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Thanks Offering.
윌리엄 아돌프 부궤로의 이 그림은 슬프다. 핏기 없는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가 촛불을 들고 있다. 어머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동공이 풀린 눈과 반쯤 넋이 나간 표정. 창백하고 파리한 소녀는 촛불을 손에 쥘 힘조차 없다. 고개를 떨군 소녀의 표정은 고통스럽다. 어린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기분이라 보는 사람도 처연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 그림의 제목이 The Thanks Offering 이라는 사실이다.
<감사 제물> 쯤으로 해석되는 제목. 공감하기 어렵다. 대체 무엇에 감사한단 말인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 어린 소녀를 인신공양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그림의 세부 묘사에 주목해 보면, '무엇에' 감사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누구에게' 감사하는 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림 아래에는 성경책과 묵주가 놓여 있고, 어머니의 눈빛이 닿는 곳에 성모상이 있다. 성모상 옆에는 또 하나의 초가 타오르고 있다. 소녀와 어머니가 간신히 들고 있는 가느다란 촛불보다는 더 견고한 빛을 내고 있다.
어머니는 기도했을 것이다. 딸을 살려달라고, 나의 모든 것인 이 아이를 제발 앗아가지 말라고, 차라리 나를 데려가고 이 아이를 남겨달라고. 예수의 어머니 성모님에게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당신도 어머니이지 않느냐고, 모정이라는 공통분모에 호소하며 읍소하고 오열하고 절규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그렇게 흔하게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 된다. 많은 기도는 이루어지지도, 응답받지도 못한다. 어머니의 기도 또한 그렇게 스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딸의 생명은 곧 사그라질 것이다. 잔뜩 초췌해진 어머니는 이제 울 힘조차 없다. 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 어머니도 함께 쓰러질 것만 같다.
어찌하여, 왜, 감사할 수 있는가.
딸은 고작해야 대여섯 살 쯤 먹었을까. 더 어릴 수도 있다. 딸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나와 삶을 함께하기까지 몇 년 동안은 어머니의 인생에서 최고의 나날이었으리라.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사랑과 축복으로 충만한 시간이었으리라. 그 짧은 기억만으로도 괜찮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리라. 딸의 육신이 없어져도 딸의 환상으로 어머니는 살아가리라. 딸의 마지막 순간 어머니는 딸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 딸이 당신에게 왔던 사실에 감사하리라.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간신히 딸에게 마지막으로 감사했다고, 고마웠다고 되뇌이리라. 이후의 삶은 산 자의 몫이므로.
작가가 Thanks Offering(감사 제물) 이라는 제목을 반어적이거나 반항적인 의미로 지은 것인지, 나의 감상과 유사한 맥락에서 지은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내게 다가오는 의미로서 받아들일 뿐이다. 이 그림의 제목이 그저 '제물' 이 아닌 '감사 제물' 이 되었을 때에는 '감사함'에 그 방점이 찍혀 있을 것이므로.
어쩌면 우리의 삶은 늘 누군가에게 봉헌되는 제물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 누군가가 나 자신일지라도.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두려움도, 환희도 절망도 모두 종국에는 번제물로 타오르리라. 이 모든 감정을 감싸는 삶에 대한, 혹은 신에 대한 감사의 힘이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해 주는 힘이자 고난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인지도 모른다. 모순되고 잔인하게 들리기마저 하나, 삶은 감사할 수 없는 순간에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낸 것이었다. 한창 힘들던 시절, 나보다 더 아파하던 어머니를 위해 발견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딸의 고통에 대해 항상 딸보다 더 크게 반응했다. 나는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어머니는 괜찮지 않았다. 모든 일을 겪는 사람은 나인데 감각을 느끼는 사람은 어머니인 것만 같았다. 어떤 말로 어머니를 위로해야 할까 고민했으나 절대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해도 어머니는 충분치 않은 것 같았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행복의 요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이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디즈니랜드가 아니다. fairy god mother가 짠, 하고 나타나 요술 지팡이를 휘두르는 법도 없고 마녀와 악당이 저절로 벌을 받지도 않는다. 억울함을 알아주는 이는 없고 겹겹이 쌓인 한은 해소되지 않는다. 경륜이 쌓인 어머니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종종 일치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의 제목과 의미를 설명했다.
-엄마, 그래도 감사해야 하는 거야.
-말이 쉽지. 너도 자식 낳아 봐라. 그렇게 되나.
-엄마, 그래도 나는, 살아있잖아.
-그렇긴 하지.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