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살핀 것처럼 문화적 기억의 차원에서 쓰레기 더미로서의 예술은 가장 잠재적인 기억들을 저장하는 보관소와 같다. 그리고 그 보관소에서 전시라는 기능을 통해 축적된 정보와 기억들이 끊임없이 재조합되고, 새로운 서사가 만들어진다. 이는 비물질적 기억의 차원에서 예술이 작동하는 방식이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물질로서의 예술을 생각해보자. 오늘날의 상품 경제 사회에서는 끝없는 소비와 유통의 순환 속에서, 예술 또한 동일한 조건 속에서 유통되고 소비된다. 빠르게 소비되는 일회성 제품과는 달리, 예술은 때로는 장기적으로 수집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소비 형태의 공존 속에서, 예술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오늘날, 소비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으며, 유통 또한 더욱 소모적인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 다양한 취향에 따라 크고 작은 물질들을 장기적으로 수집하는 문화 역시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양극화된 현대 문명의 물질 문화와 순환-수집 체계 속에서, 그리고 모든 분야에 생태학적 관점이 요구되는 지금, 예술품은 이 물질 세계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어떻게 순환하고 있을까? 예술이 단순한 소비재로 전락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계승해온 역할과 가능성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어떠한 새로운 미학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여러 의미의 쓰레기라는 존재와 인식을 넘나들며, 대척점에 있는 예술과 쓰레기의 경계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예술과 쓰레기의 경계: 무엇을 예술로 만드는가?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쓰레기, 산업 폐기물은 작가에 의해 발견된, ‘found object’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된다. 별다른 가공 없이도, 작가가 그것을 발견하고, 수집하고, 배열하는 행위로 개입한 것만으로 일상에서도 채택되지 못한 채 밀려난 오염된 폐기물들은 예술품으로서 지위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예술적 행위는 일상에서 탈락한 폐기물, 탈락물, 우리의 주된 경제 사회에서 경제적 가치가 없어 소외된 그 어떤 종류의 물질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가브리엘 오르즈코(Garbriel Orzco)의 베를린 도이체 구겐하임에서의 개인전 《Asterisms》 설치 전경
대표적으로 가브리엘 오르즈코(Gabriel Orozco)가 2013년에 베를린 도이체 구겐하임에서 진행한 개인전 《Asterisms》는 쓰레기와 예술의 경계 자체를 직시한다. 《Asterisms》은 도이체 구겐하임이 커미셔닝 프로그램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의 마지막 전시로, 조각과 사진으로 구성된 2부작 설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오르즈코가 뉴욕의 자신의 집 근처의 운동장, 그리고 ‘바하 칼리포르니아 수르(Baja California Sur)’에 위치한 보호 해안 생물권에서 직접 수집한 수천 개의 폐기물을 재료로 구성된 작품이다.1) 바하 칼리포르니아 수르는 아래 사진과 같이 태평양에 접해 있는 보호 구역으로, 바다를 건너 태평양 해류로 밀려난 산업 및 상업 폐기물들이 집적되는 집적지이다. 우리는 더 이상 쓰지 않는 물질을 쓰레기통, 매각지 등을 통해 쉽게 눈앞에서 치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물질은 쉽게 삭제되지 못한 채 한때 빠르게 유통되었듯 폐기가 된 이후에도 바다 공간 위를 빠르게 표류한다. 태평양이라는 넒은 바다의 반대편까지 순식간에 떠밀려 이동한다.

태평양에 접해 있는 바하 칼리포르니아 수르(Baja California Sur)의 위치
설치 전경에서 보이는 작품 중 바닥의 무수한 오브제들은 작가가 멕시코의 이슬라 아레나(Isla Arena)의 독특한 환경에서부터 시작한 작업이다. 과거에도 이곳에서 작업한 바 있는 오르즈코는 고래의 교미 장소이자 고래들의 무덤이며,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이곳을 뒤덮고 있는 막대한 양의 폐기물 사이에서 유리병, 전구, 부표, 도구, 돌 등의 다양한 오브제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이를 갤러리 화이트 큐브 바닥에 종류, 색별로 분류하고, 순서대로 배열하여 하나의 대형 조각 설치를 구성하였다. 그 뒤에는 각 오브제를 작가가 유형학적으로 분류하여 촬영한 대형 격자 사진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2) 수집과 배열, 그리고 촬영을 통해 무참히 쌓여져 있던 폐기물 더미의 일부는 “조각”과 “설치”, “사진”이라는 이름의 매체로 표현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이는 작가에 의해 ‘재활용(recycle)’이라는 새로운 순환 단계가 마련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제품 생산-소비-폐기-축적/누적이라는 상품 경제의 선형적인 구조와 단계 속에서 해류에 의한 무작위한 축적이라는 최종 단계에 와있던 물질들을 매체 그 자체로 재활용되면서 상품 물질이 생애의 차원에서 순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맞이한 것이다.
새로운 것으로서 쓰레기: 가치 평가의 문제, 그리고 재활용
보리스 그로이스는 자신의 저서 『새로운 것에 관하여. 문화경영에 관한 시론(Über das Neue. Versuch einer Kulturökonomie)』(1992)에서 ‘새로운 것’이란 독창적인 발명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였으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것들이 ‘재평가’에 의해 ‘재발견’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로이스는 가치의 재평가, 가치재정립을 하나의 ‘혁신’으로 보았으며, 혁신에 의해 새로운 것과 쓰레기는 하나의 순환 고리로 연결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그로이스는 ‘재활용쓰레기예술(Abfallkunst)’를 언급한다. 일상에서 소외되어 온 물질들, 온갖 쓰레기와 폐기물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새로운 쓰임을 찾는 것은 ‘해석’이다.3) 그리고 예술은 물질을 창조하는 작업인 동시에 특히 현대미술에 들면서 물질의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해석해내는 ‘인식론’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오르즈코의 작업처럼 실질적으로 그 폐기물을 매체의 기반으로 삼는 작가적 행위는 오늘날 상품 경제에서 새로운 순환 구조를 열어내는 ‘재활용’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인식에 의해 창출된 가치, 그리고 물질적으로 새롭게 재활용되어 작품으로 탄생한 미술품들은 쓰레기 상태일 때와 비교하였을 때 시장에서도 경제적인 가치를 획득한다. 그로이스는 문화적 가치가 상승된 것들은 이처럼 모두 상업화될 수 있으며, 상업화된 것들은 문화적인 가치를 다시 잃는 구조임을 설명한다. 그렇게 가치를 잃고 다시 일상적인 것으로 돌아간 후에는 다시 가치상승 할 기회를 얻는다.4) 이처럼 그로이스는 쓰레기, 경제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끊임없이 상승하고 하락하는 연속적인 순환 과정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그로이스의 관점은 오늘날 작가 작업실-갤러리 화이트 큐브/미술시장/미술관 수장고-일상적 공간을 순환하며 가치를 잃거나 획득하길 반복하는 예술의 순환과 그 지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연겨하여 마이클 톰슨(Michael Thompson)의 ‘쓰레기 이론’은 앞선 질문들에 유용한 프레임을 제공한다. 톰슨은 인간의 생산품, 문화, 아이디어가 가진 가치를 ‘한시적인/덧없는(vergänglich)’ 가치와 ‘지속적인(dauerhaft)’ 가치로 분류한다. 여기서 톰슨은 쓰레기를 아직 두 가치 중 어느 범주에도 들어있지 않는 것으로 보고, 근소한 변화 요인에 의해 사회적으로 재평가되고 가치가 급변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톰슨은 한시적인 가치를 지닌 사물이 쓰레기 상태에까지 그 가치가 하강해야 비로소 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5)

마이클 톰슨(Michael Thompson)의 『Rubbish Theory』 중 챕터 ‘Art and the ends of economic activity’에 등장하는 도식
마이클 톰슨은 사회학적 쓰레기 이론을 예술과 경제 활동의 관계에 적용하며, 예술이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가치 변동에 따라 유동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의 도식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좋은 예술(Good art)’, ‘일시적인(transient) 예술’, 그리고 ‘쓰레기 예술(rubbish art)’이라는 세 가지 상태 사이를 떠돈다. 예술은 처음부터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다. 한 시대에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반대로 한때 버려진 것이 후대에 들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다시 평가받기도 한다. 이러한 순환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예술이 일반적인 상품과 달리 완전히 폐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은 망각의 틈 사이를 떠돌다가 보존되고, 다시금 해석되며, 새로운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잠재적 자원이 된다. 이를 통해 예술은 선형적인 ‘생산-소비-폐기’ 구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순환적 변동 속에서 살아남는 독특한 시스템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예술과 쓰레기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예술 창작 행위 자체가 물질 순환의 구조를 혁신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탄생한 작품은 단순한 생산물이 아니라, 가치의 변동 속에서 그 위치를 끊임없이 바꿔간다. 전시장과 미술관 수장고, 컬렉터의 거실, 하얀 벽의 갤러리, 아무도 찾지 않는 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쓰레기 처리장까지—예술은 물리적 공간을 넘나들며 존재와 소멸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 물질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치 평가와 이를 촉발하는 예술적 행위인 것이다.
수장고라는 “노아의 방주”: 보존 관리라는 이름의 오염원
앞선 그로이스와 톰슨의 이론은 벌써 30-40년 전에 발표된 것들이다. 두 사람의 글이 발표되었던 1980-90년대 과거와 2020년대 현재에 감각되는 물질이 소비되는 속도와 유통의 편리함은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들의 이론이 제시하는 관점의 해상도를 높혀 이 시대의 속도감에 맞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특히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단순한 생산과 소비의 축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수한 ‘중간 지대(interim)’를 고려해야 한다.
예술 작품이 대중과 관람객들에게 노출되고 향유되기 위해서는, 혹은 소비재로서 컬렉터에게 판매되기 위해서는 보관과 유지가 가능한 여러 장소가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박물관과 미술관의 ‘수장고(收藏庫)’를 떠올려보자. 박물관의 수장고는 기존의 가치 평가 기준에 따라 ‘좋은 예술’ 혹은 ‘가치 있는 유물’을 수집하고 보존한다. 일단 수장고에 들어간 물질은, 전쟁이나 국가의 붕괴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사실상 영구적으로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남는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수장고는 철저히 인력과 예산에 의해 유지되는 궁극적인 첨단 과학의 저장소이며, 예술 작품의 생애 주기에서 최종적 정착지라고도 할 수 있다. 안전한 방공호와 같다.
구약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대홍수 전 노아는 최대한 다양한 종의 동물을 심어 문명을 보존하고자 했다.
마치 성경 속 *‘노아의 방주’*처럼, 수장고에 들어온 작품들은 전문가들의 보존 관리 아래 영구적으로 유지된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종(species)’처럼 보호받으며, 한 시대의 유산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오늘날 생태적 인식이 높아진 시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의미의 박물관은 또 다른 차원에서 “오래된 오염원’”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박물관은 원래 과거의 유산을 미래로 잇는 역할을 수행해 왔으나, 이제는 오히려 물질들의 원본 상태를 최상의 조건에서 유지해야 하는 보존 구역으로 변모할 위기에 처해 있다.6)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여 보호하고, 미래의 가치 상승이 예측되는 현재의 물품을 안전한 수장고에 보관하며, 그 안에서 자연스러운 부식과 노화를 인위적으로 방지해야 하는 의무까지 떠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영구적으로 보존할 대상을 선별하는 과정,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차원에서 특정 물건을 집 안에 들이는 행위조차도 더욱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 이러한 선별 과정은 결국 사물의 가치 평가와 해석에 따라 결정되며, 예술 작품 또한 이러한 문화적·경제적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선택하고 보존하는 과정 자체가 미학적 판단인 동시에, 생태학적 판단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예술품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 도구로서 새롭게 기능을 획득하여 활성화되거나, 전시를 통해 가치/무가치, 좋은 예술/쓰레기, 가치가 상승 중인 것과 하강 중인 것들이 뒤섞이며 재구성과 재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일관적인 컬렉션 추가 혹은 단순한 축적에 의한 해석의 확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였으나 발견되지 못한, ‘보관소’에 속해 있는 시각적인 물질과 그에 담긴 기억들의 재활용을 통해 새로운 맥락과 서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가치하다고 판단한 폐기물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 쓰레기는 단순히 영원히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 뿐임을 깨닫는 ‘놀이(play)‘가 요구된다. 물질은 축적된 채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환의 흐름을 타고 지구 반대편, 태평양 저편까지 여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환되지 못하고 수장고에 갇힌 물질들은 어떤가? 수장고에 입성할 당시에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사라져 가는 것처럼 그 가치는 실시간으로 하락하고 있다.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에서, 가장 절망적으로 죽음이 유예되고 있는 것이다. 값비싼 보존 관리 기술과 인력이 투입되는 수장고에 예술 작품이 계속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이런 생태적 위기 속에서, 무가치를 향해 조용히 죽어가는 물질들을 위해 무수한 에너지와 인공적 행위가 유지되는 것에 반문해야 한다.
그렇기에 특히 시각적 이미지의 힘에 기반한 예술품들은 순환 시스템에 올라타 계속해서 노출되고, 가치의 변동을 체험하며, 접근성이 높은 곳에서 다시 재생(play)되어야 한다. 또한, 다른 산업에서 무가치하다고 여겨진 폐기물을 순간적으로 가치 있는 전시품으로 전환하는 미술 산업의 역동성은, 오늘날 쓰레기의 존재를 통해 예술의 구조와 기능을 새롭게 사유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새로운 미학적 판단이 함께해야만, 오늘의 상황 속에서 예술은 단순히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적 의미 속에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모하는 유동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매끈한 아름다움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면 발견되는 것들
예를 들어 ‘폐물(廢物)’, 즉 상품 세계의 폐잔물(廢殘物)이나 탈락물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바라크(baraque 가건물)가 매매주택에는 없는 재질감과 존재감을 역설적으로 획득하듯이 우리 사회에서 삶의 질펀한 경험은 매끈한 쾌적함과 반비례한다. 이 사실은 현재의 가능한 경험이 실패나 일탈을 하나의 핵으로서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과 동시에 상품 세계로부터의 소외물과의 접촉 교섭이 우리 삶의 소외 형태를 인식시키며, 게다가 잠시 잠깐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는 것 또한 드러낸다.7) |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폐허가 된 도시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했다. 그 속에서 폐물(廢物)—즉, 기존의 상품 세계에서 탈락한 물질—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자원으로 그 가치가 재발견되었다. 폐기물들은 더 이상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긴급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재활용되며 임시 가옥을 짓는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하루 만에 도시의 구조와 가치는 완전히 바뀌었고, 이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역시 단 하루 만에 다른 방향으로 급변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의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우연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경험과 삶의 가능성을 지탱하는 것은 물질들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자재로 속성과 상태가 변화될 수 있는 물질들.
오늘날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는 것은 주로 갓 생산된, 매끈하고, 부드럽고, 광택이 나는 것들이다. 현대 미학은 이러한 속성을 기준으로 물질을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기준에 들지 못한 수많은 물질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소외된다. 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만 물러서서, 이 익숙한 아름다움의 정의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기존의 미학적 기준에서 벗어나 본다면,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멀리했던 또 다른 물질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길이 닿지 않았던 영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지고, 잊힌 재료들이 다시금 의미를 획득하며, 다양성과의 새로운 접촉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시각적 차원을 넘어, 생태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전환이 될 것이다.
결국 예술은 아름다운 것을 제작하고, 수집하고, 그를 공유한다는 기초적인 행위로 구성된 일련의 행위(performance)묶음으로 이뤄진다. ‘무엇을 다루는가?’에서 “무엇”이 아닌 “다루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며, 다뤄지지 않은 무엇을 찾는 행위가 예술의 핵심적인 축을 이뤄왔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어 온 것, 동시에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상품 경제 세계와 원리가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는 “쓰레기”는 현재 우리가 재해석과 재정립, 재활용을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잠재적인 물질이다. 예술로서 쓰레기, 쓰레기로서 예술을 구분하지 않는 사유의 재구성으로부터 “잠시 잠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발견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각주 1) 구겐하임 갤러리 웹 페이지, ‘Gabriel Orozco: Asterisms’, https://www.guggenheim.org/exhibition/gabriel-orozco-asterisms 2) 위의 글 3) 최은아, 「쓰레기 이론의 유형학」, 『독일어문화권연구』 23, pp. 222-223. 4) 위의 글, pp. 223-224.; Boris Groys: Über das Neue. Versuch einer Kulturöpkonomie. München 1992, S. 49. 5) 위의 글, pp. 226-227; Vgl. Michael Thompson: Die Theorie des Abfalls. Über die Schaffung und Vernichtung von Werten. Übersetzt von Klaus Schomburg. Stuttgart 1981. 6) Wolfgang Ernst, 「Arsenals of Memory: The archi(ve)texture of the Museum」, Mediamatic Magazine Vol.8 #1, 1994. 7) 오노데라 켄타(小野寺研太), ‘‘다양성’으로부터의 비판 정신: 곤 와지로의 도시 관찰에 관한 고찰‘, 티스토리 ’사막여우‘ 번역, https://sarantoya12.tistory.com/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