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언어로 된 작품의 해설은 전시장에서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해설을 읽기 전과 후로 작품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져본 경험이 있나요?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 이러한 해설에 의존하게 되기 쉬운데요, 그럼에도 이런 글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어렵게 쓰는 걸까요? 과연 이 해설은 작품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을까요? 해설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는 없을까요?

여러 가지 감각적 속성들과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진 예술 작품을 언어로 묘사하는 것을 ‘에크프라시스(Ekphrasis)’라고 합니다. 이런 글은 꼭 필요할까요? 왜 예술가들은 이해하는데 충분한 정보들을 작품 안에 넣지 않고 해설을 따로 읽게끔 만든 걸까요?
영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우리는 유튜브에서 해석 영상을 보기도 하고 영화 평론가의 글을 읽으며 집에서도 감상을 이어 합니다. 그렇다면 유튜브의 해석 영상이나 영화 평론가의 글은 더 올바르거나 더 깊은 감상일까요? 영화 감독의 의도와는 다른 그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가 많이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1920
이제 작품 하나를 살펴봅시다. 위 그림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입니다. 다음은 이 그림을 보고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쓴 논평입니다.
<새로운 천사>라는 클레의 그림은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대상으로부터 막 벗어나려고 하는 천사를 표현한다. 천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는 바로 역사의 천사다.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의 흐름을 인식하는 곳에서 천사는 자신의 발 앞에 계속 쌓여가는 잔해라는 하나의 재앙만을 본다. 천사는 그 자리에 머무르며 죽은 이를 깨우고 부서진 것들을 되살리길 원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다. 세차게 끌어당기는 바람 때문에 천사는 더 이상 날개를 접은 채 버틸 수 없다. 천사는 폭풍에 이끌려 등지고 서 있던 미래로 밀려가야 하고, 그의 앞에 쌓여 있던 폐허는 하늘을 향해 더 높이 쌓여간다. 이 폭풍이야말로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발터 벤야민, 「역사 철학 테제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1940 |
미술 작품에 대해 이만큼이나 주관적인 해석을 본 적 있었나요? 아무래도 전시회에서 보기는 어렵겠죠. 너무나 주관적이니까요. 하지만 위 글은 쓰인 지 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미술 비평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이런 글은 예술 작품이 한 사람을 거쳐 언어의 형태로 번역된 것입니다. 보통 작가가 직접 쓰는 작가노트(Artist’s statement)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글은 작가가 아니라 큐레이터나 비평가가 씁니다. 그렇다면 작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이런 글은 작품이 전달하려는 바를 제대로 번역했을까요? 여기서 번역이란 무엇일까요?
넓은 의미의 번역
위의 실험적인 논평을 쓴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번역자의 과제>에서 “번역이란 원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번역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요?

한국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두 사람, 철수와 영희가 함께 산책을 하며 대화하고 있습니다. 철수는 “오늘 해가 쨍쨍하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영희는 “그러게, 오늘 산책을 나오길 잘 했어.”라고 답하지만 철수는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왜일까요?
철수는 날이 더우니 금방 산책을 끝내고 들어가자는 의미로 ‘해가 쨍쨍하다’라고 말했지만 영희는 ‘날씨가 좋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어로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번역이 일어납니다.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에도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번역학에서의 첫 번째 번역입니다. 두 사람의 언어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같은 한국어로 대화할 때도 오해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번역이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번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번역학에서는 이렇게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전환(translation)이라는, 꽤 넓은 의미의 번역까지 다룹니다. 한 음악가가 멋진 풍경을 보고 악상을 떠올려 기타를 연주한다면, 이것 또한 번역입니다.
같은 책인데도 여러 번역가의 번역본을 비교해가며 읽어본 경험이 있나요? 영화를 보러 갈 때 특정 번역가의 번역이라면 믿고 보게 되기도 하나요? 왜 그 번역을 더 좋아하나요?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대중의 질타를 많이 받는 번역가도, 초월 번역으로 인기를 얻는 번역가도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번역은 원본이 전달하는 의미 그대로를 ‘충실히’ 번역했을까요? 벤야민은 이런 언어 간 번역 또한 창작의 영역이라고 보고 ‘원작의 언어를 번역자의 언어 속에서 재현하는 일’이 번역의 과제라고 합니다.

예술 작품이 전달하려는 것
번역본의 모든 원작들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소설, 시, 극본, 수필과 같은 글은 무엇을 전달할까요? 시각 예술은, 세상의 모든 예술 작품들은 무엇을 전달하나요? 여기에 대해 벤야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예술작품도 인간의 주의력(Aufmerksamkeit)을 전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시도 독자를 위해, 어떤 그림도 관람객을 위해, 어떤 교향악도 청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이 전달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없습니다.
예술가들은 소풍 날 정원에 보물(이라고 부르는 종이 쪽지)을 숨겨 놓고 아이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선생님처럼 작품 속에 무언가를 숨겨 놓고 관람객들이 정답을 맞히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그저 본인들이 원하는 정원을 가꾸어 놓았고, 보물은 그 안에서 여러분 나름대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미술관의 해설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식견이 부족해서일까요? 글을 쓴 사람이 조금 더 친절했다면 좋았을까요?
애초에 예술의 해석에는 모범 답안 같은 것이 없기에, 큐레이터가 제시할 만한 올바른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소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현대 미술 작품 앞에서 어색해할 관람객들을 위해 중간에서 약간의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 주는 것이 바로 전시장의 서문이나 해설입니다. 아니, 이왕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려 온 거라면 딱딱하게 소개하기보다는 재미있게 긴장을 풀어주면 좋지 않냐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슨트의 해설, 설명문, 서문 등 언어로 예술을 설명하는 모든 것들은 앞서 기술했듯 예술에서 언어로 전환하는 일종의 번역입니다. 번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직역과 의역이 있겠죠. 직역은 원작자의 의도와 표현을 최대한 해치지 않되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의역은 번역가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많아 오해 또한 커질 수 있습니다. 예술에 대한 지금의 글들은 이런 초월 번역과 직역 사이에서 적정 선을 찾아가는 중이 아닐까요? 언제나 많은 예술 관계자들이 이 지점을 찾으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참고 자료 발터 벤야민(2008),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번역), 도서출판 길 길다 윌리엄스(2016), 『현대미술 글쓰기』, (김효정 번역), 안그라픽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