이 얼마나 실재계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건, 설령 이것이 이중매개를 거친다고 한들, 그 어떤 예술보다 실재계를 표상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전함포테킨>의 오데사 계단 시퀀스 역시 이러한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반복컨대, ‘영화라고 할 만한 모종의 본질은 재미나 미적 유희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본질이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가감 없는 세계를 표상하고 있는 지에 대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이번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어떨까. 이 작품이 칭송받는 이유 중에는 여러 가지 테크니컬한 요소나 봉준호 감독만의 디테일 역시 한몫을 했겠지만,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에 이견이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자면(약간의 권위에 기대어), 궁극적인 요소는 바로 세계의 표상에 있다.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계급투쟁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암투, 그리고 비로소 완성되는 그들만의 리그. 이것이 봉준호의 <기생충>영화답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쯤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그렇지 않은 영화는 모조리 쓰레기라는 것이냐는 물음이다. 여기서 나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얘기할 수 있다. 영화라 함은 그 기능에도 여러 가지 측면이 드러날 수 있다. 예컨대, 스릴러 장르에 관한 영화를 본다고 했을 때, 그 영화는 스릴러적 측면에만 충실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우리가 순문학과 장르 문학을 구분하듯이, 이러한 요소는 장르성에서만 국한된다. 다시 말해, 영화를 위한 영화, 혹은 영화로서의 영화는 전술한 바와 같은 영화가 영화로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유희와 킬링타임을 위해 소비되는 모종의 오락거리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명확해진다. ‘영화로서 생각되는 영화. , 자기 본위의 봉사성을 바탕으로 산재해 있는 실재의 문제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영화가 영화로서의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본위, 즉 다시 말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결국 무엇이 좋은 영화인가라는 물음으로 회귀된다. 전술한 바처럼, 좋은 영화란 실재계를 끈질기게 포착하고 있는 영화이다. 단순히 오락, 유희거리로서 영화를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가(즉 감독)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를 어떤 식의 선회를 통해 담아낼 것인가라는 문제가 관건이다. , 영화로서의 영화, 예술로서의 영화로서 어떤 방식을 채택할 것은 전적으로 감독에게 달려있다


(1) 「영화, 어떻게 쓸까?」, 티모시 코리건, 비즈앤비즈
(2) 『홍상수의 작가적 전회 – 새로운 가능성에 대하여』, ARTLECTURE, 강석주.
(3) 「영화, 어떻게 쓸까?」, 티모시 코리건, 비즈앤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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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강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