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Twitter

Artlecture Blog

Artlecture Post

Artlecture Band

Artlecture Main

무진無盡 시간의 찰나 | ARTLECTURE

무진無盡 시간의 찰나

-에피메테우스의 열다섯 번째 질문-

/Art & History/
by youwallsang
무진無盡 시간의 찰나
-에피메테우스의 열다섯 번째 질문-
VIEW 774

HIGHLIGHT


세상 모든 것이 시계를 기준으로 동일한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버티고 있는 시간과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의 무게가 같다고 믿는가. 고통의 시간과 사랑의 시간이 같은 길이로 흐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다른 감각의 시간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제 나이의 속도로 세상을 살고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평등한 시간을 불평등하게 사용하고, 고정되지 않은 기준으로 셈하는 주관적인 시간의 감각. 작가 남화연은 침묵하며 꼬여있는 하얀 끈과 목청 높이는 주식중개인의 고함과 인간의 욕망으로 채워진 시간의 주머니를 찬찬히 뒤집어 본다. 시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시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개미의 시간> 전시장 전경,

<리듬풍경RhythmScape> , 2015.9.1.~11.15, 경기도미술관

 


미술관의 가장자리, 야외 테라스를 마주하고 있는 창가를 따라 하얀 휘장을 드리운 공간이다. 하나의 시간에서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듯 길고 좁은 통로에 낯선 시간이 줄을 선다. 얕은 눈높이로 11장의 사진이 따분한 기운을 품고 있다. 시선의 사각지대 같은 바닥, 도로의 어떤 한 조각, 약간의 부스러기를 닮은 낙엽들, 잘게 다져진 빛과 함께 (딱히 색상을 찾을 이유가 없는 화면 속에) 선명한 흰 끈만이 공식 없이 꼬여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바라본 발밑의 풍경을 닮았다. 이리저리, 갈팡질팡, 오락가락, 우물쭈물... 매듭 없이 꼬인 끈이 시선을 끌어당긴다. 한 번도 기록되지 않은 풍경이다. 좁고 긴 통로를 통과하며 몸이 감지하는 시간은 멈춰선 사진 속 시간을 긁으며 스쳐 간다. 작가 남화연은 긁힌 시간을 꼼꼼히 기록한다.

 




<개미의 시간> , 2014, 사진기록, 27.5X34,

<리듬풍경RhythmScape> , 2015.9.1.~11.15, 경기도미술관

 


90센티가량의 흰 끈은 1분 남짓한 개미의 동선이다. 작가는 짧은 시간 동안 움직인 개미의 흔적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따라 흰 끈을 놓아두고 사진을 찍었다. 인간의 시간 틀에 찍힌 곤충의 시간. 이 곤충은 부지런함의 대명사로,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끊김 없이 움직인다. 하얀 끈은 운동의 궤적임과 동시에 한 생명에 관한 기록이다. 시간은 기록되고, 기록된 시간은 시각적 표현을 통해 형태로 드러난다. 작가는 짙은 관찰을 통해 움직이는 시간을 잡아 세웠다. 생물의 속에서 끌어 올린 선형의 기생충 같기도 하고, 누군가 흘리고 간 풀린 매듭 같기도 하다. 길을 묻는 누군가에게 건넨 얄팍한 약도, 그럼에도 잃어버린 골목에서 떠돌던 발걸음처럼, 시간이 생물의 내부에서 외부로 떨어져 나온 느낌이다. 시간은 서사를 만들고, 서사는 고정되기를 원한다. 기억되기 위해 멈춰야 하고, 기록되기 위해 세워야 한다. 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은-작가는, 수시로 시간을 세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서성거림의 순간에 점을 찍고, 촘촘히 찍힌 점을 선으로 연결하고, 연결된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선으로 사진에 고정된다.

 


<충사蟲師> 2이슬을 들이마시는 군락, 우루시바라 유키, 대원씨아이



우루시바라 유키의 <충사> 속 한 에피소드는 곤충의 삶을 살다 온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느 시절,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되어야 했던 어떤 때, 인간이 벌레에 휘둘리기도 하던 때의 이야기다. 외딴 섬마을의 어떤 이들은 삶을 위해 생신生神을 모시고 산다. 생신은 벌레가 깃든 몸으로, 인간의 시간이 아닌 벌레의 시간을 살며 마을의 안녕과 무탈을 책임지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는 벌레를 지우고 다시 함께하고자 충사-벌레 깃듦을 막거나 물리쳐주는 술사-를 부른다. 충사는 마을로 들어가 벌레의 정체를 알아내고 사람들을 치료한다. 그러나 다시 인간의 시간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마냥 허망한 얼굴로 멍하게 하루를 버틸 뿐이다. 응축된 삶, 짧기에 더 환하게 빛나는 벌레의 삶에 비해 인간의 삶은 아스팔트에 늘어 붙은 여름날의 껌처럼 지루하고 고단했다. 하루살이의 바쁜(!) 삶을 상상해 보자. 태어나 죽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뤄야 할 모든 것을! 숨을 쉴 때마다 새롭고, 무언가 생각하려 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항상 마음속이 가득 차있던 시간을 상상해 보라. 절대 같지 않은 시간의 감각, 그 낯선 감각을 몸에 들였다 내놓은 사람에게 더 좋거나 더 올바른 삶이란 어느 쪽인가.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인지, 더 옳은 삶은 무엇인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까. 더 나은 삶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눈을 떠도 단지 어제와 같은 현실의 연속이 기다리고 있을 뿐, 눈 앞에 펼쳐진, 목적도 없이 방대한 시간에 발이 꽁꽁 얼어붙는 삶이라는데, 사람들은 권태 속으로 잠겨버린다.

 

2015 아르코미술관 개인전 <시간의 기술 Time Mechanics>

 


사진 속의 걸음을 옮겼던 개미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개미의 평균 수명이라야 일개미는 1년 정도, 수개미는 고작 그 절반. 여왕개미 정도가 5년에서 10년이다. 인간과 비교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그러니 지금 보고 있는 개미의 시간은 한때 존재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느 개미의 흔적이고, 시간이다. 우리는 활발했던, 이름 모를 어느 개미의 생을 영정 사진처럼 마주하고 있다. 소식 없이 사라진 생명의 조문을 일부러 끌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욕망의 식물학>, 2015, 2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823

<아이러니&아이디얼리즘 IRONY & IDEALISM> , 2017.9.28.~12.3, 경기도미술관

 


원을 돌 듯, 8자로 비행하는 두 사람은 꿀벌의 춤을 춘다, 붕붕거림, 쉴 새 없이 떨고 있는 날갯짓, 이해 불가한 꿀벌의 몸짓, 무리에 대한 책임, 여왕벌을 향한 충성. 닿을 듯, 부딪힐 듯 춤은 이어진다. 이어서 소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격앙된 목소리, 목젖을 종소리 삼아 달리는 경주마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점점 더 높고 빠르게 치솟는다. 오로지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오르는, 등 떠미는 소리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심지어 부인하거나 일부러 고개 돌리고 싶은 소리가 후각을 파고든다. 자본주의의 꽃내음이다.

 


<꽃이 있는 정물>, 한스 볼롱기에르, 나무판에 유채, 1639,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셈페레 아우구스투스>, 작가 미상, 30.8X20, 종이에 구아슈, 1640년경,

미국 노턴 사이먼 미술관

 


17세기 급속도로 발전하던 암스테르담의 바람장사windhandel는 튤립 구근의 가격을 경쟁하듯 높였고 지금의 주식시장을 탄생시키며 광기 어린 투기의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욕망이 바람을 부르고 탐욕이 그 바람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인간의 광기가 그 바람과 함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춤을 추었다. 튤립은 태연했지만, 그것이 불러온 욕망의 광풍은 어쩌면, 동물보다 더 동물적이었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구근은 꽃잎의 변칙적인 색상과 형태로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튤립브레이크 바이러스에 걸린 희귀종인 이 튤립은 계획적 재배가 불가능했기에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욕망 한가운데에 섰다. 스스로 욕망을 만드는 동물과 다르게 식물은 동물의 욕망을 추동했다. 튤립은 인간의 마음을 들쑤셨고, 욕망의 식물은 스스로 연료가 되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욕망은 변덕이 심하고, 새로운 것을 탐닉하기에 가질 수 없는 것이라 판명되는 순간, 거세게 타오른다. 욕망은 생명체에 기생하고, 욕망의 숙주는 불타오르며 강렬한 생의 춤을 춘다. 그 움직임은 시간을 따라 기록되고, 그 시간을 기억하면, 역사가 된다.



2020 트레블링 코리안 아츠 Traveling Korean Arts 캐나다 <리듬풍경협력 전시



시간은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아들의 이름을 가졌다.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해 일정한 속도와 방향을 가지고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적인 시간, 크로노스Chronos. 그러나 끊김 없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묘한 분열을 감지한다. 일종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선택을 요구하며, 방향을 바꾸는 기회의 시간, 카이로스Kairos를 꿈꾼다. 시간의 틈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의 순간이다. 무한의 시간을 견디는 이유도 어쩌면 그 틈을 한번 메꿔보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은 아닐까. 틈을 살기 위해 영속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것. 폭발적인 욕망의 분출은 그 무게가 가중될수록 더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 순간의 참을 수 없는 삶의 희열일지 모른다. 욕망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아이러니.


작가의 작품은 꼼꼼한 기록으로 감정이 없고, 수집한 자료들의 집합으로 객관적이다. 그래서 작가의 화면은 노트 필기를 닮았고 현상을 베껴 놓은 지도를 닮았다. 되짚어 보면 시간은 무수한 욕망의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속의 틈새에 끼어있는 욕망의 결정은 시간을 가르고 휘둘리는 본능적 감각을 빛 속으로 내놓는다. 생각이 길어질수록 무의미해지는 시간. 무진無盡의 시간 속에서 찰나를 살고 사라지는 생물의 시간은 욕망을 가득 담은 채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를 뿐이다. 기록되고, 기억되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Donation: https://www.paypal.com/paypalme/artle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