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소르본 어학원을 다닐 때의 일이다. 우리 반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인텐시브 클래스로 국적, 나이, 직업 등 매우 다양한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중 동양인은 나와 중국인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영어권이 아닌 친구들은 불어가 제2외국어이거나 모국어가 불어와 같은 계열 언어든지 아무튼 불어와 무척 친근한 아이들이었다. 이미 출발선부터가 나와는 달랐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넘은 어린 친구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몇 배 더 노력했고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비싼 학비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왔다는 생각이 늘 나를 다그쳤다. 마음은 초조했고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강박증도 있었다. 하여튼 내 머릿속엔 온통 언어에 대한 생각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지난밤에 외운 단어와 문장들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학교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기계적으로 왼쪽 벽면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익숙지 않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교실에서 한 친구가 창밖을 바라보며 책상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지아, 불 켜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가 옆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인제야 해가 반쯤 떠오르고 있었다. “지아, 여기가 100년 전에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아틀리에로 쓰였던 곳 이래. 너무 아름답지 않아?” 순간 그동안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
‘아 여긴 파리지! 수없이 고민한 끝에 올 수 있었던 파리였지!’
그제야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파리임을 알아차렸다. 우리 교실은 전면이 유리인 데다 다른 건물들의 높이가 낮아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과연 빛의 화가 인상주의자들이 좋아했을 법한 장소였다. 내게 말을 건넨 그녀는 독일인 변호사였다. 그때 이미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파리에 오기 위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작 쪽지시험 점수에 연연하는 나와 달리 매우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파리 전체를 그득 담아낼 수 있을듯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척이나 잔잔해 보였지만 누구보다 파리를, 자신을 사랑하는 표정이었다. 거울을 보니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하나라도 더 움켜잡으려는 듯 날카롭고 독기 가득한 얼굴이 있었다. 참 못나 보였다. 다시 나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처음 파리행을 결심하게 되었을 때. flight bag마다 사직서를 찔러 넣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릴 때. 나의 마음가짐과 내 삶의 방향에 대해 말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에 급급하여 정말 중요한 건 놓치고 있었다.
평. 정. 심. 불혹이 넘은 지금도 붙잡기가 쉽지 않다. 마음이 어지럽거나 초심을 잃고 헤맬 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보는 작품이 한 점 있다.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