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사물들이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순간 사물은 객체나 대상이 아닌 세계의 일부를 이루는 주체가 된다고 생각해요" -필립파레노, 브릿지경제 인터뷰 中(2024)
2024년 기대작이라고 할수 있는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이현재 리움미술관에서 진행중이다. 전시장 곳곳에 헬륨가스로 채워진 물고기들을 띄어놓아 미술관 전체를 어항으로꾸며 놓고, 미술관 유리창을 오렌지색 필터로 붙여 놓아 미술 관람을 하는 시간을 노을이 지는 시간대로 만들어 놓은 작품 등 간단한 설명만 들어도 시각적 자극이 풍부한 작품 총 40여점이 공개된 전시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의 제목은 《보이스(VOICES)》이다. 소리. 영어전시명은 VOICES (소리들).
쉴새없이 눈을 자극하는 전시의 제목이 '소리'라니. 그런데 필립 파레노는 이렇게 말한다. '사물들이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순간이, 주체가 되는 순간이라고'. 그리고 세상에 끌려다니며 객체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립 파레노는 이 전시를 바친다. 전시 공간에 꽉 채워진 소리를 듣고 발화하여 이 세상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라고.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으라고 말이다.
그렇게 이 전시의 제목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 바로, < δA 델타에이>다. 전시공간 곳곳에 설치된 총 15대의 스피커를 통해 나오고 있는 소리 말이다. 이 소리들은 형체가 없는 유령처럼 미술관 전체를 돌아다니며 관람객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필립 파레노가 야외 환경과 기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해 새로운 언어로 변환하여 송출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외계 언어 같은 소리들을 한귀로 흘려버리고 말지, 아니면 그 소리를 받아들여 내 안의 다른 이야기로 다시 내뱉을지는 '나의 선택'에 달렸다.

●2.
"미술관은닫힌 공간이라고 느껴왔어요. 외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비싼 작품을 진열해 보여주죠. 막으로 둘러싸인 ‘버블’ 같은공간인데 여기에 틈을 내고 싶었어요" -필립 파레노, 문화일보인터뷰 中(2024)
전시장 메인 공간이기도 한 M2 지하1층으로 들어서면, 작은 눈사람 여러개가 녹아 내리고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이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이라는 작품은 장소를 바꿔가며 녹는다. 이 작품의 의도는 '미술관에 틈을 내고 싶다'는 그의 인터뷰에서 찾을수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현실세계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다는 미술관 내부의 공간은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다. 왠만한 사람들이 평생 일하고도 벌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들이 그 안에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립 파레노가 선택한 재료가 '눈'이었다.미술관이 아무리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서히 녹아 내리고 형체가 사라지는 '눈사람'이 만들어진 것이다.



●3.
“저는무엇을 하든 그것이 완결됐다고 느끼지는 못하는, 부유하고 방황하는 사람이에요” -필립 파레노, 브릿지경제 인터뷰 中(2024)
이번 전시의 인기작은 단연 <내 방은 또 다른 어항>이다. 전시장 곳곳을 떠다니는 물고기 모양의 풍선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풍선 안에는 헬륨가스가 들어가 있어 적당한 높이로 전시장을 헤엄치고 다닌다. 그럼 관람객들은 물고기 풍선 근처로 가서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는다. 최근 몇 년간 다녀본 전시 중에서 이처럼 모든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고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건 못본 것 같다. 그렇게 관람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 풍선은 전시장을 부유한다. 그리고 필립 파레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냥 부유하는게 아니라 방황하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완결됐다 느끼지 못하는 부유하고 방황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을 drifter, 부유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 이 전시장을 부유하고 있는 물고기들은 작가 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국적을 가진, 1964년생의 이 작가는, 여전히 자신을 부유하는 존재로 소개하지만, 이제는 '부유한다는 것'에서 부정적 의미를 걷어낸다. 부유하는 것을 완결이 되지 못한 것, 완성되지 못한 것 그래서 방황하는 것으로 부정적 표현했던 작가가, 이제는 완성되지 않았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완결되지 않았기에 모든 이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방황하고 있기에 어느 곳으로든 자유롭게 갈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에 공개된 40여점의 작품 중 완성되고, 완결된 정답이 있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 모든 작품 감상은 실시간 외부 환경 데이터에 의해 조금씩 변하는 <δA 델타에이>의 소리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눈으로 만들어진 것은 녹아 내리고, 풍선으로 만들어진 것은 고정된 자리 없이 떠다닌다.
그렇게, 이 안의 모든 것이 부유하는 이 공간에서 만큼은, 관람객들도부유하고 방황해도 괜찮다. 이곳의 사람들 표정을 보자. 부유하는 풍선을 보며 행복해하는 그 표정 말이다.


●4.
"필립파레노는 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 구현했어요. 이번 전시를 개별 작품을 집결해 선보이는자리가 아닌 통합적인 경험의 장으로 느끼셨음 좋겠습니다" -리움미술관 보도자료 中(2024)
이번 전시를 어디부터 봐야 하냐고 미술관 직원에게 물어본다면, 보고 싶은 작품부터 아무거나 봐도 된다고 답할 것이다. 전시의 시작과 끝을 정해 놓지 않은 전시, 메인작품과 서브 작품이 정해지지 않은 전시, 이것이 작가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필립 파레노는 작품 하나하나의 중요성보다, 그 작품이 모여진 전시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경험해주길 원한다고 밝혔다.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사람 한사람은 미색 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정세랑 책<피프티피플> 작가의 말 中(2016)
작가 정세랑의 책 <피프티 피플>은 제목처럼 한 챕터가 한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렇게 50명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는 이 작가는, 한 두명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의 문법을 깨고, 50명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을 만들었다. 주인공을 없앰으로써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필립 파레노 역시, 40점의 작품 모두가 주인공인 전시를 만들었다. 한 두점 작품이 메인이고, 나머지 작품이 서브가 되는 전시가 아니라, 40여점 작품 전체가 모여야만 하나의 전시가 만들어지는 그런 전시 말이다. 그중엔 유난히 눈에 띄지 않는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만든 문 손잡이 작품 <스노우 댄싱>도 있다. 어느 누군가에겐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작품 일 수 있지만, 어느 누군가에겐 이 전시 중 최고의 작품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누구 하나 주인공이 아니기에,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전시를 필립 파레노는 만들었다. 방황해도 괜찮고 부유해도 괜찮은 전시 그리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그런 전시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