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면 세상의 중심은 자연, 섭리 따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굴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다양한 정신적 도구를 통해 이제는 살아있는 것을 더 느끼려고 노력하게 되고 자극하며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종(種), 상태, 형태 등을 직접 마주하며 감정을 느끼는 행동이야말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주한 현상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을 인지할 때 그 현상은 삶의 서사가 합목적적이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주한 당사자에게 다시 돌아감으로써 삶의 목적의식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사로잡는 순간은 구체적이지 않은 형태로 매번 다가옵니다. 활동하는 표면의 모든 것들을 마주할 때, 그 순간을 사로잡는 소리, 질감, 물체 같은 가깝고도 먼 존재에 자극하며 반응합니다.
기억 속에 휘둘려 사는 우리는 존재하고 그것을 발로하기 위해 수많은 정신적 도구들을 활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류는 언어, 사고, 심리 같은 인문적 토대를 수 세기 동안 쌓아 올렸습니다. 또한, 할 수 있는 활동을 다양하게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정신의 도구’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정신의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고, 더욱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1).
더욱 깊은 생각을 하고 인간 활동에 물질적 도구를 넘어선 정신적 도구. 그 순간을 몰입하게 만들고 환희를 비추는 도구.
영감(靈感)이라는 도구는 예술의 한 근원으로 여겼습니다. 영감은 구체적이지 않은 형태로 나타나 곧잘 잊히곤 합니다. 누군가는 꿈속에서 영감을 얻고, 누군가는 일상에서 얻고, 누군가는 자연에서 얻기도 하며, 누군가는 타인(Muse, 뮤즈)에게 얻기도 합니다. 그 영감을 수확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원천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합니다. 인파 속에 영감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형체를 찾기란 어렵습니다. 실제로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일부 예술가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영감을 얻고자 사상 같은 일방적인 경험을 던지고 강요하며 오해 섞인 말 잔치를 벌이기도 합니다. 파멸이라는 결말은 얻는 예술가가 있으면 후대에 영원히 남을 이름을 돌 위에 새기는 예술가도 존재합니다.
영감이라는 도구는 형체가 없는데도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시초의 것이므로 많은 이들이 이것을 얻기 위해 분골쇄신합니다.
영감은 찰나의 빛과도 같습니다. 일부 예술가는 겸손하게도 예술을 창조해낼 때 마치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 넣어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영감의 ‘영(靈 신령 영)’은 신령 혹은 영혼의 준말로 신령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영감의 원천을 ‘신앙’으로 표현한 요제프 하이든은 <천지창조>를 작곡하며 신과의 영적인 교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제프 하이든은 작곡의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끝부분에 “하나님께 영광을(Laus Deo)”이라고 써넣기도 했습니다.
영감을 얻어 탄생한 예술이 나에게 더 나은 세계와 존재를 경험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영감이라는 도구를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54x37.5cm, 1918-1919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긴 목과 얼굴, 알 수 없는 표정 속 텅 빈 공허한 눈동자를 가진 한 그림. 어느 날 잔은 초상화에 왜 자신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는지 남편 모딜리아니에게 물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른셋의 모딜리아니와 열네 살이나 차이나는 열아홉 살의 잔은 열렬히 사랑하게 됩니다. 터울을 극복하고 잔은 모딜리아니에게 끝없는 예술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잔에겐 사랑이었고 꿈이었던 남편 모딜리아니를 병으로 잃은 상실감에 천국에서도 그의 모델이 되겠다며 임신 8개월 차인 둘째 아이를 몸에 밴 채 자살한 잔.
20세기를 대표하는 보헤미안 화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어느 화파에도 속하길 원치 않았고 자유로운 예술가로 남길 원했던 화가. 수많은 초상화와 누드화를 남긴 화가인 모딜리아니는 인물의 얼굴을 세로로 과장되게 늘어뜨리게 그려 누구도 흉내 내지 않은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사실도 허구도 아닌 무의식”이라고 말한 모딜리아니. 상투적인 사실적인 표현을 벗어나 추상적인 개념을 인물에 담으려는 시도는 당대 드물었던 특성이기도 합니다. 모딜리아니는 베르트 바이유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출품한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경찰이 압수했고 전시 기간도 단축되었습니다. 영감을 듬뿍 담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낮은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도 모자라 만성 질병에 허덕여 이중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모딜리아니가 앓고 있던 만성 폐결핵이라는 그림자는 얼굴에 더 깊고 넓게, 빠른 속도로 드리워졌습니다. 모딜리아니는 가난과 질병을 술과 마약으로서 달래주었고 도움을 받았던 자신만의 이 처방전은 둘을 끝내 가르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뮤즈인 잔 에뷔테른 또한 천국의 모델이 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합니다.
비극적인 죽음이 15년이라는 세월이 되기도 전에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재평가받게 됩니다. 과거보다 1,000배가 넘는 그림값에 친인척들은 무척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현상을 보지 못한 저승의 이들을 향한 이승에 발 못 뗀 자들의 한탄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자살>, 1920 / 잔 에뷔테른
예술에 감정을 매기고 판단하고, 견해에 반박하는 것은 인간만의 능력인데 가치를 틀에 맞춘다는 것은 현재에도 꾸준히 복잡다단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칸트는 “우리는 사물 자체(Ding an sich)는 알 수가 없고 우리는 오직 현상만을 알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행위에 관해서 인간은 오직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만이 진정으로 자율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한 명의 인간이 모여 군집을 이루게 되면 인간은 자신에 의해 완전히 자율적인 인격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2).
가끔 보면 세상의 중심은 자연, 섭리 따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굴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다양한 정신적 도구를 통해 이제는 살아있는 것을 더 느끼려고 노력하게 되고 자극하며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종(種), 상태, 형태 등을 직접 마주하며 감정을 느끼는 행동이야말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주한 현상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을 인지할 때 그 현상은 삶의 서사가 합목적적이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주한 당사자에게 다시 돌아감으로써 삶의 목적의식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 <판타지아 2000> 스틸 컷, 1999 / 제임스 알가 감독
영감의 도구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직접 마주하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감은 우리에게 가장 눈부시게 비추는 무언가를 주는 것입니다.
영감은 정신의 체험입니다. 정신적 체험은 때때로 의도하지 않은 감정을 줍니다. 삶에서 겪을 수많은 체험 중 하나인 음악의 리듬에서 나는 영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리듬은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였습니다. 이 음악을 애니메이션의 한 시퀀스에서 만나게 되기 전까지 살아가는 타인의 모습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과거 ‘랩소디 인 블루’를 많이 듣곤 했는데, 터키 피아노 연주자 파질 세이가 연주한 ‘랩소디 인 블루’를 참 좋아했습니다. ‘랩소디 인 블루’ 시작을 알리는 클라리넷의 멋들어진 쾌감을, 음악은 계속 자유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웅장한 음악에 대한 표현력은 <판타지아 2000>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정점을 찍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 <판타지아 2000>은 관람이라는 현상이 주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담았습니다. 디즈니에서 60년 전에 만든 영화 <판타지아>의 후속편으로 2000년에 개봉했습니다. 21세기를 축하하기 위해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 <판타지아 2000>은 1999년 12월 17일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처음 상영되었습니다. <판타지아 2000>은 클래식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형태로 1940년 작품인 <판타지아>와는 별반 다르지 않은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선 녹음 후 작화 방법으로 제작되어서 선정된 클래식과 궁합이 꽤 잘 맞습니다.
<판타지아 2000>은 철저히 예술성을 고려해 만든 작품으로 총 8개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토벤, 레스피기, 쇼스타코비치, 생상스 등 클래식 명곡들과의 조화로 그림에 가시적인 생명을 불어넣어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8개의 시퀀스 중 세 번째로 등장하는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는 1900년대 중반 미국 대공황 시절, 알 허쉬펠드의 화풍이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그리며 클라리넷과 함께 시작됩니다. 노동자, 실업자, 부자 등 스치는 타인들은 누구나 가진 사연을 품고 살아갑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현대사회에서 얻고 겪는 괴리와 우울, 무력 그리고 권태와 같은 반복되는 일상은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관람자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과거의 타인들 또한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희망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나 무기력한 일상으로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음악에 리듬을 맞추고는 품고 있는 꿈을 놓치지 않으려 부단히 애씁니다. 시퀀스에 삽입된 음악은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을 더욱 풍성하게 취하도록 강조했습니다.
음악과 그림은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지만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본질적인 걱정은 괴리가 도사리고 있는 도시 속의 삶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꿈과 소중함을 망각한 현실에 눈을 뜨라고 개안(開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이 있는 한 희망도 있다고 말한 키케로처럼 희망의 실현은 불분명할지언정 삶 언젠가 올 바람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라지만 그 바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영화 <판타지아 2000> 스틸 컷, 1999 / 제임스 알가 감독
어느 날은 고되고 힘든 하루였겠지만 알 허쉬펠드가 그린 아이스링크 스케이트장에서 아무 걱정 없이 온몸을 맡기며 춤을 추었으면 좋겠습니다.
<판타지아 2000>의 ‘랩소디 인 블루’의 시퀀스에서 표현된 시각, 청각적인 상징과 서사는 공명을 울리며 내가 처한 현실에 눈을 뜨게끔 도와주었습니다.
예술이 내게 주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영감이라는 도구, 즉 영감의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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