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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적으로 고정되는 사진은 프랑스 중부에 살던 발명가 니앱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석판 인쇄를 연구하다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자연에서 바로 이미지를 얻을 순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는 석판화에서 원그림으로 석판을 만들 때 그대로 옮겨 그리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했고, 원판을 만드는 과정을 자동화시키고자 했다.
8시간 노출을 준 니앱스의 창 밖 풍경
처음에는 빛에 노출되면 검게 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염화온을 이용했지만, 나중에는 빛에 노출되면 딱딱해지는 비튜멘을 사용했다. 니앱스는 비튜맨을 라벤더 오일에 녹여 버니시 용액과 섞어 백랍판에 그 혼합색을 발랐다. 그 판을 카메라 옵스큐라에 넣고 그의 정원을 향해 열린 창문으로 8시간 노출을 주었다. 광선을 많이 받은 밝은 부분의 비튜맨은 딱딱해지고, 광선을 받지 않은 어두운 부분의 비튜맨은 그대로 부드럽게 남았다. 니앱스는 판을 라벤더 오일로 세척해서 남아 있는 감광되지 않은 부드러운 비튜맨을 제거하여 그 장면을 영구적으로 남길 수 있었다. 니앱스는 그 처리과정을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라고 불렀다. 이것이 카메라가 만드는 이미지를 광학적 방법으로 고정시킨 최초의 프로세스이다.
니앱스의 작업에 관한 소식은 또 다른 프랑스인 다게르에게 전해졌다. 다게르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스케치용으로 이용해왔고, 만들어진 이미지를 고정시키는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니앱스에게 편지를 보내 정보를 교환하자고 요청했고, 1829년 둘은 동업자가 되었다. 다게르는 니앱스와의 동업으로 다게레오타입(Daguerrotype)을 만들어 냈다. 잘 닦인 은판 표면에 포지티브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은판 사진(銀板寫眞)’이라고도 불린다. 다게레오타입의 발명은 프랑스혁명 이후 초상사진의 확대라는 배경과 관련이 깊다. 프랑스혁명 이후 기존의 권력층이 무너지고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며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초상화로 남기고자 했다. 값싸고 빠르게 초상화를 얻고자 하는 욕망은 실루엣 기법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드러났고, 사람들은 이보다 더욱 값싸고 빠르게 초상화를 얻고자 했다. 다게르는 초상화의 소유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에서 사진을 발명했으며, 초상을 염두에 두었기에 다게레오타입은 한 장의 사진만 가능했다. 다게레오타입은 은 표면이 거울처럼 보여 ‘기억의 거울 memory of mirror’로 불렸다.
다게르 <탕플대로 풍경>, 1838경 촬영
다게르는 자신의 기술에 대한 특허권으로 갑부가 될 꿈을 꾸었다 당시 프랑스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아라고는 다게르의 사진 기술 독점은 안된다며 다게레오타입은 미래 예술 양식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주장했다. 아라고의 주장이 받아들여 프랑스 정부에게 특허권이 넘어갔고 사진술은 공적 소유로 전환되었다. 특허권 국가 소유 공식 발표일이 1839년 8월 19일이기에 사진의 발명을 1839년이라 칭하는 것이다.
한편 다게르는 디오라마 극장이라는 최신시설을 운영했으며, 극장산업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한다. 다게르는 원래 무대예술가였는데 오페라 극장 무대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디오라마 극장을 만들게 되었다. 디오라마는 풍경화나 그림으로 된 배경에 축소된 모형을 설치해 특정한 장면을 만들거나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모형을 이용해 역사적 사건, 자연 풍경, 도시 경관 등을 표현하며, 음향이나 조명을 함께 연출하여 생생함을 더하기도 한다. 다게르는 오페라 극장에서 배경을 무대 장치가 아닌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이미지를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베르사유 옆 디오라마 전용 극장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잘 되자 다게르는 영국 런던의 리젠트파크 옆 새로운 디오라마 극장을 세우려 했다. 그때 베르사유 옆 기존 디오라마 극장에서 화재가 일어났고 디오라마 극장은 파산하게 되었다. 다게르는 이후 새로운 사업 모델을 연구했고, 니앱스와의 공동 연구를 기반으로 사진 프로세스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