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비슷했지만 올해는 유독 연말이 다가오는 게 괴로웠다. 연초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틀어지고 밀려버리면서 자괴감만이 남았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이 끝나 버린 올해의 마지막을 조금이나마 무마해보고자 이것저것 들쑤셔 보아도 연말이라는 핑계로 늘어지고 말았다. 해의 마지막이 이런데 인생의 마지막은 어떨까. 스스로의 말년에 대한 회의적인 상상이 들기 시작할 때쯤 따뜻한 시선을 통해 새로운 다짐을 하게 만들어 준 두 화가가 있다. 안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Anna Mary Robertson Moses)와 잉게 룩(Inge Löök)이다.
모지스와 잉게 룩은 모두 여성 화가이지만, 이 둘의 주목할 만한 공통점은 다른 데 있다. 그들이 7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한 다작 화가들이라는 점이다.
안나 메리 로버튼슨 모지스 (Anna Mary Robertson Moses)
안나 메리 로버튼슨 모지스, Catching the Turkey, 1940
먼저 안나 메리 로버튼슨 모지스 (Anna Mary Robertson Moses)는 미국의 국민 화가로, 모지스 할머니 (Grandma Moses)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모지스는 한 번도 미술을 배운 적이 없으나, 101세의 나이로 별세하기 전까지 약 1600점의 그림을 그렸다.
모지스에게 그림은 새로운 도약이었다. 모지스는 원래 그의 남편과 함께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었다. 그의 남편과 자식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절염이 도지면서 그의 삶의 낙이었던 자수를 더 이상 놓을 수 없게 된다. 절망하는 대신 그는 자수 대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지스는 78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 시작은 그림엽서를 모작한 것이었으나, 점점 예전의 추억을 바탕으로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던 미국 시골의 그림을 그린 그의 화풍은 밝고 단순했다. 그러나 단순함 안에 숨겨진 따뜻함은 미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에 그의 그림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현대 미술관이 주최한 미술전에 전시되기까지 이른다.
모지스, Taking in the Laundry, 1951.
처음에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느지막한 나이에 시작한 미술은 결국 모지스를 지금껏 없었던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남편과 아이를 잃은 시골의 노인. 모지스를 수식하는 어떤 말도 그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지 못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는 황혼의 순간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 작은 시작은 그의 진솔함과 따뜻함으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의 도전이 그 스스로 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용기를 건넨다는 점에서 그가 미국의 국민 화가로 불린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잉게 룩 (Inge Löök)
좌, 우 모두 잉게 룩의 엽서 삽화이다.
잉게 룩(Inge Löök)은 핀란드 출신의 여성 삽화가,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잉게 룩은 모지스와 마찬가지로 70대 중반에 정원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삽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2003년 처음 할머니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온 이례로 현재까지 약 300개가 넘는 엽서 삽화를 그려왔다. 잉게 룩 삽화의 주된 소재는 그가 주로 일을 하는 정원의 자연과 그가 할머니들 (Mummot, 영어로는 Aunties라고 표현되나 핀란드 원어로는 할머니라는 뜻과 가까워 본고에서는 “할머니”로 번역한다. )라고 부르는 노년의 두 여성이다.
좌: 퀸틴 마시스, 그로테스크한 늙은 여인, 1525-1530. 우: 구스타프 클림트, 여성의 세 시기, 1950 .
잉게 룩은 이 할머니들 Mummot이라는 작품을 통해 늙은 여성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그린다. 지금까지 노년의 여성의 그림을 다룬 추함과 외로움, 늘어지고 생명력을 잃은 다수의 그림과 다르게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생명력이 넘쳐난다. 그는 할머니들에 대한 영감을 그의 삶 속,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이웃으로부터 받았다고 말한다. 나무 위에서 와인을 마시거나 테이블 아래에서 피크닉을 갖는 일들은 모두 그의 이웃과 함께 했던 일들이다. 그러니 그의 그림을 보는 게 단순히 즐거움을 넘어, 반갑기까지 한 이유는 노년의 여성을 삶을 향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과 누군가를 돌보는 의무, 즉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탈피해 오롯이 자신들만의 순간을 즐기고 있다. 지금껏 여성 (더 자세히 말하자면 노년의 여성)을 수식하던 전형에서 해방된 그들은 다소 철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게 룩의 그림 속 할머니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자유롭고 즐거워 보인다.
( 참고로 잉게 룩은 오로지 "여성"만의 우정을 그려웠다. 그 이유에 대해 잉게 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슴 깊숙이 느껴야만 하는 남자들 사이의 진정한 우정, 그건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어떤 무언가예요. 나는 그런 정신적인 공간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남자들 사이의 우정을 그려내는 과업은 내가 아닌 그 비밀을 여는 열쇠를 쥔 다른 이에게 넘겨야만 하는 일인 거죠.” )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잉게 룩의 할머니들.
이처럼 모지스와 잉게 룩, 두 여성 화가는 그들의 삶과 그림을 통해 인생에서 시작하기에 늦은 일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그들이 자신의 작품과 삶에 보내는 시선은 따뜻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어쩌면 그렇게 때문에 마지막의 순간에서 다시금 도약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어떤 후회와 절망감으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게 아닌, 열정감 생동감으로 남은 순간을 즐기는 이들의 열정은 회의와 냉소로 가득 찬 마음에도 다시금 열정을 불어넣는다. 모지스와 잉게 룩에게 미술이 그러했듯, 누구나 다시금 마음을 불태울 각기 다른 도화선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또한 모지스와 잉게 룩처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미 한 해가 끝을 향해 달려가도 여전히 우리가 시작해 끝을 볼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미루어 뒀던 책을 꺼내 마침내 끝까지 읽어 낼 수도 있고, 지금껏 궁금했던 음식을 하나 요리해 올해의 마지막 식사로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진부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다. [수풀 03]
그림 및 작품 설명 참고: https://www.inge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