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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전시에 대한 단상 | ARTLECTURE

온라인 전시에 대한 단상

-2020년말과 2021년초의 부유하는 이미지, 텍스트들을 경유하여-

/Insight/
by 하재용
온라인 전시에 대한 단상
-2020년말과 2021년초의 부유하는 이미지, 텍스트들을 경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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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온라인 전시란 작가들의 포트폴리오식의 웹사이트 혹은 몇몇의 소규모 형태의 전시 또는 넷 아트라고 불렸던 웹 상의 부유하는 데이터를 경유하는 형태로 역사를 쌓아왔지만, 모든 것이 매개되어야 할 의무를 얻는 시대에 역시나 다시 재정의된다. 온라인 전시 역시도 무엇보다 신체적 공동성, 현존성을 상실하며 제의적 행위로서의 '전시 관람'이라는 의미도 망실된다. 이 글에서 천천히 드러나겠지만 결과적으로 온라인 전시가 경쟁해야 하는 대상은 코로나가 진정되고 나서 다시 열릴 것으로 기대되는 '물리적 공간에서의 전시'가 아니라 유튜브와 넷플릭스 혹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다름없을 것이다. 이 글은 2020년 말과 2021년 초에 인터넷에 산재한 4개의 '온라인 전시' 혹은 '미술에 대한 데이터 큐레이션'을 경유하면서 비대면 환경에서의 전시에 대해서 사유하려는 시도다.

매개된 것들


접촉이 가능하던 시대 인간은 항상 '매개'에 의해서 소통해왔다. 매체라고도 이름 붙이는 이 존재들은 중간 혹은 모호한 장소로 기호들을 끊임없이 '중개'해준다. 매개자 로서의 매체는 따라서 애초에 접촉을 그 속성으로 가지고 있지 않는다. 여기서 매개된 것들은 매개되기 이전의 대상들을 온전히 담고 있기 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든 '변환'되어야 했다. 과거에는 상징적으로 오늘날에는 '복제'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더 나아가 기술은 원본 없이 '내부'적으로 형성되는 그래픽과 소음들을 방출한다. 이 방출되는 것들의 원안은 누군가의 청사진 혹은 즉흥적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창작된 것들은 다시 '출력 장치'에 의해서 매개된다. 매체철학적 관점을 떠나서 일상적으로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호흡은 매개되지 않은 채, 다른 이와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하나의 신체적 공동활동이기도 했다. COVID-19이후 우리의 몸을 작동시키는 기초적인 신체활동은 매개에 의해서, 즉 가장 개인적인 방식으로만 작동하게 되었다.

시각예술이 항상 매개되는 것들에 대해서 떠드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물리적 공간에서 이미 이차적으로 매개된(작가가 만들어낸 작업들이 공간안에서 다시 분산, 설치될 때 기획자나 작가자신의 선택에 의해 작업은 다시 매개되기 때문이다.) 작품을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과 인쇄되거나 투사된 형태로 이차적(도판을 그대로 실을 때) 혹은 삼차적(전시 전경)으로 매개된 형태를 지각하는 행위는 얼마나 다를까? 아이러니하게도 마스크를 통한 호흡의 매개와 동일하게 전시를 볼 수 없을 때 물리적 공간이 아닌 상태에서 봐오던 행위가 '일반화'된다. 일련 뉴노말이라고도 부르는 이 일반화된 새로운 상황은 기존의 행위들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하는 동시에 변화된 세상에서 인간의 지각을 변화시키도록 매체에 의해 추동 된다.

미술을 이론으로 배울 때 많은 경우 작품들은 책과 웹 상의 도판의 형태로 지각된다. 작품들의 매체와 상관없이 종이표면과 스크린은 모든 이미지를 평평하게 소급시킨다. 이 평평함은 미술사라는 분과학문내에서 모든 이미지가 '다뤄질 수 있는’것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마술 같은 속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꽤 오랜 시간을 평평함은 회화와 직결되어 왔지만, 오늘날은 모든 게 평평하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 이전에도 크건 작건, 물리적이건 데이터 적이건 모든 대상들을 '납작'하게 인지해오고 있었다. 세계는 점차 납작해져 갔고, 이 납작함이 드디어 격리의 시대에 도약한다. 격리의 시대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적 관계성을 무력화하는 정치, 위생학적 조치에서 시작된다. 이 시대에서 인간이 모이는 장소들은 그 마술적인 특정성을 상실하고 기피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식당, 공연장, 전시장, 헬스장 또는 PC방과 같이 행위를 함께하며 서로의 현존을 지각하는 제의적인 장소들 혹은 일상적 공간과 유리된 특수한 장소들의 운영이 정지될 때 그 공동 제의는 채워지지 않은 개인들의 욕구에 의해 변화된다. 이제 행위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신체적 공동성을 상실하며 매체적 의미에서의 매개된 공동성만을 지니게 된다. 배달, 온라인 공연, 홈 트레이닝 등 행위들은 모두 개인화되는 동시에 분산되고 집중된다. 즉 납작해져 버린다.

길었던 서론의 끝에서 드디어 이 글의 주제가 단어로 등장한다. '온라인 전시'. 온라인 전시란 작가들의 포트폴리오식의 웹사이트 혹은 몇몇의 소규모 형태의 전시 또는 넷 아트라고 불렸던 웹 상의 부유하는 데이터를 경유하는 형태로 역사를 쌓아왔지만, 모든 것이 매개되어야 할 의무를 얻는 시대에 역시나 다시 재정의된다. 온라인 전시 역시도 무엇보다 신체적 공동성, 현존성을 상실하며 제의적 행위로서의 '전시 관람'이라는 의미도 망실된다. 이 글에서 천천히 드러나겠지만 결과적으로 온라인 전시가 경쟁해야 하는 대상은 코로나가 진정되고 나서 다시 열릴 것으로 기대되는 '물리적 공간에서의 전시'가 아니라 유튜브와 넷플릭스 혹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다름없을 것이다. 이 글은 2020년 말과 2021년 초에 인터넷에 산재한 4개의 '온라인 전시' 혹은 '미술에 대한 데이터 큐레이션'을 경유하면서 비대면 환경에서의 전시에 대해서 사유하려는 시도다.



온라인-비대면 전시와 웹사이트 특정성Web-Seit Specific



현재까지 월드 와이드 웹을 비롯해 네트워크로 칭해지는 공간을 지배적으로 점유하던 매체는 이른바 대중매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었다. 시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 이 매체들은 궁극적으로 자극뿐만 아니라 정보를 쪼개고 비틀어서 전달한다. 전자기기들이 소형화 됨으로써 이러한 자극과 정보의 파편화는 점점 더 가속화되어왔다. 이런 파편화된 세계에서 이미지는 산출 과정에 종속되기 보다는 전송에 더 얽매인다. 물리적인 장치와 선을 필요로 했던 전송은 오늘날 공기 중에서 떨어지는(에어 드랍) 상황 속으로 들어선다. 입력장치와 출력장치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병합되는 순간 그리고 단지 가상으로 여겨졌던 입력의 장소가 출력의 자리도 지배하는 순간에 정보들은 구현화 되지 않을 자유를 획득한다. 이들은 단지 입력되고 찍혀지고 녹음될 뿐이다. 입력 이후에 정보들은 저장장치안에서 영면에 들어가게 되며 인간들은 이제 이 데이터들을 구름위에 놓고 언제 어디서든 꺼낼 준비를 한다. 꺼낼 준비만 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진을 클라우드에 무한히 저장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낱낱의 사진들은 의미를 상실한다. 최대한 많이 찍고 여러 장면을 담은 다음에 어플리케이션이 추천하는 하루의 베스트 샷을 감상한다. 또는 보정의 길을 지나 선택된 장면이 전시된다.

월드 와이드 웹이 데이터를 거미줄 구조체에서 이동시키면서 순환시킬 때 이 순환은 곧 '열화 과정'에 가깝다. 데이터는 계속해서 깎이게 되는데, 이 깎여 나가는 부분은 곧 '재현되지 못한' 혹은 '매개되지 못한' 부분들이 된다. 이 부분들은 전통적 매체에서는 인간이 선택한 '결과'였다면, 이제는 통제 불가능한 '필수적인 과정' 자체로 변한다. 나아가 이 매개 불가능성은 매체에 대한 우리 인간의 흔한 착각을 전도한다. 인간은 매체를 '모든 것을 재현하거나 저장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매체는 많은 것을 포기한다. 이를테면 인터넷을 관통해 데이터를 전달하는 단계에서 매체들은 인간의 육체와 접촉된 현존성을 포기하게 된다. 반면에 그들은 현실로 매개되지 않은 가상적 중간상태를 획득하게 된다. 이들을 현실로 소환하기 위해서는 평면적으로나 입체적으로나 말 그대로 '인쇄'하지 않으면 안된다. 매체는 항상 무언가를 빠뜨리고 전달하기에 인간은 빠진 부분을 퍼즐조각 채우듯 자신의 것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이 퍼즐 맞추기는 오독과 남용으로 이름 붙일 수도 있는데, 오독은 그 자체로 새로운 가지를 뻗어내는 활동으로 변환된다. 온라인 전시를 보는 행위는 어떤 방식으로 오독 혹은 남용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기존의 전시와 새로운 방식을 비교해야 한다.

화이트 큐브, 블랙박스와 같은 개념들을 차치하고도 전시가 가지는 범위자체는 항상 특수한 것으로 규정되어왔다. 그 동안 온라인에서 무언가를 전시한다는 행위는 그 특수 행위에서 더 나아간 세부적 요소로 받아들여졌지 하나의 대안으로 선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외부 활동제한은 세계 도처에서 일상을 해체하고 재영토화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온라인 전시가 열리지 못하는 물리적 전시들을 대체하려 하는지 혹은 아예 다른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지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 제시되는 모든 종류의 개별 데이터들은 '웹 표준'에 맞춰진 채로 필터링 된 부호의 시각화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근원적으로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모두 신호의 수신과 관련되며, 이 신호들을 정보 처리 장치끼리 완벽히 이해할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 인간은 기계와의 소통에서도 여전히 '오독'과 '남용'을 일삼는다. 온라인 전시에서 데이터-존재자들은 모두 동일한 위상을 보유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기준에 맞춰진 시각화 혹은 청각화로 인해 강제로 인간적인 위상을 획득한다. 제일 먼저 공간성을 획득하는 것은 흔히 '웹 사이트'라가 불리는 것이다. 이 웹 사이트는 일종의 도화지처럼 데이터들을 그려내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영원히 그리는 감각에 닿을 수 없다. 오히려 웹 사이트는 코르크 보드처럼 데이터들을 탈착시키는 장소에 불과하다. 하이퍼 링크들로 연결된 사이트의 연쇄 고리 속에서 데이터들은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입력'되어있다. 데이터를 경유하는 예술을 볼 때 이를 잊어서는 안된다. 데이터 로서의 이미지들은 그려내거나 찍힌 것이 더 이상 아님을, 인간은 기계가 송출하는 시각화 된 데이터를 수신하고 있을 뿐임을.

결론적으로 웹과 관련된 시점에서 예술은 '웹 사이트 특정성'(Web-Site-specific)을 획득하게 된다. 기존의 장소 특정성이 주어진 장소와의 연관성을 완전 무결하게 떼 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대변되는 대상물들의 꼬리표로 변화하는 반면에 웹 사이트 특정성은 새로운 장소의 창출을 항상 요구한다. 그리고 이 장소란 코드의 기입을 통해, 다시 말해 부호화를 통해 문자와 도상이라는 시각적 환영으로 출력된다. 우연인지 혹은 필연인지 진행 과정 중인 현재에서 계측할 수 없지만, '반응형 웹사이트'가 이러한 '웹 사이트 특정성'을 더욱 강화한다. 이미지를 공개하는 행위, 즉 업로드하는 것은 물리적 전시와 다르게 타인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반응을 선험적으로 체화 한다. 반응은 '구성된 방식'으로 느끼도록 요구되는 '가변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 가변성이 웹 사이트 특정성아래에서 업로드 된 데이터들을 하드웨어적으로 호환 가능하게 만든다. 작품을 보기 이전에 이미 웹사이트가 개인들에게 맞춰서 변환된다. 온라인 전시는 따라서 홈 트레이닝이나 트래비 스캇의 '포트 나이트'에서의 공연과 같이 사용자에게 반응을 주입하기 위해서 그의 손에 혹은 눈 앞에 주어진 스크린의 크기에 맞춰 변화할 수 있다. 이러한 웹 상에서의 전시에 대한 가장 중요한 특성을 염두한 채 개별 사례들로 넘어가보자.



사례 분석




Girls in the quarantine




격리상황 속의 여성이라는 다소 직설적인 제목을 가진 이 전시는 이번 글을 작성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동했다. 먼저 전시의 서문에서 기획자는 이 전시의 형태를 코로나 판데믹아래의 '비대면'문화의 일시적 깜빡임으로 사라진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전시는 '전환'의 변곡점으로서 코로나 사태이전에 암묵적으로 묵음 처리된 여성과 매체의 관계성을 회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데이터들을 산출하려고 한다. 거칠게 말해 이 전시는 격리 상황이 여성에게 매체를 통해 언제나 강요되어왔고, 매개되어 왔음을 진술한다고 볼 수 있다. 매체가 본질적으로 대상들을 잇는 끈이거나 대상 사이의 소통을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소통은 불통의 반어가 더 이상 아니다. 매체와 신체성, 특히나 여성의 신체성 혹은 여성의 재현방식을 되물어 온 것은 문화학에서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진술들이 항상 '주변부화'되어 무시되었던 것을 재인식함으로써 성사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이 전시에서 회고하거나 기입하는 관계성도 마찬가지로 비대면 문화의 대두로 인해 더 크게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여성과 매체 간의 문제점보다 이러한 문제점이 웹 상에서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Girls in the quarantine'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먼저 '스크리닝'은 선정된 작가들의 구작을 재업로드한다. 이는 일종의 부호적 변환으로써 기존 공간에 전개된 작업들을 웹 상으로 전이시킴으로써 작업들이 외면화 하는 최소한의 물리적 끈을 소실시킨다. '프로젝트'는 작가들에게 제기한 두 단어(Isolation격리와 Intimacy친밀함)을 통해 촉발된 신작들로 웹 사이트 특정적으로 온전히 결합(권세정, 안초롱, 박보마)되거나 완전히 분리(양윤화, 이주연)된다. 개별작품이 함유하는 모든 의미를 이 글안에서 늘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작품의 의미나 분석을 최소화하고 전시의 구조를 중점에 두고 분석하려고 한다.

'스크리닝'에서 작가들은 앞서 말했 듯 이미 완성된 구작을 웹 상에서 재배치한다. 가변성이라는 웹 사이트 특정성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 요구되는 데이터의 형태는 '영상과 사진'이다. 지난 시간 전시장을 스치며 '접촉'했던 작업에는 손쉽게 항상 시각적으로 이미지를 스크리닝하는 하드웨어가 공간 안에 함께 존재했었다. 그러나 웹으로 전시를 볼 때는 그 어떤 물리적 매개체도 공간안에 주어지지 않는다. 주어지는 것은 데이터뿐, 이 데이터에 접속할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접속자다. 따라서 전시를 보는 행위가 시각적 접촉에서 시각적 접속으로 변환된다는 느낌을 '스크리닝' 섹션은 무엇보다 강렬하게 표출한다. 게다가 이 섹션의 작품들이 관계에 대해서 질의응답(권세정, 장서영)하고 신체성을 훑어내며(백수현) 매체를 관통하는 질문들을 언급(최보련, 박지원)한다는 점은 전시 자체의 대주제를 분절적으로 흩뿌려 놓은 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영상을 웹 상에 업로드했을 때 이 영상의 경쟁자는 다른 예술작품이 아니라 유튜브 영상이 된다. 전시를 보는 시간은 고정적이지 않고 역시나 가변적으로 변화한다. 전시창을 띄웠다 내렸다 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 꺼버리려는 충동 그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자하는 욕망을 잠재우면서 꾸역 꾸역 영상감상을 감내해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실 '스크리닝'이라고 명명된 이 섹션이 무엇을 스크리닝하기보다는 '스크롤링'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웹 혹은 앱 환경에서 영상은 텍스트나 다른 지시체를 요구하지 않아왔다. 그러나 '전시'라는 기존 문법을 잇는 시도에서는 여전히 많은 영상 데이터에 대한 '메타 데이터'들이 화면 위에 부유한다. 따라서 동물적으로 즉각 반응하게 되는 영상 매체 환경에 익숙한 인간에게 온라인 전시란 현기증과 도피욕구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신체성을 되돌려준다.

'스크리닝' 섹션과 달리 '프로젝트'에서 공개되는 신작 혹은 변환된 작업들은 먼저 넘버링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스크리닝'에서 작업들이 스크롤화 된 것과 대비되는데 여기서 숫자는 의미 없는 관례적 수식어일 뿐 의미를 내포하지 못한다. 접속자는 넘버링을 무시하고 자율적으로 새로운 하이퍼 링크 텍스트를 클릭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 섹션에서 작업들은 좀 더 상세하게 분석될 필요성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개별 작업들이 웹의 환경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업로드 될 것인지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데이터 업로드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스크리닝'에도 본인의 작업을 공개한 '권세정' 작가는 여기서 편지 혹은 블로그의 일기와도 같은 글을 단초로 그 사진을 보조하는 도판과 영상 데이터를 업로드한다. 격리 상황안에서 전시의 기획자에게 보내는 말은 그 자체로 작업으로 변모한다. 코로나 사태에서의 경험에서부터 자신의 작업실에 생겨나는 곰팡이를 넘어 '비바리움'이라는 형태의 생물군을 꾸려 나가는 텍스트 속에서 접속자는 납작한 공간이 아닌 삼차원 구조물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되새김질은 '양윤화'작가의 작업에서 더 심화된다. 이 작업 <루비와 블루(루비는 3살 된 갈색 푸들, 블루는 5살 된 말티즈. 루비와 블루가 우리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루비와 블루를 찍지 않는다.>에서 루비와 블루라는 강아지와 윤이와 료스케라는 사람은 무언가를 행위하지만 찍히지 않으며, 촬영자도 '대상'이라고 각본에서 각인된 존재를 화면안에 담지 않고 계속해서 미끄러뜨림으로써 역으로 강조한다. "윤이와 료스케가 문자메시지를 하는 동안, 시야에서 사라진 루비와 블루. 윤이와 료스케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루비와 블루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윤이와 료스케, 무대에서 사라진다."고 쓰여진 각본의 끝에서야 퇴장하는 '등장물'과 달리 화면안에는 이미 피사체란 생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생물들은 이미 촬영자에 의해 퇴장되어 있으며, 오히려 역으로 '공간'이 대비적으로 전면에 드러난다. 주변에 놓여있던 것이 '중심화'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안치 롱'과 '박보나' 작가의 작업은 웹 상에서 이미지 혹은 이미지를 지시하는 매개체를 공개한다는 행위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성공적으로 제시한다. '안초롱'작가는 계속해서 사진을 굉장히 쉽게 조작가능한 매질로 다루는데, 이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감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 핸드폰 사진앱에서 '사진'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다룰 때의 감각은 실제로 인화된 사진과는 달리 데이터 덩어리에 가깝기 때문에 작가가 전시 공간에서 사진들을 마구 흩어놓는다던지 작은 사이즈로 나열해놓을 때 마치 '사진'이라는 매체가 위상을 상실한 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사진이라는 매체의 작동 방식이 데이터적으로 완연히 변환 되어있으며 안초롱 작가의 작업 설치, 제시방식들은 이를 전통적 환경에 덮어씌우는 것에 다름없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다시 역으로 사진들 하나 하나에 초점을 맞추게 유도한다. 라고 명명된 작업을 위해 작가가 작성한 글을 단서로 보면 웹상에 공개되는 사진들은 각자가 보유한 스크린창의 크기만큼 보일 것이고 인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미지 데이터에 대한 인지는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그러나 이 미끄러짐이 온전히 물질세계에서 위치적인 혹은 경험적인 부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접속자가 손에 쥐거나 보고 있는 스크린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 작업에서 사진이 스크린의 크기나 해상도에 따라 다르게 송출되는 것은 결국 해상도와 데이터에 관한 무한한 '자유'와 '평등'같은 어리석은 말들을 종식시킨다. 동시에 작가는 사진들의 크기와 해상도를 각각 다르게 설정해 놓았다. 게다가 접속자는 사진을 클릭함으로써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 클릭과정은 일종의 독해방식으로 여겨지는데 오늘날 너무나 익숙한 아래로 내리는 방향성이 아니라 앞으로 튀어나오는 분절성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사진은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들을 그러모으는 파편적 매개로서 작동한다.

'박보마' 작가의 작업에서는 반대로 스크롤을 내리는 감각이 중요해진다. <오직 앞면만 꾸민 외관 광고: 소피 에툴립스 실랑 회사 섹스 컴퍼니의 로비에서>라는 작업은 데이터 덩어리로 구성 되어있다. 크게 분류해보면 이 작업은 스크롤의 끝까지 이어지는 창문을 포함한 배경 이미지와 접속자가 화면 위에서 드래그 해 움직일 수 있는 하이퍼 링크 텍스트들, 마우스를 움직이면 튀어나오는 퍼포먼스의 파편화된 피드와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퍼 링크 텍스트들은 한국에 있는 거대한 수직 타워들의 정보를 볼 수 있는 웹으로 이동시켜주는 하이퍼 링크이며 불쑥 튀어나오는 피드들은 이러한 타워에서 작가가 벌이는 활동을 보여준다. 접속자는 화면을 스크롤링하면서 타워 이름을 클릭하거나 옮길 수 있고, 그 와중에 튀어나온 이미지들을 보거나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해서 무엇인가 튀어나오거나 혹은 사라지는 상황 속에서 갑작스레 '현기증'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이 현기증은 수직성에서 기인하는데, 언제 끝날지 모른 채로 내려가고만 있는 상황에서 간섭하는 것들 때문에 집중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수직 타워라는 남근중심주의의 상징물은 현기증 나는 것, 귀찮은 것으로 재인식된다. 그리고 이 수직성에 대한 인식은 실제의 마천루보다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 보이는 없이 로딩 하며 내려가는 스크롤링에서 연원한다. 오늘날 우리는 스크롤링을 포기할 수 없고, 계속해서 파편화되고 무의미해진 데이터들을 읽어내고 있다. 이 작업에서 '박보마' 작가는 실제 수직 타워의 남근성과 앱 환경에서의 스크롤링을 모두 성가신 것으로서 무력화시킨다.

'안초롱' 작가가 하드웨어에 대한 역설적 인식과 '클릭'의 감각을 상기시킨다면, '박보마'작가는 소프트웨어 적인 인식과 '스크롤'의 감각을 상기시킨다. '클릭'과 '스크롤'이라는 행위는 대상에 접촉함으로써 인식하 고마는 인간이라는 유약한 존재의 특성을 다시 되새긴다. 한 번의 터치와 지속적 터치라는 차이점은 여기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한 이미지와 영상들은 접촉하는 듯이 '클릭'되거나 '스크롤링'되어야 작동하게 되는데, 여기서 접촉이란 불가능하기에 접속이란 말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접촉은 단순히 마우스의 버튼 혹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의 전자식 터치 인식판을 훑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마술적 행위로서의 접촉은 바로 접속을 위해서 행위될 뿐이다. 따라서 이제 인간은 접속하기 위해 접촉하며, 데이터를 작동시키기 위해 접촉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내가 접촉한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접속한 곳에 존재하고 있다. '프로젝트' 섹션의 작업 대부분이 웹 사이트 특정성의 가변성에 맞춰 작업의 생성 구조를 변경하거나 전시 형태를 변경한 것에 가깝다면, '안초롱'과 '박보마'작가의 작업은 그 자신이 표현되는 형태에 대한 진술을 항상 암시적으로 보유하고 있기에 자기환원적이다. 그리고 이 환원성은 작업이 작업이 되는 조건들을 망각하고 한낱 데이터와 등치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두 작가의 작업을 보기 위해 클릭하게 되면 한 번의 문을 더 거쳐야 하는 이를테면 검문소와 같은 팝업창이 나타난다. 이 팝업창은 두 작가의 작업을 예술이라고 증언하는 하지만 곧 한 번의 클릭으로 소거될 뿐이다.



ORGD 2020




'Girls in the quarantine'가 온라인, 비대면 혹은 웹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전시의 한 형태라고 가정한다면, 'Open Recent Graphic Design 2020'(ORGD 2020)은 조금 다른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온라인 활동은 '디자인'에 관한 것이고 그 이외에 다른 진술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ORGD 2020은 'Girls in the quarantine'에서 그랬듯 매체의 틈을 벌리지 않는다. 게다가 'ORGD 2020'은 전시의 형태로 작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활동 보고서'에 가깝다. ORGD 2020은 'ORGD TQTC(티키 타카)'와 '최적 수행 지대'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분리는 보고서의 성격을 결정한다. '최적 수행 지대'는 이미 수행된 혹은 수행되려 다 지연된 활동들을 시각화 한다. 여기서 방점이 찍힌 부분은 '이미지'의 공개 방법이다. 결과들에 대한 겉 껍데기로서 일종의 '스캔본'같은 이미지들은 검은 링위에서 부유한다. 'ORGD TQTC'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수행 상태에 놓여있는 것들을 시각화 하는 동시에 문자화 한다. 이런 경우 당연히 시각화는 제한적일 밖에 없고 따라서 이 수행들을 문자로 어떻게 조리 있게 설명하는지 따져 묻게 된다. 두 갈래의 선택지에서 필자의 경우 '최적 수행 지대'로 먼저 접속했다.

'최적 수행 지대'에 들어서게 되면 검은 링 위에 '결과물'에 대한 시각적 데이터들이 놓여 있다. 작업들을 통과하고 과일을 습득할 때마다 비어 있는 세계에 변화가 생긴다. 처음에는 수평선이 명확해지고 산과 땅이 나타나며 야자수가 자란다. 나아가 구름이 등장하며 기둥들이 세워진다. 재밌게도 모든 과정은 선행적 동작 없이 '튀어나오듯'진행된다. 마지막 과일을 먹으면 많은 과일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위에 거대한 과일이 떠있게 된다. 그리고 '편안히 머물러주세요'로 마무리 짓는 문구가 나온다. 하지만 도통 편안하지 못하다. 이 전시 보고서는 '최적 수행 지대'라는 이름의 표피적 느낌에 반대되게 최적화되지 못한다. 전시 초입에 이들은 '최적 수행 지대'를 일종의 개념어로 지칭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안전지대와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존재하는 위험 지대 사이를 점유하며, 이 영역에서 최적의 수행 능력을 이끈다"고 설명한다. 안전지대와 제한지대 사이에서 창작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최적화된 수행'으로 명명된다. 그리고 이 최적 수행 지대의 표피를 벗겨내면 나타나는 의미는 바로 불안했던 위태한 순간들이다.

검은 링위의 작업에 대한 납작한 지시물들을 마주하려는 접속자는 끊임없이 바닥으로 추락할 위험을 안고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추락이란 실패가 아닌 미끄러짐으로써 최적화된 수행방향을 조정해내는 일에 가깝다. 실제로 다시 위로 되돌아온 접속자는 다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이 행위는 결과물을 전시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현실에서 이미 해왔던 과정을 육체적(이 육체가 현실의 신체가 아닌 가상적 아바타일지라도 지난 수행의 시간을 동작으로 체현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육체적인 성격을 지닌다.)으로 간략화 하는 것에 가깝다. 아무래도 높은 질의 조작감을 선사할 수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도 여전히 동작의 방향성이나 반응 속도는 엉망처럼 느껴진다. 행동의 자유 또한 1인칭으로 고정된 시점에서 이동과 시선 방향 변경만 가능하다.

접속자는 시각적, 접속적 제한 조건아래에서 접속자는 개별 작업물을 자세히 보기위해 앞으로 전진한다. 위태한 링 위를 조심 조심 이동한 후 부유하는 작업물에 가까워질 때 접속자는 도통 이 이미지들을 자세히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접근하면 빛의 원에 도달하는데, 이곳에서 갑자기 전시된 작업에 대한 정보창이 튀어나온다. 따라서 납작한 이 작업물의 기호들을 가상세계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다.' 촉각적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접속자는 시각적 접촉마저 차단당한다. 가상세계에서 결과를 공유한다는 행위에서 이 공간의 구성자들은 '불가능'을 전제한다. 따라서 3D 가상에서 접속자가 '볼 수 있는 것'은 디자이너가 '이러 이러 한 작업물을 했다'는 작업과 행위의 결과에 대한 기호다. 마지막 작업이후에 최종적으로 마지막 과일을 습득할 즘에 접속자는 이 링이 우로보로스의 뱀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시를 다시 보는 것은 위태 위태하게 걸어온 그 길을 다시 되돌아 가거나 사이트를 닫고 다시 여는 방법으로 나뉜다. 위태한 길을 건너갈 것인지 그 길 위의 행적들을 모두 쉽게 리셋 할지 접속자의 선택으로 남는다.

'최적 수행 지대'와 반대로 'ORGD TQTC'는 일종의 스터디 활동 보고서임이 명확하다. 사실 이 결과물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그다지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이미 상징적인 방식으로 부호화 되었으며 공개된 이미지들 역시 상상의 영역에서 수행의 얼개들을 일종의 스크린 샷으로 변환시킨다. 그리고 이런 모든 '변환된 양태'들은 같은 공간인 웹 상에서 동일자로 나타난다. 그들의 차이란 데이터의 절대량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접속자는 이들이 도통 무엇을 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이해란 것은 현실에서 그들의 활동을 확인한다고 해도 보장되지 못할 것이다. 그와 다르게 온라인 상에서 공개된 활동 중에 있는 것에 대한 증거물들은 매개된 소통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증명할 뿐이다. 그럼에도 스터디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무언가를 했다. 접속자는 행위의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닌 행위를 했다고 상징화한 결과물을 보게 된다. 예비된 것으로써 몇몇 결과물들은 미결의 상태에 머물지만 그래서 더 직관적으로 '아직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반대로 접속자가 '최적 수행 지대'에서 마치 어떤 행위를 한 것처럼 체험하는 것은 사실 일련의 신호들을 입력장치로 보낸 것에 다름없다. 접속자의 신체적 행위는 버튼 누르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상적 신체는 여전히 움직인다. 따라서 이 경우 이 전시의 형태는 납작하게 깊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다르게 'ORGD TQTC'는 지극히 평평하다. 접속자는 디자이너들이 티키타카한 행위들을 읽고 보며 행위를 부호들로 지각한다. 여기서도 여전히 신체적 행위는 '클릭'에 머물지만 육화 된 체험은 아예 없다. 신체적 체험의 유무를 통해 접속자는 '결과'와 '진행 중'이라는 전시된 것들의 상태조건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최적화된 수행'으로 보인다.




전시 미분사




보고서의 형태로 나타난 웹 상의 시각예술 활동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전시 미분사'였다. 수학을 배울 때 미분과 적분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나누거나 합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분이란 어떤 것을 미세하게 쪼개는 것이고, 적분은 모으는 행위에 가깝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시를 미분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전시는 수량화 되거나 공식에 맞춰 계산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님은 자명하다. 따라서 여기서의 미분은 전시라는 사건 혹은 활동을 상세히 쪼개고 분석하는 행위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해석이라고 여기는 행위, 혹은 관람이라고 말하는 전시를 감상하고 평가하는 일은 이미 쪼개져 있는 혹은 펼쳐져 있는 전시의 장을 취합하고 그러모은다. 따라서 해석은 적분과정과 유사하다. 유의해야할 점은 수학적 엄격함과 다르게 미술에서의 미, 적분이라는 말 자체는 일종의 수사에 불과해진다. 전시는 하나로 뭉그러뜨려 설명하거나 딱 떨어지는 말로 평가할 수 없으며 다공적 혹은 다면적이다. 따라서 전시라는 형태의 활동 혹은 사건은 단순하게 쪼개거나 합칠 수 없다. 여기서는 전시와 관람자의 관계성, 기획자와 관람자 혹은 작가의 관계성 같은 많은 요소들이 뒤섞이며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나 해석이라는 칼이 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끈 같은 전시를 끊어 놓는다. 반면에 '전시 미분사'는 그 해석을 포함해서 전시에 대한 피상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데이터들을 모두 그러모으고 '펼쳐' 놓'으려고 시도한다.

'펼침'이라는 개념어는 '전시 미분사'가 활동의 단초이자 첫 소재로 삼은 '당신은 나의 태양'(토탈 미술관, 2004)전시에서부터 관철된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이다. 핵심적인 차이라면 '당신은 나의 태양'에서 큐레이터 '이영철'이 공간의 접힌 형태, 이를테면 이미 구성된 조건을 토대로 개념을 적용 하려한다면, '전시 미분사'는 아직 없었던 공간을 새로 창출함으로써 개념어를 도입한다. 이를테면 '전시 미분사'는 웹 사이트의 구조적인 형태의 핵심을 펼치는 과정으로 설정한다. '당신은 나의 태양'이 제한적 조건을 변곡점으로 삼아 창출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반면에 '전시 미분사'는 제한이었던 것을 가능성으로 삼는다.

'전시 미분사' 웹사이트에 접속하게 되면 단순히 표로 정리된 전시에 대한 데이터들이 나열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기획자의 글에서 부터 2020년에 새로 쓰여진 2004년의 전시에 대한 비평들, 그 당시의 글과 전시 서문과 전시에 대한 대담이 텍스트로 입력 되어있다. 텍스트 이외에 전시장의 작업과 전경사진들도 당연하다는 듯 포함 되어있다. 16년의 시차를 가진 텍스트들과 16년의 시간을 건너 업로딩되어있는 사진들은 3개의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거나 합쳐진다. 웹 사이트 전체를 꽉 채우는 이 표 형식의 자료들은 '클릭'을 조건으로 검은색으로 반전되며 활성화된다. 접속자들은 텍스트를 읽거나, 이미지를 보거나 혹은 영상을 재생하는 등 순번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스크롤을 따라 수직적인 계층대로 정보들을 활성화시킬 것이다.

기획자들이 이 웹 사이트에 '미분'해서 업로드하는 데이터들은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이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지나간 전시'에 대해서 분석하고 조사하는 이 플랫폼이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접속자는 첫 인상으로 이 활동이 '실제 전시'라고 가정하는 일정 기간 동안 어떤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두 완벽하게 담을 수 없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애초에 그러한 추모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웹사이트에 수직적으로 '병렬'된 자료들은 전시라는 행위가 이 정도의 후속 데이터를 양산해낼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애초에 기획자들은 '진짜 전시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데이터로 병치된 전시의 모나드들은 경험이 아니라 그저 자료화 되어있을 뿐이다.

자료화 혹은 매개화의 갈래에서 웹 사이트는 자료의 형식들을 다양하게 변주한다. 텍스트들은 이 웹사이트에서 과거의 전시를 데이터 껍데기들로 재구조화라는 상징적 방식으로 작동하며, 글쓴이들의 충돌하거나 공명하는 의견들로 전시는 더욱 알 수 없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를테면 전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접혀버렸는데 텍스트들이 이를 다시 펼쳐내는 것에 가깝다. 반대로 전시가 실제로 있었던 사건임을 최소한으로 증명하는 '사진들' 그리고 과거 전시의 기획주체와 참여자들의 인터뷰 영상들은 펼쳐진 논의들을 다시 접는다. 여기서 '접힘'이란 관련자들의 육체적 발화와 활동의 도상들을 점검함으로써 접속자의 지각에 재차 혼란화 되어가던 전시의 인상이 구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전시 미분사'는 이 전시에 대한 영상들을 '시간을 접는 말들'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전시 미분사'가 끌어올린 혹은 만들어낸 데이터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2020 가이드 투어'였다. 이미 지나간 시간 속 전시를 가이드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시 미분사'의 많은 기획자들이 '당신은 나의 태양'을 실제로 관람하지 못했음에도 그에 대해 설명하고 되새김질하고 있다. 그리고 가이드 영상에서 도슨트로 분한 이 기획의 참여자인 '권태현'은 전시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햇볕이 드는 입구로 이동하며 역순으로 설명한다. 이 영상 속에서 3D모델링으로 재구현화된 전시장의 모습과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공간이 병치되며, 과거의 전시 사진들도 가이드의 설명에 맞춰서 튀어나온다. 이 영상에서 도슨트는 단순히 전시를 더듬어가며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하는 설명은 영상 속에 지속해서 나타나는 3D 모델링과 전시 사진들을 위해 발화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이 영상이 '전시 미분사'가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가장 잘 대표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슨트의 행위는 그 자체로 지나간 시간을 인정한다. '전시 미분사'의 미분은 전시를 추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전시라는 활동의 핵심을 개별 전시들의 사례를 통해 접속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매개되지 못한 채 탈각 된다.




인류세 한국x브라질 2019-2021




공간적 지지대를 가지지 않는 집단에 의해 기획된 세 개의 결과물을 가로지르면서 '웹'이 공간성의 대응물 혹은 대체품으로 제시될 수 있냐는 질문이 'AI'가 장착된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냐는 말과 동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위의 세 '전시' 혹은 '비-전시' 활동에서 예술 작품을 공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행위로 다가온다. 흥미롭게도 위의 사례들과 반대로 강력한 공간성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일민 미술관'역시 온라인으로 프로젝트를 마련해 공개했다. 일민 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인류세 한국x브라질 2019-2021'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인류세'라는 지질학적 정의를 직, 간접적으로 이미지화 하는 한국의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전시는 총 3부로 구성 되어있는데, 1부에서는 총 6명의 작가들의 영상 작업을 '지뢰, 철, 장치'와 '도시의 유령들'이라는 두 개의 섹션으로 나눠 스크리닝한다. 이 스크리닝은 'Videobrazil'의 디렉터 솔란지 파르카스가 새로 런칭한 디지털 전시 플랫폼 'Videobrazil.online'에서 이루어진다. 이번 글에서는 총 3부 중에서 1부만을 다룬다.

'Girls in the quarnatine'에서 이미 그랬듯, 이번 글에서는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작업들을 세부적으로 분석하거나 요약할 수 없다. 거칠게 말해 실망스러운 점을 이야기하자면, 일민 미술관 사이트에 들어가면 서문에서 '현지화'와 '인류세적 풍경을 다루는 작업'이라는 두 단어가 모순을 발생시킨다. 먼저 이 전시가 어떻게 인류세를 현지화 시킬 것인지 뚜렷하지 않다. 단순하게 보면 '한국 작가'가 '인류세'를 다룰 때 그것이 현지화 되는 것인지 혹은 서구권에서 합의된 것이 아닌 동구권에서 이끌어내는 새 합의가 '현지화'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시 웹사이트로 이동하면 큐레이터가 자신의 기획을 설명하는 영상이 있는데 '조주현' 큐레이터는 영어로 발화하고 있다. 이 전시가 단순히 한국 관객만을 타겟으로 하지 않고 있기에 영어로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어디에도 한국어 자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지화'라는 모토를 내건 것과 다르게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한국인'은 기획자의 말이나 웹 사이트 전체에서 '적확한 정보'를 획득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 간과 되어있었다. '현지화'라는 말이 현지화 된 작품을 해외에 공개하는 것이라면 괜찮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인류세의 개념이 한국작가들을 관통해 어떻게 '가시화'되는지를 묻는다는 점에서 웹과 몇몇 작업에 '한국어 자막'이 표기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이는 '시각 예술 전시'에서 감각기관에 장애가 있는 이들이 의도되었든 안되었든 배제되는 아주 익숙한 관행으로 읽히기도 한다. 영상을 감상할 때 '포르투갈어'를 자막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어도 얼마든지 넣을 수 있었으며, 영어 또한 삽입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모순점은 '인류세적'이라는 형용사 그 자체에 있다. 인류세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얼만큼 인류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지질학적으로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이 개념은 쉽게 '예술'의 영역에서 소비할 수 있는 것인가? '인류세'에 대한 정의는 많은 토론을 야기해왔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의하는 바는 '인류세'가 실제로 존재하는 지질학적 층으로 가정하기보다는 인류의 행적 혹은 업보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인류세'의 가장 대표적 증거는 '방사능, 플라스틱 그리고 닭 뼈'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질학적 학문성을 상실한 채 '예술'의 영역에서 인류세란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을까? 환경보호, 생태학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자의 관계라는 여러 개념들이 '인류세'를 둘러싼 유령처럼 부유한다. 이 전시에서 공개된 작업들은 대부분 '인간'의 행적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반성적인 태도로 접근하면서 동시에 '인간' 자체를 재현하지 않으려고 한다. 6명의 작가들은 전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을 제작하는데, 각자의 작업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면서도 유사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모든 작업이 '말'과 '문자'라는 상징적 존재자를 통해 시작된다. 이 말과 문자는 작업을 여는 키워드로 작동하는 동시에 작업 속에서 '이미지화'되는 수동적 존재로 격하되기도 한다.

파트 1 '지뢰, 철 그리고 장치' 섹션에서 작가 '권하윤'의 작업 <489년>은 상대적으로 가장 처음 상영될 가능성을 가진다. (관람자에 따라 얼마든지 상영의 순서를 임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3D로 구체화된 풍경은 자신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발화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서 '진행'된다. 그러나 이 영상 작업은 절대로 DMZ의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거나, 발화자의 기억을 완연히 구체화시킬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작업 속 영상이 발화자의 발화과정을 선결적으로 '결정'해서 나타내기 때문이다. 작업을 보는 내내 관람자의 상상력은 소외된 채 구성된 이미지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소외과정을 말 그대로 '폭파'시켜버린다. 작업의 맨 끝에 구성 되어있던 DMZ의 모사풍경에 존재하던 지뢰들이 서서히 터지면서 화면 전체에 불이 넘실거린다. 이 불은 오늘날 남아있는 폭력성이라는 지뢰의 상징이 아닌 '과거에 사그라 든' 폭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불이 피어오르는 것은 시간을 되감는 행위로 보인다. 작가가 일차적으로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한 듯 행위 했다면, 작업의 끝에서 그 행위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송상희' 작가의 작업<그날 새벽 안양,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에서는 반대로 발화과정보다는 여러 곳에서 수집해 짜집기된 '텍스트'들과 '음악'이 촬영된 '영상'과 연합으로 서 접속된다. 문자와 음향 그리고 이미지를 각각 다른 영역의 정보매체라고 볼때, 이 작업에서 문자는 내러티브와 음향은 효과음과 이미지는 삽화와 대응된다. 이 작업은 마치 매끄럽게 흘러가는 재구성된 소설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작가는 영상 속에서 '무성 영화'의 자막처럼 등장하는 '문자'들을 직접적으로 이미지화 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연상 가능성을 보유한 장소와 시간'을 문자의 지지체로 내세운다. 즉 텍스트가 말하는 것은 이미지로 확립되지 못하지만 지속해서 미끄러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음향은 붙은 듯 떨어진 이미지와 텍스트를 포박한다. 다시 말해 분위기를 만든다. '지뢰, 철 그리고 장치'는 이렇게 역사와 허구에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질문들을 문제시한다.

파트 2 '도시의 유령들'은 반대로 일반적 상황 - 일상의 풍경에 내재된 '인류세' 혹은 '인간의 행적에 대한 업보'들을 늘어놓는다. '염지혜' 작가의 <미래 열병>은 '송상희' 작가의 <안양>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발화와 이미지의 관계에 직접 개입한다. 누군가의 말소리와 기이한 도시 풍경이 오버랩되는데 여전히 장면 장면들은 발화와 아주 느슨한 끈으로만 이어져 있다. 송상희 작가와 달리 작가는 이러한 장면에 3D 객체들을 배치함으로써 쓰여진 것과 촬영된 것을 '모델링 된 것'으로 묶으려 한다. 나아가 이 작업은 끊임없이 미래로 향하려고 하는 자본주의 아래의 열망에 의문을 표한다. 특히나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문'이 '무솔리니'의 '연설문'로 오버랩될 때 그리고 최종적으로 다시 트럼프에게 로 환원되어 'America make great again!'으로 종결되는 것은 미래를 가속화한다는 열망에 대한 작가의 의문을 꽤나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차재민'은 <사운드 가든> 작업에서 인간의 도구화를 '인간을 재현하지 않고' 보여준다. 인간의 발화와 나무가 옮겨 심어지는 과정을 접목시켜 현대 사회에서 인간과 나무가 어떻게 도구화 되는지 지속적으로 고찰하게 만든다. '상품화되는 나무'는 투자와 관리를 받아야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오늘날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관리 받아야한다. 이 관리란 곧 인간을 자본주의의 부품으로서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돕는 '심리공학'에 가까워진다. 심리상담이 '인간의 도구화 혹은 상품화'를 위해 복무하게 되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착취적인 양상이 작업 속에서 계속해서 간접적으로(말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반대로 '조은지' 작가의  작업은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기록한다. 그러나 작가는 영상 속에서 행위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목욕 당하는 소'의 반응을 기록한다. 이 '반응Re-Action'은 인간이 비인간존재자와 어떤 관계성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 관계성 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교감인지 착취인지 사유하도록 만든다. 마지막 '송민정' 작가의 <야생종>작업에서 다시 인간은 내러티브의 직접적인 화두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인간은 재현에서 소외 되어있다. 인간이라는 대주제는 '내러티브 속'에서만 회전한다. 작가가 가정하고 있는 세계에서 인간은 쉽게 전환되고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인간이 시각적 감각을 자극하는 형태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로그 기록'만을 남기는 '상징적 데이터' 형태로 재가공 되었음을 시사한다.

'인류세 한국x브라질 2019-2021'을 '온라인 전시' 기획의 측면에서 보자면 상당히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웹 사이트를 구축하고 전시하는 방향성에서 오로지 '스크리닝'만을 전략으로 선택했다는 점이 아쉽다. 작업을 온라인 환경에 업로딩할 때 전시장 안의 환경과 그나마 유사하게 만들 수 있는 매체가 '영상'이나 '사진'임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 영상 이외의 작업들이 제시되었어야 했다. 이를테면 오로지 영상만을 전시하려고 했더라도 'Girls in the quarantine'의 '박보마'와 '안초롱' 작가처럼 시각환경에 대해서 의문을 던질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인류세' 전시는 단순히 섹션을 나누고 해당 부분마다 영상을 업로딩한 환경에 그친다. 그러나 반대로 이 전시는 '큐레이션'이라는 맥락 자체에서는 꽤나 흥미로운 지점을 보유한다. 우선 이 전시에서 상연되는 영상들은 모두 '재현'이 아니라 '미끄러짐'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해당 영상들에서 '문자'의 소재 혹은 '말'의 주인으로 표상되는 '인류'는 모두 소외되어 있다. 재현에서 소외된 인류들은 오로지 '언어'의 영역에서 그 목숨을 연명하게 되며, 나머지 비-인간 존재자들이 재현된다. 따라서 '송민정' 작가의 내러티브 속 육신을 빼앗긴, 데이터 화된 인간은 이 전시의 모든 작업들을 관통하며 공진한다. 예술의 영역에서 인류세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은 소거되어야 했다. 이렇게 인간이 소거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인류자체가 상상된 지질학적 층위에 놓이게 된다. 이를테면 진행중인 지질학적 시기가 예술안에서는 이미 지나간 흔적처럼 변환된다. 인간은 자신의 행적들을 켜켜이 행성에 쌓아 올린 존재자가 되는 동시에 그로 인해 파멸에 이르게 된 어리석은 자들로 비춰진다. 예술에서 지질학적 층위를 어떻게 제시할 것이냐는 물음은 우문으로 종결된다. 이 전시에서 작업들은 지질학적 층위를 예술이 '미래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매개되지 못한 것들


네 개의 온라인 전시들을 가로지르며 살펴본 결과 온라인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담론을 펼쳐낼 공간을 구성하기 보다는 담론을 수용할 수 있는 매체-연합체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탐구하는 행위로 비춰진다. '흥미를 끌기 위해' 문자와 그림 그리고 음향은 공명되어야 만한다. 전시의 '기획 의도'들이 명료하게 개별적으로 전시들마다 입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전시들은 웹 사이트 특정성에 따라 작동해야 한다. 클릭, 스크롤 그리고 드래그는 걷기, 관조하기 그리고 사진 찍기라는 물리적 전시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태도로 재구조화 된다. 예술계의 제도들을 표준으로 삼아 작동하는 '현실의 전시'와 달리 '온라인 전시'는 웹 표준에 맞춰져 조직되어야 한다이러한 토대의 변화는 왜 온라인 전시가 웹 사이트 특정적인 형식으로 제작되며 유통되는지 말해준다. 나아가 이 온라인에서의 전시를 기획하고 발행하는 모든 과정안에서 이러한 웹 사이트 특정성은 웹 디자인 혹은 작업들의 배치나 작업 그 자체에 의해서 탐구되어야 한다.

'Girls in the quarantine'에서 우리는 여성과 매체의 관계성 그리고 매체를 조직하는 방식들에서 출발해 온라인 속의 접촉 불가성을 경유한다. 접촉 불가성과 달리 'ORGD'에서는 제도된 것들을 가상적으로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는 시선의 불능이 대두된다. 앞의 두 전시와 달리 과거 있었던 사건으로 서의 전시를 지지체삼아 '데이터'들이 '전시 미분사'에서 나열될 때 우리는 이미 이 전시가 지나간 시간 속에서 사라졌음을 인정해야만하고, 그 다음에 전시가 남겨놓은 흔적들의 아카이빙을 다시 더듬어 나가야한다. 여기서 감각의 상실은 데이터들의 연속을 통해 대체된다. '인류세 한국x브라질 2019-2021'에서는 핵심 키워드인 '인류세'를 촉발하는 동시에 전시 자체를 작동시키는 매체의 장비로서의 '소위 인간' 완전히 재현과의 관계에서 소외된다. 접촉, 시각성, 현실감각 그리고 인간의 재현이 불가능해지는 조건들이 가시적으로 이 네 개의 온라인 전시들에서 각각 외면화 되면서 오히려 우리는 다른 가능성의 조건들을 점검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불가능의 조건들은 온라인 전시가 진지하게 재고찰되는 이 시기에 물리적 전시가 보유한 현실성을 온라인으로 재현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통해 어느정도는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불가능의 조건들과 달리 (재현 혹은 매개)가능성의 조건들은 전시를 감상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조건들보다도 더 가변적으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항공기의 불빛처럼 반짝거린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불능성'과 '가능성'의 조건들을 통해 관람자가 온라인 전시가 매체의 종합이 아닌 또 다른 매체로서 인식하게 된다고 가정한다.

레디 메이드가 현실의 사물을 예술이라는 시스템 속으로 위상 변화시키는 일종의 '행위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결국 온라인 전시는 그 역으로 예술이라는 시스템이 현실의 시스템 안으로 엄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온라인 전시 감상은 굉장히 임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 개개인의 관람자가 전시 감상의 방향성과 템포를 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아닌 '관객'에 의해서 발생되는 위상변화는 곧 수신 혹은 해석과정에서 매개되지 못한 것들을 소거한다. 이 소거가 전통적 방식에서 작가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면, '온라인 전시'에서는 모두 개인들의 개별적 사건으로서 드러난다. 매개되지 않음은 곧 '선택'적으로 그리고 '임의'적인 방향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이미 말했듯 전통적으로 관람자가 '전시 공간'이라는 특수한 현실로 들어가는 것과 달리 온라인 전시에서는 '웹 사이트'가 관람자의 일상으로 던져진다. 나는 이 글에서 사례로 삼은 전시를 감상할 때 다양한 보는 방식을 시도했다. 노트북 모니터, 태블릿 PC, 스마트폰 그리고 별도의 모니터는 시각적 조건의 한계선을 그어줬고, 마우스나 정전식 터치 스크린은 촉각적 한계선을 구체화했다. 이러한 한계선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전시들과 달리 마치 현실의 전시 공간을 스크린 안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인양 척하는 전시들은 그 자체로 현실의 문법을 필사할 뿐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지 못한다. 즉 웹사이트 특정성을 위배하면서 온라인상의 이 아닌 현실의 공간을 모방하는 행위에 그친다. 가정에서 스크린을 통해 송출된 '현실의 모사'는 진짜 현실 앞에서 무화될 뿐이다. 따라서 온라인 전시는 기획단계에서부터 관람자의 접속단계까지 기존의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들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이러한 방식들을 우리는 넷 아트의 실패사례들로부터 꺼내 올 수 있을 것이다. / 하재용


     이미지 출처.

1.https://notyourtypicalnarcissist.com/GIQ/?fbclid=IwAR24_h46vxr4ZO9gMBbWrgkn20BEH1Mm4I8msv5VYuR5abwfAHsyNB8ugSE 

2.http://orgd.org/tqtc2020/ 

3.http://studyforexhibitionhistories.org/list?exhibition=1 

4.http://videobrasil.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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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