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불: 1988년 이후> 전시 전경
이불 작가(1964년생)는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동시대 최고의 작가를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작가들 중 하나일 것이다. 설치 작품을 중심으로 퍼포먼스, 회화, 드로잉, 그리고 영상까지 폭넓은 작품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이다.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도쿄 모리 미술관 등 세계 여러 기관들에서 전시를 열며, 날카로운 사회 비판, 역사의식, 그리고 인본주의적 탐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강렬하고 도발적인 작품들을 선보여오고 있다. 리움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불 작업의 큰 흐름을 보여주는 150여 점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의 격동적인 사회·정치적 맥락과 함께하며 동시대적 작품들의 끊임없는 진화와 변주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체와 사회,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다양한 시각에서 탐색하고 미래로 확장시키고 있다.

(위)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 (Gravity Greater Than Velocity I). 2000(1999년작 재제작). 내부 일부
| (아래) 외부에서 동시에 상영되는 노래방 내 화면 영상
전시장 입구에서 바로 위치한 블랙박스에서는 거울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이 우리를 맞이하고 하고 있다. 이불의 다양한 작품들이 거울로 파편화되어 흩뿌려진채 가득 차 있는 이 공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전시장 가장 안쪽 새하얗게 서있는 1인 노래방 부스일 것이다. 하얗고 작은 우주선 같은 미래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은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서 수상한 작품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ABBA, 레드 제플린, 오아시스 등 한때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대중가요들을 직접 불러볼 수 있다. 노래방의 기원인 가라오케는 20세기말 일본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퍼진 오락 중 하나이다. 가라(허구, 空)오케(오케스트라, オーケストラ)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가라오케는 기계음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1인용 노래방은 코인노래방으로 인해 많이 친숙해졌지만 작품이 만들어진 19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생각하나다면 캡슐같은 외관과 더불어 비현실적인 공간의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미래적인 작품의 느낌은 공간안으로 들어서면 블랙코메디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익숙한 음악들이 흘러나오는 와중에 푹신하고 붉은 벨벳으로 둘러쌓인 공간은 해외에서 사용하는 관의 느낌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1968년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자 SF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이 영화는 인간의 진화와 기술, 인공지능과 우주에서의 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한된 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내면의 갈등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영화와 같이 이 작품도 현실에서 관람객을 과거의 향수가 가득한 공간으로 단절시켜 추억을 상기함과 동시에 기술과 인간의 관계와 그로 인해 발생한 인간끼리의 단절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비아 네가티바(Via Negativa). 2022(2012년작 재제작). 목재, 아크릴 거울, 양방향 거울, LED 거울, 우드 스테인, ‘의식의 기원’ 국문 및 영문판.
작가 및 BB&M 제공, (위) 내부 | (아래) 외부
거울의 방을 통과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지난 40여년 간 제작된 드로잉, 평면, 설치 등 이불 작가의 작품들이 집대성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빛으로 된 비를 통과하면 바로 앞에서 <비아 네가티바>를 만날 수 있다. 겉모습은 책으로 이루어진 병풍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두세명이 들어가면 꽉 찰 듯한 작은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거울로 된 복잡한 미로가 밖에서 보이는 것 보다 더 큰 공간을 만들고, 그 중심에 강렬한 빛의 무한대가 펼쳐진 듯하다. 작품의 밖에서 벽을 이루고 있는 종이들을 자세히 보면 수많은 글씨들이 써져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이는 <의식의 기원(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의 영어 및 한국어판 책의 낱장들로 이루어져있다. <의식의 기원>은 줄리언 제인스(Julian Jaynes, 1920-1997)의 책으로 20세기가 낳은 가장 의미 있는 학문적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대 인류 역사에서 의식의 진화에 대해 철학적으로 탐구하고, 초기 인류의 청각적 환각에 의존하는 무의식적 사고방식인 ‘양원적 정신(Bicameral mentality)’에 대해 소개하며 인류의 역사가 이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양원적 정신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의 목소리’가 되어 인류의 결정에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줄리언 제인스의 주장처럼 <비아 네가티바>도 내면 깊숙히 존재하는 의식을 찾아 헤매고, 찾아낸 의식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거울로 된 미로는 출구로 우리가 미로를 헤매고 있도록 공간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있다. 왜곡된 미록에서 나가는 수많은 방법들 중에서 단 하나의 길이 미로 속 비밀스럽게 위치한 산란하는 빛을 만날수 있다. 그리고 이 빛을 지나빠르게 출구로 향할 수 있다. 의식이 우리의 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 속에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을 마주할 수 있다.

몽그랑레시: 바위에 흐느끼다…(Mon grand recit: Weep into stones…). 2005.
폴리우레탄, 포멕스, 합성 점토, 스테인리스 스틸 및 알루미늄 막대, 아크릴 패널. (주)하이트진로 소장
전시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작품만 소개했지만, 이불 작가의 작품들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 역사와 미래, 기술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주제들을 복잡하게 엮어내 우리의 눈을 떼기 어렵게 한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격변 속에서 발전해 온 이불의 예술 세계는 관람객들을 끊임없이 성찰의 공간으로 이끌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시대를 초월하는 작가의 탐구와 도발적인 예술 실험들을 집대성하여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