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의 우리 그림

정선,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1738) 중, 월송정도(越松亭圖)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 바다가 저 멀리 있지만 우리의 삶을 위협할 정도의 파도는 아니다. 일본 화가 호쿠사이의 그림(가나가와~)처럼 파도가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가 섬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바다가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나무 숲이 간결한 필묵으로 묘사되어있다. 점점 짙어지는 잎을 묘사하는 파묵의 기법이 절묘하다. 그런가 하면 나무 둥치는 의외로 간결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겸재가 그린 그림 들 중 사뭇 특이한 점이다. 겸재는 강한 준법(皴法 - 산수화를 그릴 때 산이나 바위, 언덕의 입체감과 명암, 질감 등을 나타내기 위해 표면을 처리하는 기법)으로 산과 암벽을 묘사하여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박연폭포'와 '청풍계', '단발령망금강도'에 나타난 준법은 겸재의 특기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의 특기를 조금 줄인 대신 담묵(淡墨)으로 표현된 바다와 강과 야트막한 구릉이 비교적 아늑해 보인다. 물론 월송정 앞 쪽 바위 암벽은 이런 준법이 약간은 보이지만 점묘로 표시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겸재의 또 다른 면을 느낄 수 있다. 정말 작게 표현된 두 사람(하나는 말을 끌고 또 하나는 타고 있으니 엄격하게 말 한 마리 사람 두 명이다.)의 모습은 자연이라는 압도적인 풍경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그저 조용하게 보여준다.
현재의 월송정은 지금 이 그림보다 훨씬 더 앞쪽으로 옮겨 지어졌지만 당시의 월송정은 민가와 가까이 붙어 있어 사람들이 한결 더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화면의 아래쪽으로 흐르는 강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는 제법 넓은 개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니 다양한 어족 자원들이 어부들에게 잡혔으리라 짐작된다.
진경 산수화가 겸재로 인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던 이 즈음, 조선의 곳곳이 겸재에 의해 있는 그대로 옮겨졌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의 위대함만이 강조된 나머지 그림 속 당시 사람들의 구체적 모습은 대체로 생략되거나 너무 작아 그들이 입고 있는 복색이며 그들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물론 이것은 사상과 이념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17세기 서양 회화가 보여주는 그 시대의 정확한 모습이 지금을 사는 그들의 후손에게 얼마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지를 생각해보면 겸재의 위대한 산수화 앞에 지금의 내가 가지는 이 어리석은 욕심에 대해 정작 그림을 그린 겸재는 어찌 생각할까?

정선, 목멱조돈(木覓朝暾), 1741년, 비단에 채색
목멱조돈은 겸재 정선이 현령으로 재직하던 양천현(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바라본 남산(목멱산)의 해돋이(朝暾) 모습이다. 양천에선 남산이 정동(正東)이다. 겸재는 인왕산 밑, 지금의 청운동 근방에 살았다. 그곳에서 바라보면 아침 해가 낙산(현재의 동숭동 뒷산) 위로 떠오른다. 경복궁과 창덕궁 숲에 다 가려진 낙산의 일출과 탁 트인 한강(당시의 강서구는 허허벌판이었을 것이다.) 저 멀리 우뚝 솟은 남산 위로 솟는 일출의 느낌은 강렬했을 것이다.
목멱조돈은 겸재가 양천 현령에 부임한(영조 16년-1740년 초가을에 양천 현령으로 부임) 후 맞이한 첫봄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아직은 수양버들이 짙어지지 않아 잎과 가지가 성글어 보인다. 남산 밑은 더없이 아늑하고 동시에 아득하다. 한강 위에는 배 한 척이 유유히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그림의 시점은 지금의 한강 건너 강서구에서 바라보고 있고, 또 노가 보이는 위치로 미루어) 고기를 잡는 배인지 아니면 나룻배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봄이 깊어지려는 시기에 강 위에 배는 매우 시적인 풍경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그림을 친구인 사천 이병연의 시와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일설에는 사천의 시를 먼저 보고 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 어느 쪽이든 두 사람의 사이가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그림과 나란히 존재하는 사천 이병연(본관은 韓山, 자는 一源, 호는 槎川 또는 白嶽下. 조선 현종 영조 시대의 시인. 도연명을 매우 흠모하여 자연에 대한 시가 대부분이다.)의 시를 보자.
曙色浮江漢 (서색부강한) 새벽빛 한강에 미치니,
觚稜隱釣參 (고릉은조삼) 각 봉우리들 낚싯배에서 헤아려지네.
朝朝轉危坐 (조조전위좌) (저 봉우리들) 아침마다 돌아와 앉으면,
初日上終南 (초일상종남)*첫 햇살 남산 위로 오르네.
* 終南(종남)은 남산의 옛 이름 중 하나다. 북방에서 올린 봉화를 마지막으로 받는 남쪽 산이라 해서 종남산이라 불렀다.
낚싯배로 표현된 것을 보니 어쩌면 겸재는 시를 보고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 새벽이라는 느낌은 그림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이 그림이 비단에 채색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퇴색되어 겸재가 그린 직후의 느낌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사천의 시를 흔히 진경 시라고 부른다. 그림으로 묘사하듯이 그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인데 이 시만 해도 그림처럼 생생한 부분이 많다. 첫 구에 曙色(서색)이 천지에 스미는 것을 浮(부)라고 표현한다. ‘스미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도 많은데 부라고 쓴 것은 새벽의 느낌이 옷에 물감이 스미듯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순간 시공간 전체가 밝아 오는 것이어서 아마도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목멱조돈은 진경산수화지만 문인화의 느낌도 적지 않다. 겸재의 준법은 진경산수화 사이사이에 겸재 자신만의 감상과 시적 운율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된다. 이 그림에서도 남산 위의 소나무를 정밀하게 그리는 대신 오로지 농묵과 담묵을 이용 정상부에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간결하게 표현한다. 나머지 산들은 희미하거나 생략하여 진경을 그렸지만 좀 더 시적이고 감성적 접근에 치중하는 문인화의 특징도 잘 보여준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산 옆에서 나오는 일출은 겸재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는 떠 오르는 해를 강조하기 위해 화면을 붉게 칠하고 해를 능선 위에 놓거나 봉우리 위쪽에 놓아 일출을 강조했겠지만 겸재는 산 옆으로 살짝 모습을 드러내는 해를 그려 놓음으로써 그림을 보는 관람자에게 알 수 없는 시적 여운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겸재의 나이는 75세의 노년이다. 젊은 시절 그렸던 <금강전도>나 <박연폭포>의 힘찬 느낌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심계 선학(深溪仙鶴)’
언제부터 학과 신선이 연결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국에 도교가 널리 퍼지던 그 시절, 인간에게 상상과 꿈을 줄 수 있는 동물, 이를테면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동물 중에서 그 자태가 평화롭고 귀해 보이는 동물로 선택된 것이 아마도 학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학은 온몸이 고고한 흰색이다. 그러나 머리 꼭대기는 붉고, 이마에서 목까지는 검다. 날개는 전체적으로 희지만 안쪽 둘째 날개깃과 셋째 날개깃은 검은색이어서 날개를 접으면 꽁지가 검은색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크기도 매우 커서 날개를 펼치면 거의 2m 4~50cm를 넘는다. 이것으로 보아 학은 새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태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학은 평균수명이 거의 4~50년으로서 불로장생의 상징인 도교의 신선 이미지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학의 이미지는 신선과 겹쳐지게 되었고 신선이 타고 다니거나 또는 그 자체로 신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동양화에서 학이 그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가 그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학은 계급적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관복의 흉배에 새겨져 文臣을 상징하는 동물이 바로 학이다. 따라서 학은 도교와 유교적인 두 개의 이미지로 인식되어졌고 화가들은 그 두 가지 이미지를 그림에 활용함으로써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현실과 이상 세계의 알레고리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학을 이용한 것이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심계 선학'이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두 마리의 학이 깊은 계곡을 배경으로 묘사된 그림이다. ‘세속’과 ‘탈 세속’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만족시키는 학이라는 새를 통해 ‘은자의 아취’와 ‘벼슬아치의 품위’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조의 유명한 화가들은 대부분 궁궐에서 그림을 그리는 관료들이 많았다. 김홍도도 찰방(종 6품에 해당)을 제수받을 정도로 당시의 화가로서는 매우 높은 관직에 올랐다. 관료로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관급 그림, 이를테면 궁이나 관에서 요구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뜻이고 화가 자신의 흥취와는 무관한 그림들이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김홍도의 그림 대부분은 그런 관급 그림에 속하고 그가 그린 풍속도가 사실은 그의 의도대로 그린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관료적 이상’과 ‘도교적 이상’(신선처럼 깊은 산속 어딘가에 고요히 머무는)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학을 차용했을 것이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두 마리의 학은 모두 아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선계에 머물고 있는 신선처럼, 혹은 고위 관직에 올라 백성을 쳐다보듯 그렇게 두 마리의 학은 세상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1912
심전의 화풍은 그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장승업(張承業)의 화법을 주로 따랐다. 후기에는 남, 북종이 융합된 절충 양식을 토대로 원숙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이사훈을 필두로 동기창 등이 완성한 동양화의 화풍으로서 전문 화공들처럼 외면적 형사(形似 - 모양)에 치중하여 그린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이 북종화라면, 송나라 시대 선종 불교와 도교의 영향으로 마음의 모습이나 관념의 현현처럼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묵필로 담백하게 그리는 사대부 또는 문인들의 그림을 남종화라 칭하는데 안중식의 그림은 이 두 세계를 아우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탑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명절(설날로 추정됨. 왜냐하면 도소란 설날 아침에 마시는 소주를 뜻함 - 이견도 있음) 날 아침 벗들과 나라를 고민하는 풍경. 이때 이미 국권이 침탈되어 조선은 없고 일본만 있는 상황인데, 이렇게 편히 설날을 보낸 이들이 과연 나라를 걱정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인 이들 중에는 최린도 있었는데 나중에 친일파가 되는 것을 보면 이 모임도 썩 훌륭한 모임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그림의 풍경은 참 좋다.
각 그림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림책을 스캔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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