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officially registered as a publication” - Fiona Banner
“나는 공식 출판물로 등록되었다.” - 피오나 배너
한 예술가의 등에는 13자리 ISBN 국제 표준 도서 번호가 새겨져 있다. 이 숫자들은 실제 책이 아닌 예술 작품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저작권과 출판에 대한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고찰이 담긴 책의 초상으로 볼 수 있다. 작가의 공식 활동명은 피오나 배너 아카 베니티 프레스(Fiona Banner aka The Vanity Press) 이다.
ISBN 0-9548366-7-7 Fiona Banner 2009
한국에 알려진 그녀의 작업들은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의 듀빈 갤러리 공간에 설치한 퇴역 전투기 두 대 해리어와 재규어(Harrier and Jaguar)에 대한 인상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배너의 의도를 담기위해 약간의 개조를 거친 전투기는 바닥을 향해 거꾸로 매달려 있거나 배를 드러내며 뒤집혀 있다. 이러한 구성은 마치 사냥 당한 짐승 또는 연약한 동물이 거꾸로 뒤집혀 있는 모양새를 떠올리게 한다. 뒤집힌 구도를 통해 전쟁무기의 이미지를 왜곡하며 마치 고깃덩이처럼 파괴적 기능이 빠져나간 거죽을 연상시킨다. 원래의 자리를 벗어나 비참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변형된 전쟁무기는 하찮은 사물이 되어버린다. 2021년 바라캇컨템포러리 갤러리에서 전시한 팔콘(Palcon) 역시 전투기를 모델로 제작한 작품이다. PVC 재질로 만들어진 팔콘은 바람빠진 풍성과 같이 바닥에 뉘여있으며, 천천히 호흡하듯 부풀어 올랐다 숨이 죽는다. 마치 짐승이 누워 숨을 쉬듯 혹은 꺼져가는 몸을 웅크리고 숨죽이는 듯이.
우스쾅스러운듯 측은한 모습으로 설치 되어있는 조각들은 인간의 욕망과 전쟁의 허무, 자연파괴와 같은 현재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슈들을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해리어 HARRIER AND JAGUAR, 2010
그녀의 초기 작업은 이미지보다 언어를 활용한 작업이 많았다. 초기 영상 작업은 갈등을 언어로 작품화한 것이었다. 언어를 통해서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녀에게 있어 단어는 설득적 방식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소재이며, 이미지에 좌우하지 않는 방법이다. 언어로 자신을 반추하거나 복잡한 이미지도 표현 가능하다. 언어가 그녀의 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 있어 그녀가 출판에 흥미를 보인 것 역시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는 언어로 작업 하면서 작업을 어떻게 패키지화 할것인가를 고민하다 출판의 형식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출판은 손쉽게 작업을 재현하는 방법이며 유동성을 가지고, 덜 배타적으로 작품 공유가 가능하다. 그래서 그녀가 설립한 베니티 프레스 The Vanity Press(허영 출판사)는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이자 작가 스스로를 나타내는 방식이 되었다. 작가는 스스로의 ISBN을 출판물로 등록했으며, 작품도 출판물로 등록하고, 작품인 책도 만들고 있다. 출판을 통해 생명에 대한 역사를 만들다. 출판을 하는 일련의 과정과 그 모든 행위들이 그녀의 자서전이 된다.
THE NAM, 1000 page paperback 28X 20.8X6.5cm 1997
작가는 다양한 매체와 시간을 넘나들면서 작품 속에서 소통을 말하며 그 한계를 실험하는데, 특히 소통이 불가능해지는 갈등 상황을 주로 탐구한다. 그 외에도 출판사 ‘배니티 프레스(The Vanity Press)’를 설립해 같은해에 1,000쪽 가량의 책 ⌈베트남 The Nam⌋(1997)을 출판했고, 배니티 프레스는 이때부터 줄곧 그녀의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THE NAM]은 여섯 편의 베트남 영화의 줄거리를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1,000페이지 분량의 책이다: 영화는 Apocalypse Now, Born on the Fourth of July, The Deer Hunter, Full Metal Jacket, Hamburger Hill 및 Platoon이다.
Gods with anuses [ISBN 978-1-913983-05-5] 2021 paint on rear view mirror 6.8x25x4cm
그녀의 작품 <Gods with anuses>는 자동차 백미러에 ISBN 978-1-913983-05-5 번호가 부여 되어있다. 이 ISBN은 출판의 경계를 뛰어넘은 예술적 표현의 현장을 엿보게 해준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예술과 출판, 그리고 미디어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예술이 다양한 형태와 매체를 통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ISBN번호는 일반적으로 책이나 출판물에 할당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피오나 배너의 작품에서는 이것이 자동차 백미러나 간이 의자와 같은 특이한 매체에 나타나 출판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출판의 형식이 전통적인 출판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예술 작품에 적용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출판 등록을 거쳐 정물을 ‘읽을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작품 제목 ‘항문을 가진 신들’은 다의성과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질병을 가진 신들 또는 전쟁과 관련된 신들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중적 의미는 작품이 가지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강조한다. Anuses는 라틴어로 질병, 전쟁 따위가 일어난 ‘그 해 사건’을 뜻하기도 한다. 이 독특한 출간은 작품의 공유와 유통에 관한 고민을 담음과 동시에 출판등록에 대한 허점을 이야기 한다.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이미지에 좌우되지 않도록 한다
초기작은 <아라비아의 로런스 Lawrence of Arabia>, <폭풍속으로 Point Break> 등 할리우드 영화와 엄청난 양의 베트남 영화들을 끌어와 그 대사를 다시 적는 ‘워드스케이프(Wordscapes)’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빽빽한 글자로 화면을 덮는 회화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녀의 작품은 종종 영화관 화면과 같은 모양과 크기의 단단한 단일 텍스트 블록의 형태를 취한다. 1997년, 그녀가 THE NAM을 출판했을 때, 그녀는 The Vanity Press의 출판사 이름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책, 물건 및 공연의 광범위한 아카이브를 출판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저작자와 저작권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배너에게, 출판 행위는 그 자체로 공연적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작품은 웅장함과 독점성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재현하며, 대신 장난스럽고 도발적인 형식을 전개한다.
피오나 배너의 작품과 출판 활동은 예술이 경계를 넘나들며 독창적으로 언어, 이미지, 출판의 상호작용을 탐구한다. 그의 예술은 단순한 관람이 아닌 우리의 인식과 감정을 동시에 겨냥한다. ‘해리어와 재규어’를 비롯한 작품들은 전쟁과 욕망, 자연 파괴와 같은 중요한 이슈들을 상징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풀어내며, 이는 출판물의 등록과 함께 예술의 본질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언어로 작업함으로써 이미지에 좌우되지 않는 표현을 찾고, 출판을 통해 작품을 공유하는 행위는 예술의 확장된 정의를 제시한다. ‘항문을 가진 신들’과 같은 작품에서는 ISBN 등록이 작품으로 등장함으로써 출판 등록과 작품 내용이 하나로 융합되어, 출판물의 의미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피오나 배너의 작품은 단순한 미술 작품을 넘어, 우리의 예술 경험을 뒷받침하는 사유와 심미안의 교차로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그의 다양한 활동은 예술이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소통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며, 언어와 출판이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출판 등록에 대한 허점을 강조하여 출판의 현실과 허구 사이의 갈등을 드러낸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물로 등록하고 이를 통해 예술작품의 공유와 유통에 대한 현대적인 고민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예술과 출판이 서로 교차하며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형태의 창작 활동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참고자료 ⌈위대한 여성예술가들⌋ 파이돈 프레스, 레베카 모릴, 2023 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2417365390 https://lleditions.se/collaborator/fiona-banner-aka-the-vanity-press/ https://www.printedmatter.org/catalog/9898/ http://www.fionabanner.com/ https://barakatcontemporary.com/ko/news/89-fiona-banner-s-pranayama-typhoon-at-the-59th-veni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