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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안내문, 작가론과 예술론
*서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20세기 소련 및 러시아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다. 그와 함께 20세기 소련 영화계의 두 축으로서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알렉세이 게르만이 국내에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처음 소개되며 간헐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은 정식개봉도 줄곧 이뤄졌고 특별전도 자주 이뤄졌기 때문에 국내관객들에겐 보다 친숙한 편에 속한다. 허나 그러한 친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암시적인 상징성으로 가득하기에 모호하며, 또한 종교적인 테마, 러시아의 역사성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 감상자를 난해함과 당혹스러움으로 이끌곤 한다. 허나 그의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삶이 농밀하게 녹여진 개인적인 영화이기에, 그가 생각하는 예술관이나 미의식, 그리고 그가 살아온 생애를 파악한다면, 그의 작품들을 보다 친숙하게 마주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당대의 암담한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종교의 본령을 회복함으로써 암담한 현실을 구원코자한 의지를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일련의 선한 방향성은 작금의 종교적인 감상자들에겐 길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타르코프스키의 여섯 장편들이 소개되는 그의 특별전이 오는 4월 광주극장에서 열린다. 본 특별전에 앞선 본 글은 그의 작품들 속 난해함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작가론과 예술론을 다뤄내어, 타르코프스키의 일대기를 마주하기 위한 일련의 안내문으로서 작용하고자 한다.
*작가론, 그의 가정
먼저 타르코프스키의 작가론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생애는 그의 작품 속에 여러 형태로 투영되곤 하기에, 그의 예술론 및 작품론과 분리하여 이해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타르코프스키는 1932년 4월 4일 모스크바 북쪽의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는 시인이었으며, 어머니 이바노브나 비쉬나야코바는 인쇄소에 다니며 교정일을 맡았다. 또한 아르세니의 경우 영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나 집을 자주 비웠으며, 어머니의 노동도 이러한 아버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또한 2차 대전에 휘말려 불구가 된 이후에는 가족들의 곁으로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망은 <거울>에서 두드러진다. 영화 속 아들과 어머니는 아버지 및 남편이 부재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어머니는 인쇄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편 아들은 시를 낭독하며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려 노력하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갈망할지언정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르코프스키나 어머니는 몸소 나레이터로 참여하여 그의 시를 낭독하며, 남편 및 아버지의 예술관에 대한 찬미를 보인다. 또한 아내와 아이를 저버리고 사명을 완수하러 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띠는 <잠입자>또한, 그의 아버지가 영감을 찾아나서는 여정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타르코프스키를 둘러싼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그의 작품 속 '거울'로서 투영된다. 절대로 완전함을 띠지 않는 그의 가정은 1차적으로는 그의 유년기의 상황에 부합되는 것이다.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
<거울>에서처럼 타르코프스키는 아르세니의 시를 깊이 찬미했다. 이러한 아르세니의 예술관은 타르코프스키에게 깊이 투영되고 영향을 끼친다. 아르세니의 시의 특징은 모호한 상징성을 기반으로 한 암시성이 대두되는 경향과, 이상향을 갈망하는 경향, 그리고 종교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형식에서의 상징주의는 타르코프스키의 상징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타르코프스키의 연출 역시 직관적인 메시지보다는, 어떠한 설명도 없이 제시되는 모호한 시청각적인 상징으로 에둘러서 제시되곤 한다. 아르세니가 시적표현에서 보이는 일련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은, 타르코프스키가 시청각적으로 직조해내는 일련의 탐미적인 시퀀스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아르세니가 이상향을 갈망하는 경향은 그의 유년기에 거친 1차 대전과, 그를 불구로 만든 2차 대전에 의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정착해있는 러시아라는 국가가 부여하는 시련 때문에, 언제나 평온한 일상은 산산조각나기 일수였다. 그래서 그는 정착을 함으로써 부여되는 일련의 희생대신, 정처 없이 유랑하고 떠도는 삶을 택했다. 이러한 아르세니의 경향 때문에 타르코프스키도 이데아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타르코프스키의 개인적인 이데아는 아르세니가 정착한 현실에 다름 아니었다. 아버지는 정착함으로써 부여되는 시련을 외면했지만, 아들은 찰나적으로 맛본 정착과 안정된 삶을 갈망하였다. 타르코프스키가 <노스텔지어>이후 이탈리아로 망명하면서도, 줄곧 소련을 그리워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땅, 그 곳에서 온전한 가정을 누리고자 한 유년기의 열망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가 이상향을 바라며 택한 삶은, 아들에게 다른 형태의 이상향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종교성으로서, 일단 아르세니의 작품들에서는 암담한 현실들이 분명 묘사된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황폐화된 참혹한 모국에 대한 참상이 묘사되곤 한다. 허나 그러한 시련에 대해서 아르세니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로서 결코 낙담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련을 정교회의 믿음을 바탕으로 잘 극복해낸다면, 결국에는 구원이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이러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시련은, 그의 아들에게 이르러 2차 대전 및 냉전이라는 시련으로 옮겨진다. 이러한 정교회의 순교자적인 태도는 예술론에서 더 깊게 다뤄보고자 한다.
*지질학, 동양, 하이쿠, 시
이러한 두 부모의 영향이 타르코프스키라는 작가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들 밑에서 타르코프스키는 동양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인다. 이윽고 1951년에는 동양의 언어에 관심을 보이며, 특히 일본의 하이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하이쿠에의 관심은 아버지의 상징주의와 더불어,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간결함에 다름 아닌 미니멀리즘, 그리고 정교한 계획을 중시하는 롱테이크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할 수 있다. 이후 지질학으로 전향을 하지만, 이 시기 끈질긴 인내를 필요로 하는 지질탐사의 경험이 그의 영화촬영에 있어 크나큰 지양분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지질학은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그의 긴 몰입감을 동반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투영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질 탐사까지 마치며 그는 이윽고 영화감독이 되기를 다짐하지만, 이러한 부모의 영향 및 유년기, 청년기의 관심으로 확립한 미의식을 기반으로 영화감독이 되기를 다짐한 그이기에, 보수적인 영화문법을 강조하는 영화학교는 오히려 그가 형성하고자하는 독자적인 문법을 형성하는 안티테제로 작용했을 뿐이다. 즉 그가 찍고자 하는 영화는 자신의 생을 둘러싸거나, 자신이 경험한 바를 포착하고 싶은 것이며, 또한 지질학의 태도처럼 이 세계에 대한 골똘한 모색이 담긴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영화는 정교회의 영향 하에 종교적인 보편성과 진리를 탐구하는 면도 분명 존재하나, 결국에는 개인적인 영화인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년기와 청년기, 그 이후의 삶과 시선이 농축된 결과물이 바로 영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예술론, 흑백
이러한 그의 개인적인 삶은 영화의 형식으로, 그리고 상징으로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러한 작가성이 표현되는 그가 형성한 예술론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개개의 작품의 고유성을 포착할 작품론과는 달리, 그의 총 일곱 작품을 공통적으로 꿰뚫는 예술적 특징들을 포착해볼 것이다. 우선 그의 일곱 작품들 중 초기의 두 작품인 <이반의 어린시절>과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경우에는 흑백영화이고, 이후의 다섯 작품은 컬러영화이다. 하지만 컬러의 다섯 작품 내에서도 흑백에 가까운 무채색의 색채와, 원색으로의 전향 등, 흑백영화를 오가는 연출이 여전히 포착된다. 또한 색채를 포착할 수 없는 초기의 두 흑백영화 내부에서도 조명의 풍부함과 절제가 대비되며, 컬러영화 내에서의 색채대비가 예고되는 연출이 동반되고 있다. 일례로 <이반의 어린시절>의 경우 2차 세계대전이라는 당대의 현실을 표현함에 있어 제한된 조명을 필두로 한 삭막하고도 암담한 풍경과,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이상향으로 펼쳐지는 일련의 과거와 이데아에 상응하는 시퀀스들은 풍부한 자연광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따스한 풍경으로서 대비를 이룬다. 전자에서는 컬러영화로 포착된다 한들 무채색과 둔탁한 색채가 대두될 것만 같고, 후자의 색채는 태양이 모든 사물을 내리쬐어 투명하게 빛날 것만 같은 풍부함을 띤다. 15세기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는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이 포착되는 <안드레이 루블료프>또한 조명은 내리쬐지 않아 투박하고 암담한 세계로 묘사되는 바는 매한가지이며, <거울>이나 <잠입자>에서 흑백에 다름 아닌 갈빛 미장센과 이후 색채로의 전향은, 흑백과 컬러영화를 오가는 매체적 움직임을 연상케 한다.
*새피아톤과 채색
이러한 연출의 의도는 찬란한 자연광이 절대자가 하사하는 구원의 빛으로 읽어낼 수 있을 <이반의 어린시절>에서도 암시되지만,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결말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강조된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결말은 내내 흑백으로 전개되던 연출이, 신앙심과 믿음을 회복하며 루블료프의 찬란한 이콘화의 색채를 드러내는 연출의 전향으로 마무리된다. 흑백으로서 포착되는 시베리아에서 일어나는 인류의 시련들과, 그러한 시련들을 이겨내고 신앙심을 지켜낸 구원의 시간으로서 색채의 시간은 타르코프스키의 종교적이고도 중세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중세의 이콘화, 모자이크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에서 포착되는 주요한 미의식의 특징은 바로 찬란한 색채에 다름 아니다. 중세에서 색채와 빛이야 말로 그들이 믿는 절대자의 전지전능한 축복, 하나님의 영적 위엄에 상응하는 것으로, 자애로운 그가 인류에게 하사하는 찬란한 선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한 빛과 색채라는 절대자의 선물은 예수의 일대기나 순교자들의 희생 속에서 대비를 이룬다. 그러한 일대기나 희생들은 주로 투박하고 금욕적으로 표현되며, 형태적으로는 조야하거나 심지어 그로테스크하게도 표현되지만, 그러한 역경을 이겨내면 결국에는 빛과 색채라는 구원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 종교와 하나 된 중세적인 미의식의 가장 큰 특징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중세적인 미학을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속 색채의 전향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한된 조명에서 무한대로 쏟아지는 찬란한 조명, 흑백에서 찬란하고 풍부한 채색으로의 전향이, 바로 영화의 성인으로서 타르코프스키가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중세의 미의식에 다름 아니다.
*롱테이크, 절대적 시간
다음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주요한 연출적 특징 중 하나인 롱테이크를 살펴보자. 롱테이크의 가장 큰 의의는 감상자의 현실 속 시간과, 영화 속 시간을 동일시한다는 그 '시간성'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러한 롱테이크와 시간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지론이 그의 저서 『봉인된 시간』에서 드러나며, 그의 예술론을 읽어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편집의 예술에 다름 아니다. 영화 속 러닝 타임에 다름 아닌 시간은 현실 속 시간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영화 속 시간은 몽타쥬를 통해서 연대기순을 따르지 않고 비선형적으로 뒤죽박죽 뒤섞여있을 수 도 있으며, 방대한 시간이 짧은 시간 하에 압축되고 축약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은 짧은 시퀀스들의 연속으로 이뤄진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영화 속 시간은 슬로우 모션 및 정지된 시간, 비이성적인 시간 등 현실 속 자연적인 시간과 거리를 두는 감독 각각의 주관적인 시간들이 두드러진다. 허나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은 롱테이크 때문에 현실 속 감상자에게서 흐르는 시간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기수들에게서 보이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롱테이크와는 분명 다르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감독들에게서 롱테이크 속 시간은 객관적이라면, 타르코프스키의 롱테이크는 비교적 자신의 주관이 많이 묻어난 연출에 다름 아니다.
*정교도의 신앙
이러한 자기 색채란 곧 신앙이 묻어난 시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실 흑백시기의 연출만 하더라도, 롱테이크가 두드러지지 않는 <이반의 어린시절>이랄지, 롱테이크가 보다 현실성을 띠었던 <안드레이 루블료프>같은 경우는 리얼리즘으로 볼 수 도 있을 테다. 허나 컬러영화로의 전향 이후 그의 롱테이크로 포착되는 시간들은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 이상향 들이 기묘하게 교차되고 뒤엉켜있으면서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줄곧 이어지는 것은 뒤섞여 있음에도 분명 한 인물의 일대기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연대기적인 시간과, 짧은 숏들로 분절되고 나뉠 수 없는 장엄하고 탄탄한 시간성을 드러내는 롱테이크라는 연출이다. 우선 전자의 경우에는 일련의 리얼리즘과 일맥상통할 수 있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시간론은 영화 속 시간과 실제 시간과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영화 속 시간과 감상자의 시간과 차이를 두는 일반적인 영화문법과는 차이를 둔다. 영화 속 시간도 감상자의 시간도, 언제나 절대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므로 이들 간의 차이를 두지 않으려는 의도이자, 또한 조작된 시간은 현실 속 감상자들의 시간과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 속 시간이 우리의 삶과 쉽게 밀착되지 않는 것은, 그러한 롱테이크로 포착되는 시퀀스들이 우리의 삶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플래시백과 현재의 교차는, 시간이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동일하게 흐르고 있다는 바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환상이나 이상향의 영역 역시 절대자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결국 그의 공간이므로 시간은 균일할 것이라 보는 게 타르코프스키의 시선이다. 허나 하나의 시퀀스 내에 현재와 과거, 현실과 이상향 등이 뒤섞여 있는 일련의 신비 때문에 우리들의 삶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진다. 여기서 타르코프스키의 주관적인 시간이 묻어난다. 그러한 절대적인 시간 내에서 우리가 믿음을 회복한다면, 일련의 구원과 신비가 일어날 수 있다는 그의 신앙이 묻어난 시간에 다름 아니다. 그는 중세 및 근대의 종교화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에, 실제 인류의 곁에 흐르고 있는 절대적이고 균일한 시간을 부여한다. 우리에게서 불가능한 것, 허구로 여겨졌던 성화 속 신비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에서 가능한 것,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숨결을 부여받는다.
*자연
이러한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타르코프스키가 포착하고 싶어 하는 바는 러시아 그 자체이다. 종교성이 짙은 러시아의 대문호들이 시베리아를 냉혹한 종교적 시련과 고난의 장으로 설정했듯, 타르코프스키도 이 같은 시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독소전쟁에서는 어린 소년 이반이 전쟁에 동원되고, 중세에는 타타르족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으며,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구도 속에서 핵무기의 위험과 독재정부의 압제가 존재한다. 허나 롱테이크 속에서 포착되는 것은 암담한 시련 뿐은 아니다. 타르코프스키의 미장센에서 강조되는 것은 자연이다. <솔라리스>의 어초나 특히나 강조되는 바다, 그 이후 컬러작품에서도 강조되는 시베리아의 드넓은 목초지, 나무 등 그는 오색찬란한 자연을 시간성이 드러나는 롱테이크를 통해서 드러낸다. 그러한 롱테이크를 통해 포착되는 식물들의 경우에는 생명력을 강조한다. 그는 바람에 또는 물결에 의해 흔들리고 나부끼는 들풀들이나, 죽은 나무들을 주로 포착해낸다.
그에게서 식물이나 꽃은 만개한 젊음, 이로써 표명되는 짧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다. 그에게서 식물이란 죽음에도 살아나며, 풍랑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죽음 속에서도 살아나는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과, 시련을 이겨내는 의지는 곧 인류의 지향점에 다름 아니다. 또한 <잠입자>와 그 이후에도 줄곧 등장하는 개의 경우 다분히 기독교적인 변치 않은 믿음을 보여주며, 이는 단순한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결코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 충실한 개의 태도를 통해서 강조된다. 그리고 이러한 나무들이나 개들이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물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솔라리스>의 바다로서 상징되거나, 또는 <잠입자>및 <노스텔지어>속 기독교적인 정화의 상징으로서 사용된다. 즉 이렇게 타르코프스키가 포착하는 이 세계의 자연은, 시련 속에서 황폐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회복되는 끈질긴 삶의 의지와, 이를 통해 유실된 진리와 믿음의 회복가능성을 엿보는 희망의 장으로 인류를 충만한 자애로움과 생명력으로 감싸 안는다.
*시련
이러한 세계 속은 절대자가 부여한 시련으로 가득하다. 인물들에게는 과거 및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 또한 인물들에게 시련이 짊어져있다. 이러한 시련의 구도 중 하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자전적인 구도이자 물질계에 생부가 부재하고 마리아만이 존재하는 예수의 구도가 도드라진다는 것이다. 어린 그리스도에 다름 아닐 이반은 자신을 희생시켜 소비에트를 구원하며, 또한 성년이 된 그리스도에 다름 아닌 남성들은 진리를 찾아 헤매거나,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위험공간에 '잠입'하는 등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허나 이러한 희생은 언제나 개인적이거나,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희생>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공동체 전체가 희생되어야만 하는 시련, 남자주인공이 진리나 사명을 위해 길을 나서며 홀로 놓인 아이들과 아내 등 시련은 모두에게 부여된다. 이러한 시련은 기독교의 전체주의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련에 몸담고 있던 그의 사상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만이 구원되기 위한 시련이 아닌, 모두가 구원받기 위해서 모두가 짊어진 공동의 시련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 욕망
이러한 시련의 모습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인내하고 감내하라는 시련이 부조리한 형태를 띤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 사명에 희생되는 것은 남성에 국한되지 않고 여성 또한 포함되며, 이는 기독교적 여성상이 주로 강조된다. 기독교적인 여성상 속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여성상들은 주로 어머니이자 절개를 지키는 아내로서 등장한다. 언제나 떠나간 남성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남성들과 달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련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묘사는 중심인물로서 남성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거울>과 <노스텔지어>에서 강조된다. 그리고 남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반면, 여성은 감정적이고 욕망의 부름을 받는다는 플라톤식 도식은 줄곧 이어진다. <거울>에서나 <노스텔지어>에서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거나 남성에게 유혹을 행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눈에 띠지만, 타르코프스키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유혹을 뿌리치고 도덕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에 있어선 너무도 가혹하리만큼 수동성을 보여주는 탓에, 타르코프스키가 욕망에 대한 금욕성을 주장하는 것만 같고, 그에게서 욕망에 대한 생각은 도덕률에 파묻힌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전혀 부정하진 않았는데, 그것은 남성주인공이 유일하게 욕망에 의해 흔들리는 <솔라리스>에서 강조된다. 그것은 우리의 외피를 넘어선, 정신과 감정, 영혼을 서로 조응하는 욕망의 추구이며, 이렇게 상대를 위한다면 자신을 몸소 희생시킬 수 도 있다는 진정한 사랑의 형태를 그려낸다. 이러한 욕망은 공중을 부양하는 형상으로 주로 표현된다. 비로소 서로의 감정을 마주하거나, 도덕률을 지켜가며 욕망의 대상을 기다리는 성녀의 모습으로서, 고결한 욕망의 형태를 그려낸다.
*이상향, 구원
즉 타르코프스키의 여성에 대한 사고와 그녀들에 의해 펼쳐진 욕망의 형태는 다분히 고루하다. 허나 남성주체의 욕망이 펼쳐진 <솔라리스>로 절충을 해낸다면, 결국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르코프스키는 언제나 감각의 영역을 중시했다. 허나 그 감각이란 우리의 몸을 휘감은 물질의 관능성을 넘어서 정신과 정신을 감응하고, 이를 통해 영혼과 감각을 충만하게 만들며 확장되어야만 한다. 오히려 작금의 욕망이 물질에 귀속되어있고 이로써 서로의 모든 감각을 열고 조화를 이루는 감각의 관계는 흐려졌으며, 이에 욕망은 변질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 진정한 감각성이 복권된 시대로 그의 예술론을 끝맺음 한다면, 고난과 시련의 땅 시베리아, 그리고 이를 넘어선 전세계와 우주에서의 희생을 완수하면 비로소 영혼과 감각으로 충만한 이상향이 도래할 것이다.
그래서 그 이상향이란 명석판명하거나 합리적으로 온전한 서술이 불가능하게끔 묘사된다. 그것은 오직 오롯이 시각과 청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느끼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는 분명 종교적인 작품들을 연출하고, 이러한 작품들은 성화의 동시대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그 종교와 성화들은 더 이상 구시대에 메여있지만은 않다. 타르코프스키가 보여주는 구원들 중 하나는 종교가 억압했던 감각의 복권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 감각의 복권이란 도덕을 수반한다. 시련의 공간에서 이뤄지는 비윤리화를 타르코프스키는 언제나 삭막한 미장센으로 포착하지 않았던가. 비인간화와 부도덕함을 바로잡는 것 또한 시련의 일부요, 그러한 인간성의 세계가 감각의 복권과 함께 펼쳐진다. 타르코프스키에게서 이성, 감성, 욕망, 감각, 도덕 등은 모두 조화를 이뤄야만 한다. 그랬을 때 영혼은 충만히 빛나게 되며, 그 순간 우리에게서 구원은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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