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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비평이란 무엇인가? -1 | ARTLECTURE

메타비평이란 무엇인가? -1

-메타비평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Insight/
by 안유선
메타비평이란 무엇인가? -1
-메타비평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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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글은 메타비평에 대한 관심을 파생시킨 비평에 대한 생각, 정확히 말하자면 비평 무용론(無用論)이 여전히 대두되는 현재 미술 비평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메타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에 다가서기 위한 시작점이 되고자 한다.

들어가며


이 글은 “메타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매우 큰 질문에서 출발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비평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한국 미술계에서 행해졌던 메타비평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무작정 학술정보 사이트에 메타비평을 검색했고, 미술 혹은 예술철학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논문을 찾아 읽었다. 몇 가지 논물을 찾아 읽으면서 필자는 메타비평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수많은 논의가 오고 가는 “메타비평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비평과 메타비평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은 “그래서 메타비평은 왜 필요한가?”등과 같은 끝없는 질문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메타비평을 향해 좀 더 작은 질문들을 던져보고자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신 왜 메타비평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했는지 되묻기 시작했고, 김홍기의 미술비평집 『지연의 윤리학』에 수록된 몇 가지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질문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곧이어 『지연의 윤리학』은 필자가 직접 전시에서 마주한 한국 동시대 미술작가와 작품에 비평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었음을, 저자의 비평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다시 바라보고, 비평에 대한 비평을 행하고자 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평이 탄생하기 이전에 비평할 대상이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비평 없이 메타비평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는 메타비평에 대해 관심을 갖기 이전에 내면에 자리했던 비평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게 되었다. 이 글은 메타비평에 대한 관심을 파생시킨 비평에 대한 생각, 정확히 말하자면 비평 무용론(無用論)이 여전히 대두되는 현재 미술 비평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메타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에 다가서기 위한 시작점이 되고자 한다. 


그동안 마주한 비평들


미술에 흥미를 갖고 있는 우리는 종종 전시장과 예술과 관련된 저서와 잡지 혹은 논문에서 작가와 작품에 관한 비평문을 마주한다. 이때 우리는 “비평이란 의미와 가치를 규명하여 관객에게 작품의 힘에 반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아서 단토의 말처럼 작품의 이해를 돕는 비평을 보기도 하지만 작품을 보호하고 변호하기 위해 맥락에 어울리지 않고 어려운 문장으로 이론을 나열하는 비평을 마주하기도 한다. 작품의 이해를 방해하는 듯한 이러한 비평은 ‘예술의 종말’ 이후 시기인 동시대 미술에 대한 두려움에서 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고, 여러 관점이나 방법론에 따라 미술을 바라볼 수 있기에, 작품에 대한 서술자의 시각과 시각과 생각을 관철시키기보다는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연구된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믿고 그 뒤에 숨은 것이다. 


이러한 비평의 문제점은 현대 미술비평이 안고 있는 난점과도 연결된다. 현대 미술비평은 제도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으로 텍스트가 권력을 상실해 비평의 힘이 위축되었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시대가 오면서 예술은 포화 상태를 넘어 끝없이 쏟아지고 있고, 이를 비평이 감당하지 못해 단순히 작품 해석에 그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전문적인 영역에서 다뤄졌던 정보들은 대중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비평이 전문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시대의 흐름과 어긋난다. 비평이 전문성만 강조하게 될 경우 미술을 비평이 전문성만을 강조하게 될 경우 미술을 감상하는 다수가 아닌 지식이 있는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한계를 갖게 된다.* 


비평의 한계에서 출발하기


앞서 언급한 한계를 지닌 비평은 오래전부터 위기론과 종말론에 휩싸여왔다. 비평이 무용하다는 의견은 설득력을 지닌 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필자는 비평을 무용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토가 동시대 미술의 비평은 역사적 서사에 의존하지 않고 작품과 관련된 개별 서사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현재의 미술 비평이 나아갈 방향이 있고, 가치 있는 담론을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평이 무용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계를 마주하고, 한계에서 대안을 찾을 필요가 말하고 싶다. 비평은 태생적으로 비평할 대상이 존재해야 하고, 제도의 막대한 영향력 아래 작품의 의미 해석만 이루어지기에 이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감한 선언과도 같은 태도가 요구된다. ‘야수주의’라는 명칭은 루이 보셀이 1905년 살롱 도톤에 전시된 마르케의 조각을 보고 “야수의 우리 속에 갇힌 도나텔로 같다.”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고, 문학평론가 권혁웅이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이란 글을 발표하며 한국 문학계에 ‘미래파’라는 어휘를 처음 선보인 것처럼 말이다. 이들의 시각은 시간이 흐른 후 잘못된 생각이라며 비판을 받거나 발표 당시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담론을 생산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또,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비평가의 태도는 작품이 먼저 존재하고 비평이 그 뒤를 따르는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만든다. 


*현대 미술비평의 난점에 대한 내용은 양정무,「비평의 재구성」,『한국예술연구』Vol.1,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 예술연구소, 2010. 장민한, 「아서 단토의 컴템퍼러리 아트에 대한 분석- ‘예술 패러다임’ 종말 이후에 나타나는 세 가지 특징」,『현대미술학 논문 집』Vol.23, 2019. 최태만,「현대 미술비평의 난점과 그 대안」,『현대미 술사연구』제11집, 현대미술사학회, 2001.을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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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유선_미술이론을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