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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그것을 작동하는 것들에 대하여≫ | ARTLECTURE

≪시간과 그것을 작동하는 것들에 대하여≫

-전시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 리뷰-

/World Focus/
by 임현영
≪시간과 그것을 작동하는 것들에 대하여≫
-전시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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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 2020.08.28.~09.27 아마도예술공간 강나영,임노식,최모민
여기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일컫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이 ‘누군가의 존재’를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 제목의 본 전시 역시 마찬가지다. 전시를 구성하는 강나영, 임노식, 최모민의 작품들은 철저한 ‘대상’이 되어 타인의 시선을 통해 발견되어지기를 기다린다.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일컫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이 누군가의 존재를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 제목의 본 전시 역시 마찬가지다.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들은 철저한 대상이 되어 타인의 시선을 통해 발견되어지기를 기다린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타인과 작품이 맺는 관계다. 관계의 성질에 따라 작품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강나영, 임노식, 최모민은 이를 작품에 내재된 시간성을 토대로 풀어낸다. 각각의 작품이 작가와 닿아있을 때, 작품의 시공간은 현존하는 시공간으로 필연적으로 시간의 연속선상에 놓인다.(1) 하지만 이를 평면 캔버스 위 공간에 올려놓음으로써 감상자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 화면 속에서 작품의 내부적 요소는 최소화되고, 그 때부터 모든 것은 미적 개입이라 부를 수 있는 관람자의 체험적 요소에 따라 작동한다. 공간적 맥락과 개인의 서사를 포함한 체험적 요소는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를 재정의하고, 나아가 작품 그 자체의 의미까지도 본래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임노식-정지된 화면 속 도래한 시간과 마주하다>


지하층에 위치한 임노식의 작품들은 도래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품 속 화면은 지나간 과거를 그대로 박제해 놓은 듯 정체되어 있다. 연작 <Sand sledding slope>(2020)는 함께 전시된 <고향풍경의 드로잉>(2020)을 단서로 A4사이즈의 드로잉을 큰 캔버스에 옮겨 그린 것이다.(2) 이러한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시간의 틈은 작가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동일하게 옮겨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아니, 사건 자체를 형상으로 옮겨오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복제본의 복제본에 불과하다.

과거기억의 표상인 고향풍경의 드로잉을 참고하여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현재에는 없는 것을 그리기 위해 또 다른 과거를 참고한다는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이로 인해 작가는 어긋나버린 시공간을 떠안고 그림을 그린다. 그가 그리는 풍경은 현실 속 풍경이 아닌 드로잉 상에서의 풍경이며, 현재의 작업은 더욱 먼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작품이 회화적 평면 위에 완성되는 순간, 이는 과거와의 인연을 단절하고 스스로가 현존하는 대상이 된다. ‘도래한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일 뿐이다. 단 하나의 사건을 지속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캔버스는 무시간성의 오브젝트가 되어 관객과 마주한다. 이렇게 현실을 지향하는 화면에서 겹겹이 쌓인 시간의 레이어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관람자의 몫이다. 만일 그가 전시를 보며 <고향풍경 드로잉>(2020)<Sand sledding slope>(2020) 연작 사이의 연관성을 포착한다면, 그래서 <Sand sledding slope>(2020) 작품 안에 존재하는 시간적 거리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곧 성공적인 관람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노식, Sand sledding slope 연작(2020), 캔버스에 유채> 출처: seoulartfriend 인스타그램 계정


 


<최모민-도래하고 있는 시간 속 우리의 자화상을 보다>


2층에 올라가 최모민의 작품을 본다. 그의 작품들은 사실적인 표면과는 다르게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작가는 소수가 집단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는 현 사회의 부조리를 블랙코미디와 같은 형식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배경은 현실적이지만 인물은 현실적이지 않다. 인물이 하고 있는 행위는 더더욱 그렇다. 관람자가 화면에서 느끼는 부조화는 단순히 통일성 없이 놓인 형식적 요소들로부터 만들어진 이질감 뿐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 <구멍>(2020), <태우다>(2020)에서 보이는 불협화음은 다름아닌 사회와 개인이 만들어내는 부조화다.

 

<구멍>(2020)의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따로 존재한다, 이목구비가 흐릿한 얼굴은 개인의 정체성 파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익명성 아래 가려진 철저한 이기주의와 파괴성은 집단과 개인의 갈등, 그리고 집단 속 개인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궁극적으로 관객은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이상적인 공동체는 사실 허상에 불과하다는 작품의 메시지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며, 이는 작품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자동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불편함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작품 <계단에 사람들>(2020)은 작가의 커리어에서 처음 등장하는 내부풍경화이다.(3) 층과 층사이를 잇는 계단에 놓인사람들은 그곳에 비스듬히 기댄 채 비틀거린다. 축 쳐져 뒤틀린 그들의 형태 위로는 그림자 같은 어두움이 드리운다. 아마도 이는 집단에서의 소속감과 타인의 보호를 낙관했던 개인에 대한 비판이며, ‘지금’ ‘이곳에개인이자 집단으로 존재하는 우리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최모민의 작품의 도래하고 있는’, 즉 우리를 둘러싼 시간에 관한 것임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다. 그의 작품에 그려진 대상들은 우리의 현실을 일깨우는 도구로 역할하며, 그로부터 관객은 그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개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빠르고 깊이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로부터 우리는 작가의 지시물이 겉으로 드러난 자명한 대상이 아니라 작품에 기호와 상징으로 나타난 동시대의 사회문화라는 사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림 내부의 현실 그 자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변주된 것이지만, 그 그럴듯함은 이를 수용하는 관람자의 내면과 결합해 그 어느 때 보다도 커다란 정신적 깨달음을 선사한다.


 


<최모민, 구멍 The hole(2020), 캔버스에 유채> 출처: seoulartfriend 인스타그램 계정



 

<강나영-낭만과 허무로 가득한 도래할 시간을 기다리다>


앞서 본 임노식과 최모민의 작품들이 각각 도래한 시간과 도래하고 있는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면, 강나영의 작업에서는 앞으로 도래할시간을 엿볼 수 있다. 다시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어둑한 곳에서 관람자를 고요히 기다리고 있는 세 개의 <기다리는 조각들>(2020)을 만나게 된다. 이 조각들은 기꺼이 관조의 대상이 되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어떤 것으로든 변모할 준비를 마쳤다. 관객이 시간을 가지고 공간을 머무르는 동안 미완결로 남아있던 조각들은 온전히 채워지며 비로소 완연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이유로 관객이 처음 전시공간에 진입했을 때의 조각들과 뒤돌아 전시장을 나갈 때의 조각은 각기 다른 시간적 층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조각의 시간은 다른 공간에서 유래한 타인의 존재에 의해 변화하고 그가 끌고 온 다른 시공간과 융합하며 마침내 흐른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본다. 의자가 있다. <()별을 보기 위해 만든 의자>(2020). 의자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에서 별이 떨어진다. 조용한 공간과 대비를 이뤄 율동하는 물체에 대한 흥미 때문일까. 관람자는 몇 번이고 의자에 다시 올라 별을 보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그는 그저 별을 보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결국은 오지 않을 별()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게 한다는 것을.

 

이러한 기다림과 희망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떨어뜨린 것>(2020)에서도 이어진다. 암흑 속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것은 누가 떨어뜨렸는지 모를 감자칩 모양의 오브제 한 조각이다. 이 파편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기억을 돌이켜보면 조금 전 별을 보기 위해 올라간 의자 옆에 놓인 감자칩 바구니에서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떨어뜨린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해 볼 때, 이는 과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떨어뜨린 조각은 과거의 정지된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으로 관람자의 시선이 <()별을 보기 위해 만든 의자>(2020)의 감자칩 바구니로 옮겨왔을 때 조각은 이미 거기에 없다. 이처럼 강나영의 작업은 오브제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시간적 층위의 불연속성을 암시한다. 이쯤 되면 별을 보기 위해 올라간 의자에서 관람자가 기다리는 것이 별똥별인지, 언젠가 떨어뜨린 하나의 조각인지 불분명해진다. 다만 관람자가 기다리는 것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들이며, 절대로 완성되지 못할 그 무언가다.

 


<강나영, 기다리는 조각들 They are waiting for(2020), 혼합재료> 출처: seoulartfriend 인스타그램 계정


<강나영, 별(똥)별을 보기 위해 만든 위자 Until you see a shooting star(2020), 혼합재료, 가변크기> 출처: seoulartfriend 인스타그램 계정



<결언>


지금까지 전시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에 놓인 시간성, 그리고 외부와의 특수한 관계에서 설정되는 작품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일상적 소재로부터 도래한, 도래하고 있는, 도래할 시간이라는 연속적 시간 개념을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외부에서 온 타자인 관객의 시간과 교차하며 함께 움직인다.

 

종합해보면, 전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와 해석은 작품 바깥의 요소인 작가와 작품의 상호작용, 감상자와의 교감 그리고 시공간의 영향이 한 데 어우러진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특수관계로 인해 재구성된 공간은 일종의 시간화된 공간, 즉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을 넘나드는 탈경계의 공간이다. 동시대미술에서 시간의 표현은 더 이상 직선적이고 순차적인 물리적 시간개념에 한정되지 않는다.(4) 시공간을 채우고 있는 상이하고 다양한 층위의 파편들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현재의 자의식을 일깨우기도 하며 우리의 리얼리티와 가장 밀접한 곳에 위치해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작품을 둘러싼 공간을 본다. 과거, 현재, 미래가 혼합된 거대한 흐름을 내포한 공간은 초월적이다. 그리고 공간적 개념으로서의 전시장은 그곳으로 우리를 불러들여 홀로 작동할 수 없는 것들을 작동하게 한다.



1) 박성환,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 전시리플렛」, 아마도 예술공간, 2020, p.1

2) 앞 글, p.1

3) 앞 글, p.2

4) 고충환, 「회화의 복권과 서사담론」, 월간 문화예술, 2001, p. 42

 

<참고자료>

박성환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 전시리플렛아마도 예술공간, 2020

고충환회화의 복권과 서사담론월간 문화예술,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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